잘나가던 기획자의 몰락
“제가 회장님 보고자료를 만들게 된다고요?”
“쉿, 너무 크게 얘기할 건 아니고. 그래. 파인애플 대리가 총괄해서 담당해봐.“
“아…저 너무 마음이 무거운데요 팀장님…”
석유화학업계는 불안했다. 지금은 분명히 돈을 벌고 있었다.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 달의 영업이익을 계산했다. 때로는 사업부 별로 공헌도를 가지고 싸우기도 했다. 들어오는 신입사원들의 스펙은 어마어마했다. 한 때 우리 회사는 한국에서 연봉 5등 안에 들 정도였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미국에서도, 중동에서도 싼 석유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진작 우리를 바짝 따라와 있었다. 친환경이 대세가 되자 사회 전반적으로도 ‘석유화학은 사양산업’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영업이익은 감소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업계를 전반적으로 돌아보는 보고를 하기로 했어.”
“아…네. 알겠습니다.”
“각 사업부별 기획팀이랑, 우리 팀 전체가 붙어서 준비할거야. 파인애플 대리는 총괄 책임자고.”
떡 먹다 목에 걸린 것처럼 숨이 막혔다. 부담감과 책임감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한다’는 묘한 흥분도 끓어올랐다.
”저희 회사 사장님께서 그 분께 직접 보고를 하시는 자료인가요?”
“음, 그게… 아직 조직도상으로는 애매한 부분이 있어서 그분은 배석만 하시는 거 같아.“
뉴스에 매일 등장하는 재벌3세에게 올라가는 자료를 내 손끝으로 만들게 된다는 사실이 꽤 짜릿했다. 언론에 비치는 그의 모습은 매우 스마트했다. 실제로 그는 이런 저런 성과를 내며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는 회사 공식 조직도상 최정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룹실 보고시 그는 ‘배석’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누구를 향해 보고하는 것인지.
그 자료를 내가 총 책임을 지고 만들게 되었다.
”라임씨, 여기 이 부분 기술 설명이 좀더 클리어했으면 좋겠어요.“
”오이 과장님, 공장이랑 이 안전 규정 리스크 좀 더 확인해 주세요.“
필요하면 사업부에도 직접 찾아갔다.
“사업부장님, 저희가 중요한 보고자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업부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아, 그럼요. 파인애플 대리님…”
팀 전체가 보고 준비에 달라붙었다. 먼저 보고 방향을 정한 후, PPT 분량에 맞춰 각 장의 핵심 메시지를 기획한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야 할 각종 데이터, 정보, 활동 내역들을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쌓아 토대를 만들었다. 그런 후 각 담당자가 맡은 부분을 초안으로 만들어 주면…
그 때부터는 나의 무대였다.
내가 가진 달란트는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었다. 한 번 내가 내용을 이해하고 나면, 그걸 이해하기 쉽도록 남들에게 설명하는 데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쉽게 쉽게 보기 좋고 예쁜 PPT를 만들어 냈다. 기본적인 지식만 있으면 바로 석유화학업계의 현황과 문제점, 해결방안을 읽어낼 수 있도록.
그것이 대기업 기획부문에서는 필요한 능력이었다.
경영진들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요청드린 건 10년치 데이터인데 5년치 밖에 없습니다.”
“이 신제품 향후 판매 전망치가 과도하게 높아 보이는데요, 근거 자료가 있을까요.”
격무에 지치고 압박을 받기 시작하자 내 말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꽤나 친했던 사람들이 내 앞에서 말조심을 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걸 느끼면서도 나도 나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어. 파인애플. 잘 할 수 있어.“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먹는 시간도, 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친정부모님이 거의 아이들의 육아를 전담했다. 잘은 몰라도 중요한 프로젝트에 집중하라며 아이들 등하원과 육아를 해 주시겠다 했다. 차라리 그것이 아이들을 위해서도 좋았다. 그 때의 나는 잘 갈아진 칼처럼 예민해서, 아이들에게조차 짜증을 내곤 했으니까.
”얘들아! 엄마 일하잖아! 둘 다 방으로 가!
