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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ily Dec 01. 2024

사무실 분노의 락커

"내 말 안 들려? 방법 가져오라고!!!!!!!!!!!!!!!!!!"

스트레스 탓일까, 새벽 5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눈이 일찍 떠졌다. 잠을 조금 더 자볼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킨다. '어제 매출이 얼마나 나왔으려나..' 평소와 같이 눈 뜨자마자 담당 서비스의 매출을 확인한다. 30,000,000원. 누적 달성률 70%


'아 진짜 일 더럽게들 못하네. 달성을 못 할 것 같으면 미리미리 방안을 가져와야 할 거 아냐' 

고액 연봉을 약속받고 회사에 스카우트된 하상무는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심적으로 불안한 상태다. 월 말이 다가오는데 예상 매출을 달성하지 못할 것 같아 화가 난다. 내가 얼마나 하루 종일 열심히 하는데! 내 밑에 직원들은 나만큼 열심히 하지 않는 게 화가 난다. 고액 연봉에 스카우트된 순간부터 부담감이 나를 짓눌러 화를 참기가 힘들다. 



성큼성큼

화가 난 발걸음으로 출근을 서두른다. 매출 달성률이 저조하니 사업부서는 일찍 나올 거라고 기대한다. 아니 일찍 나오지 않으면 너무 화가 날 것 같다. 하상무는 직원들보다 몇 배가 넘는 연봉을 받으면서 직원들이 본인처럼 일 하기를 바란다. 본인처럼 일하지 않는 직원은 무능하고 게으르며 열정 없다고 생각한다. 


일찍 나오니 차도 막히지 않아 생각보다 더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긴 롱 카디건을 펄럭이며 빠르게 회사 복도를 지나쳐 사무실 본인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캄캄한 방에 들어가 신경질적으로 불을 켠다. 

필요는 없지만 패션상 들고 온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는다. PC의 전원을 켜고 가느다란 다리를 빠르게 떨어댄다. 딸각딸각. 딸각. 빠르게 마우스를 클릭해서 어제 매출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다양한 카테고리 중 하나의 카테고리의 매출이 푹 꺼져있다. 이 카테고리의 담당을 보니 요즘 늘 정시 퇴근을 하던 MD다. 어쩐지. 빨리 퇴근하더라니.. 그니까 매출이 이 모양이지. 오기만 해 봐라 아주. 이를 악물고 직원들이 출근하기까지 기다린다. 인터넷 창을 열어 여러 기사를 보며 트렌드를 파악하고, 통계를 보며 요즘 시장이 어떤지 확인한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8시 45분.. 직원들이 하나 둘 자리에 앉기 시작한다. 직원들의 출근을 조금 더 자세히 지켜보려고 방 문을 열어두고 지나가는 직원들의 얼굴을 확인한다.


김대리 왔고.. 정사원, 윤대리, 조 과장, 이 부장.. 세 명 정도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8시 55분.. 내가 분명히 출근 10분 전에 와서 앉아서 업무 준비하라고 말했는데 이것들이 상무 말이 말 같지 않은지 아직도 안 와? 그 순간 백 과장이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가 앉는다. 

8시 59분 나머지 두 명이 빠르게 복도를 지나 본인 자리로 향한다. 


이것들이.. 나를 무시한다 이거지? 10분 전에 오라고 저번주에 이야기했는데 9시 딱 맞춰서 와? 

건방지고 게으른 것들. 


"다들 회의실로 지금 당장 모이세요."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한 손에는 노트와 휴대폰을 들고 회의실로 간다.

나머지 직원들도 빠르게 회의실로 들어온다. 


작은 눈을 부라리며 직원들 얼굴을 한 명씩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어제 매출 얼마 나왔지?"

"3천만 원입니다." 눈치 빠른 이 부장이 무거운 분위기를 감지하고 빠르게 대답한다. 

"어제 매출 목표 얼마야?"

"5천만 원입니다." 상무의 이쁨을 받고 있는 윤대리가 대답한다. 

