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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던 이가 망해버리면 기분이 어때

마지막회

by 찬란

뜨겁게 사랑했었다. 한 때 내 몸과 마음을 모두 쏟아부었다. 일어나는 순간 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내 생각은 오로지 그를 향했다. 그는 가끔씩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기도 했다. 나에게 때로 미소지어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돌변해서 나를 모질게 내치기도 했다. 나는 그저 맥없이 휘말렸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짝사랑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외롭지 않았다. 짝사랑을 나만 하는 건 아니었다. 내 주변에도 같이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그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했다. 나는 가끔씩 생각하고는 했다. 그는 나를 선택할 거라고. 짝사랑을 하는 우리들 중에 내가 그를 제일 사랑하니까, 내가 제일 잘 하니까.




“파대리님, 점심 식사 안 하세요?”

“앗, 벌써 점심시간이에요??”

“파대리님은 엄청 몰입해서 일하시는 것 같아요.”

“아…그래요? 내가 그랬나?”

“네, 완전히 무아지경으로 일하시더라고요.”

후배 라임씨가 나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엄지척을 했다.

“파대리님은, 정말로 일을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요?”

“네. 제가 아는 분들 중에 가장요.”

그런가, 내가 그렇게 사랑했었나. 하긴 이렇게 24시간동안 무언가 하나에만 매달리며 몰두하는 감정.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은 일방향이었다. 이 짝사랑은 무려 15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결국 상사의 성추행으로 인한 퇴직으로 결말났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내 사랑은 처참하게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사랑했던 것은 사실이기에, 회사를, 그리고 일을.




뉴스에 석유화학업계에 대한 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석유화학단지 안에 있던 회사 하나가 무너질 것 같다고 했다. 나도 잘 아는, 아는 이들이 있는 회사였다. 업계의 불황은 오래된 이야기였다. 중국과 중동의 싼 물건들이 밀려들어오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들 무심했다. 석유화학은 사이클이니 이 또한 지나가고 나면 다시 호황이 찾아올거라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심상치가 않았다.

“보시면 여기 모든 건물이 텅텅 비어있네요. 지역 주민 말로는 석유화학단지 전체 불황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짙은 침체가 계속되어 상가들은 영업을 중단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유튜브 채널을 통해 본 그의 최근 모습은 꽤나 수척했다. 회사들은 수십억 수백억 적자를 내며 울며 겨자먹기로 공장을 돌리고 있었다. 조선업과 반도체 산업이 다시 스물스물 회복해 가는 모습을 보일 때도 석유화학은 그렇지 못했다. 한 때 그 업계의 전략실에서 근무했던 나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기대 해 볼만한 호재도 없기에 희망도 거의 없다는 걸.

“석유화학업계의 구조조정이 진행 중입니다. 정부는 먼저 업계에 구조조정 초안을 요구했습니다…“

한 때 사랑했던 애인이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어떨까.

기분이 째질까?

”야 잘 탈출했어, 잘했네. 파인애플!“

생각보다 유쾌하거나 고소하지는 않았다.

그럼, 안타까울까?

”에고 안타까워라, 한 때 내 적을 두었던 곳인데…“

그렇다고 마냥 안쓰럽고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씁쓸했다. 뉴스와 유튜브로 보는 그의 황량해진 모습. 그 안에서 생활을 영위하던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있겠지. 한 때는 한솥밥을 먹으며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이 지냈더라도.

건조하게 생각하면 자신의 경쟁력을 키워서, 그것으로 다른 곳에 ‘탈출’해 잘 벌어먹고 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지난 과거의 회사야 이래 되었든 저래 되었든 무슨 상관이겠어. ‘탈출은 지능순’이라는데.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는 다르게 말한다.

”그 때 너는 최선을 다했고, 열렬하게 사랑했어.

좋았던 기억은 좋았던 대로 놔두고 살아.“

그래, 사랑했었던 건 사실이야.

그 사랑이 제대로 향했는지,

그 사랑이 나에게 돌아는 왔는지,

그런 건 부차적인 것이다.

나는 불꽃같이 사랑했고,

그 기억은 나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사랑은 끝났지만 사랑했던 내가 이렇게 남아있다.

내 사랑은 진짜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했던 나는 참 예쁜 사람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마지막회라 멤버십이 아닌 전체 공개로 발행했습니다.

(멤버십 구독자분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ㅠ)


그동안 ‘예전엔 잘나가던 기획자였습니다만’ 시리즈를

그리고

파인애플 대리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는 에필로그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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