하나, 둘…!!!“
나는 죄책감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지금 다시 돌아보면 온 몸이 뾰족뾰족해진 채로 날이 서 있었던 나를 본다. 그 때 나는 아이들에게 크게 빚을 졌다. 앞으로 두고 두고 갚아야 할 부채였다.
최종 보고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초안은 완성되었다. 끊없는 수정과 보완이 필요했다. 그분에게 전달해 드릴 보고 자료 PPT는 단 7장이었지만, 백업 PPT는 100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파인애플 대리, 사장님께서 그분께 보고하실 때 질문이 나오실 수도 있잖아.“
“네 그렇죠.”
“그러니까..그 참조하실 수 있도록 백업 PPT의 요약본도 만들자고.”
“백업의 요약본이요?”
“어, 질문이 나왔을 때 바로 답하실 수 있도록. 사장님 PPT 뒷면에 작게 만들어 드리자는 거야.”
한 마디로, 사장님의 ‘커닝페이퍼’를 만드는 것.
그분의 질문에 즉답 하실 수 있도록.
“그러면 5년 전에는 영업이익이 어땠죠?”
“네. 5년 전에는 1조 0000억이었고, 그 이후에는 0000억…. 사업부별로는…“
우리는 커닝페이퍼도 매우 공들여 만들었다. 사장님이 그 분께 그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잘 찾아서 참조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완성하자 눈물이 날 정도로 뿌듯했다. 이 지난했던 과정은 모두 사장님이 그분에게 보고하는 한 시간의 보고를 위한 것이었다.
”정말 최후의 최종본입니다.“
”오케이. 이거 다섯 부 프린트해줘.“
CEO는 그 프린트물을 들고 그룹실로 천천히 걸어갔다. 가슴이 찡했다. 그 옛날 채찍질을 당하며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을 쌓던 민초들이 떠올랐다. 피라미드가 완성이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죽도록 힘들었어도, 막상 그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을 보면 기분이 좋았을까? 그저 힘들고 슬펐을까? 그냥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을까?
”잠시만 좀 더 대기하자. 사장님이 급히 뭐 물어보실 수도 있으니…“
”네 팀장님.“
우리는 다른 업무를 처리하며 대기했다. 다행히 비상 연락은 없었다. 한시간 반쯤 후였다. 사장님과 보고에 들어간 기획실장이 복귀했다. 우리는 전원 기립했다. 벌떡 일어서서 나는 그의 표정을 상세히 살폈다. 걸음걸이는 일단 가벼워 보였다. 기획실장은 임원실로 들어가려다 잠시 멈추고 나와 팀장을 향해 웃어보였다.
“고생했어. 기획팀이 고생했다고 자료 보면서 다들 그러시더라고.“
휴, 다행히 무사히 끝났나 보다. 기획실장은 턱끝으로 팀장을 불렀다. 팀장은 호다닥 임원실로 따라 들어갔다. 나는 다시 와르르 자리에 앉았다. 옆 자리 라임씨가 나를 향해 찡긋 웃으며 엄지척을 했다. 나도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간만에 퇴근 일찍 할 수 있겠네. 기념으로 남편에게 저녁 맛있는 거 먹자고 해 볼까. 대파 잔뜩 넣고 푹푹 삶은 육개장 먹고 싶다.
육개장 맛집을 고민하는데 팀장이 임원실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팀장이 턱 끝으로 나를 불렀다. 그를 따라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파인애플 대리, 고생했고.“
”네 팀장님, 다같이 한 건데요. 팀장님이 잘 기획해 주신 덕분에…“
”음 다행히 큰 질문이나 얘기는 없이 보고가 끝났다고 하시더라고.“
”그거 다행이네요.“
”음…그리고 말이야. 그 보고가 그룹실에 여러 모로 유용했다고, 그 보고를…“
팀장이 잠시 머뭇머뭇거렸다.
”두 달에 한 번씩 정례 회의로 만들자고 얘기가 되었다네.”
“헙……어…… 두 달에 한 번이요?”
“어, 워낙 요즘 업계가 불황이고 다들 관심도 많고 하니까…“
와…나를 향해 웃어주고 고생했다고 한 건 다 공치사였어. 이 짓을 두 달에 한 번씩 해야 한다니.