"근데 왜 3천만 원밖에 안 나왔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직원들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한 톤 높인다.

"지금은 날씨도 그렇고 비수..."

"날씨???? 내가 날씨 탓 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제일 한심하게 생각하는 새끼들이 매출 떨어졌다고 날씨탓 하는 새끼들이야!!! 장난쳐 나랑???" 심장이 쿵쾅쿵쾅 뛰며 화가 난다. 회의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직원들을 압박한다. 

"목표 매출 달성 하지 못했을 때 플랜 뭐야?" 

"....."

"플랜 없어? 아무 생각 없어?" 

들고 있던 노트를 바닥을 향해 집어던지며 소리 지른다. 직원들은 무거운 분위기에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경직된 채 땅만 바라보고 서있는다. 

"이번달 매출 목표 달성할 수 있게 각자 플랜 짜서 오후에 보고하세요."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내뱉는다. 아까 던진 노트를 주워서 가지고 나가기엔 체면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두고 회의실을 나간다. 이 부장은 늘 그래왔듯 떨어진 노트를 주워 들고 하상무를 빠르게 따라간다. 



똑똑 오전에 냈던 화가 조금은 가라앉은 상태에서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린다.

"네 들어오세요." 

"상무님, 매출 목표 달성하기 위한 안 준비해서 가져왔습니다." 조 과장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어 여기 앉아."

"오늘 오후부터 5% 쿠폰 지급 이벤트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타사를 살펴보니 비수기라 그런가 다들 쿠폰 플레이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끝이야?"

"다른 안도 있습니다. 곧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난 날이라 7% 쿠폰 이벤트를 하려고 합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 거랑 우리 회사랑 뭔 상관이야?"

다시 화가 나기 시작한다. 생각이라고는 안 하는 이 멍청한 직원들을 내 손으로 뽑았다고 생각하니 나에게도 화가 난다. 

"견우와 직녀가 갑자기 왜 나오냐고!!!!!!!!!!!!!!!!!!!" 화가 나면 소리를 질러야 직성이 풀린다. 누그러졌던 화가 다시 피어오르더니 아까보다 더 큰 분노가 밀려온다. 

"죄.. 죄송합니다.. 다시 고민.."

"아니 다시 고민하지 말고, 그냥 처음부터 내 마음에 드는 걸 가져오라고!!!!!!!!!!!!!!! 이딴 거 말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이렇게 질러도 목이 쉬지 않고 이런 성량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다 주말마다 하는 락밴드 덕이다. 견우와 직녀 이벤트를 가져온 조 과장은 늘 있었던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떨구고 이 시간이 지나가길, 하상무의 화가 그만 누그러지길 바라며 기다린다. 

"병신새끼 나가봐" 하상무는 평소와 같이 욕설을 내뱉으며 조 과장을 내보낸다.

조 과장은 늘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육두문자를 듣고 끓어오르는 내면의 화를 누르며 문을 닫고 상무 방을 빠져나온다. 


"하상무 님, 식사 가시죠." 이 부장이 친히 방으로 나를 모시러 왔다. 역시 내 충신이라니까. 이 부장이 안 챙겨줬으면 혼자 밥을 먹으러 가기도 뻘쭘했을 텐데 마침 출출할 때 나를 모시러 왔다. 눈치가 빠른 부하직원이 있으면 이런 게 좋지. 암. 못 이기는 척 신발을 갈아 신고 구내식당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아침부터 직원들을 잡아서 그런가 직원들이 다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변하는 숫자만 쳐다본다. 10층.. 9층.. 8층.. 


하상무는 이런 직원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침에 혼낸 건 어제 매출이 나오지 않아서고, 메이크업할 수 있는 아무 대안이 없어서인데 왜 밥을 먹으러 갈 때까지 내 눈치를 보는 거지? 내가 부하 직원이었으면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더 많이 쳐다보고 말 걸었을 텐데. 하여간 요즘 것들이란... 쯧..