”이번에는 처음이라 우리가 좀 열심히 준비했지만. 보고가 정례화 되면 좀 간소화 시키자고 내가 얘기는 해 뒀어.“
얘기 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정례화라니 잘 되었다며 실장에게 각종 아이디어를 쏟아냈겠지.
”아무튼, 오늘은 고생했으니 칼퇴하자고. 하하하.“
그렇게 나는 그룹 보고 업무 담당자가 되었다. 가끔씩 ‘그 분’에 대해 전해 듣기도 했다. 사실 대기업 총수라고 해서 다른 인간 종족인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결정 하나하나가 너무도 무겁고 중대했기에, 필연적으로 말을 아끼게 되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이렇게 하면 안되나요?’ 라는 말도, 그가 뱉으면 회사에 팀이 꾸려지고 몇십억 짜리 프로젝트가 되곤 하니까.
”우리 회사는 밀키트 말고 통조림을 증설해야 이익인데, 왜 취소되었나요?“
”통조림 공장을 지어야 이익이긴 해. 그런데 다른 계열사가 이미 통조림 공장을 짓겠다고 해서… 굳이 두 회사 다 지을 필요는 없지 않냐고 그분이 말씀하셔서…“
그리고 대기업 사장이나 대표이사라고 해서 세상사 다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들도 어떻게 보면, ‘월급 받는 직장인’이었으니까. 훨씬 무거운 결정을 내릴 뿐. 그들도 두려운 것이 많은, 잃을 것도 많은 이들이었다.
가까이서 보면, 결국 다 사람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룹 보고를 여러 번 담당했다. 점차 ‘그 분’도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보고서에 담으면 매번 삭제되었다. 괜히 ‘그 분’에게 질문을 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적당히 어려운 내용이 적당히 포장되어 예쁘게 올라갔다.
대기업 경영진들의 최고의 공포는 ‘그 분’에게 질문 받았는데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고 과정에서 많은 내용을 누락시키는 병폐를 낳았다.
질문이 나올 만한 내용들은 아예 처음부터 차단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 내용, 괜히 질문 받으면 대답하기 곤란해. 삭제해.”
이젠 회사 돌아가는 것도 머릿 속에 그려지고, 어떻게 일해야 할지도 매뉴얼처럼 만들어지곤 했다. 동시에 나는 매너리즘을 느꼈다. 한 회사에서 15년이라니. 개인의 경쟁력 측면에서는 좋은 게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한 곳에 머물면서 성장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내 커리어 패스는 이미 기획자로서 굳어지고 있었다. 고인물처럼 한 곳에 머물며 입지를 단단하게 하는 전략이 나에겐 최선이었지만, 그렇지만…
”더 성장하고 싶다.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
”내 가족들도 소중해. 내 아이들이 커가는 걸 옆에서 함께 하고 싶어.“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이미 나는 남편과 아이들, 친정부모님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와중 나는 짬을 내어 재테크도 했다. 백일 된 갓난 아기를 힙시트에 안고 청약 추첨에 달려갔다. 그리고 해외 주식, 그리고 코인…
그때의 나는 완력으로 꽉 짓눌러 압축된 것 처럼 살았다. 그 중심에는 항상 ‘일’이 있었다. 회사에 누구보다 환한 얼굴로 출근하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하는…
그러던 어느 날,
감사실의 고위 경영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파인애플 대리, 시간 괜찮으면 저녁 식사 할까?“
”앗, 안녕하세요…네. 부르시는데 당연히 가야죠.“
”룸을 예약해 놨으니 거기서 만나지.“
”어…저희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가도 되나요?“
”굳이? 얘기 안하고 나와도 될 것 같은데?“
그래, 그게 바로 그 날이었다.
내 모든 것이 다 무너진 그 날.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보고를 잘하는 기획자’로만 살아갈 수 없었다.
그동안 쌓아올린 기획자의 언어와 PPT, 수많은 보고와 야근의 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 일과 내 삶을 둘러싼 구조를
진짜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 이후 이야기는 <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를 참조해 주세요.
어두운 이야기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읽으셔야 합니다.
그동안 ‘예전에는 잘 나가던 기획자였습니다만’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화에서 마무리한 후, 에필로그로 끝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