엘리베이터를 타고 구내식당에 도착해서, 식판에 반찬을 받는다. 먹을 만큼만 받고 최대한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 식판을 들고 밥을 받는데 부사장님이 지나간다. 식판을 잠시 내려놓고 깍듯하게 90도 인사를 하며 가식적인 미소를 보이며 말을 건다. "부사장님, 식사 맛있게 드셨어요?" 부사장은 옅은 미소를 보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간다. 하상무는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다시 내려놨던 식판을 들어 나머지 반찬을 받는다. 


밥을 다 먹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직원들과 다 같이 사무실로 올라간다. 

방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실시간 매출을 확인한다. 어제 동시간대와 비교하니 오늘 매출이 훨씬 좋다.

기분이 좋아진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 이거지. 이 시간대에 이 정도는 나와야 내가 면이 살지. 

매출이 잘 나오니 오전에 팀원들에게 소리 질렀던 게 조금 미안해진다. 맛있는 커피라도 한 잔씩 사줄까?


"오늘 5시에 회사 앞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 해요." 팀 방에 메시지를 보내며 내심 뿌듯하다. '나같이 직원들 잘 챙겨주는 상무가 또 있을까? 내가 대리일 때 나 같은 상무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메타 인지를 잘 못하는 하상무는 본인이 최고의 상무라고 생각하며 뿌듯해한다. 



오후 5시, 회사 앞 카페 안

"자 다들 메뉴 말하고 저~기 자리에 앉아 계세요." 오전에 소리 지른 상무는 온 데 간데 없이 친절한 말투로 팀원들을 대한다. 


"저는 아아요."

"저는 아라(아이스라테) 요"

"저는 아초(아이스초코) 요"


요즘 애들은 참 말을 잘도 줄인다. 트렌드에 민감한 나도 팀원들처럼 메뉴명을 줄여 말한다.

"아바라 한잔이요." 잠깐 신세대 같은 기분이 들어 뿌듯하다. 


팀원들이 모두 음료를 앞에 두고 삥 둘러앉아있다. 나는 그 중앙에 왕의 자리에 앉아 입을 연다.

"다들 수고 많으신 거 압니다. 지금은 우리 팀에 정말 중요한 시기예요. 모두들 잘 따라줬으면 좋겠어요. 

개선점이 있다면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저는 생각보다 열려있는 편이라 여러분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해주려고 합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지만 그래도 내가 열려있는 상무라는 것을 강조하며 이야기한다. 


.... 조 용.....


"그럼 내 왼쪽부터 한 마디씩 하기로 해요."

왼쪽에 앉아서 하상무를 의절하고 있던 이 부장이 말한다. "하상무 님이 너무 잘해주셔서 매년 저희 팀이 최고 성과를 내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하상무는 이쁜 말만 하는 이 부장을 흐뭇한 표정을 하고 쳐다본다. 

팀원들이 순서대로 한 명씩 하상무 듣기 좋은 말만 한다. 


경력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김대리 차례다. "저는 상무님이 저희를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소리를 지른다거나 물건을 던진다거나 하는 행동은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고요. 팀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하상무는 당황한다. 아니 나 때는 상무가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말았는데. 상무의 말이 그 누구의 말보다 중요하고 맞는 말이었는데. 그리고 불만이 있어도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는데. 요즘 애들은 다른 건가?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김대리를 응시한다. 김대리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따듯한 라테를 마시며 나를 쳐다본다. 김대리는 내 눈치가 안 보이는 것 같다. 잠시 잠잠해졌던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는 한 없이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붙잡고 아무렇지 않은 척, 관대한 척 웃어 보인다. 자연스레 그 옆에 앉은 이대리가 말한다. "저도 탑다운보다는 바텀업 방식으로 업무 하는 게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강한 탑다운 체제여서 일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연달아서 나를 매기다니. 내가 만만했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다음은 백 과장 차례인데 화가 나서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다.


전화가 온 척 잠시 일어난다. "잠시만요, 전화 좀." 

밖에 나가 바람을 쐬는데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대리가 감히 상무한테 불만을 이야기해?

통화한 척하고 들어온 하상무는 이내 짐을 챙겨 집에 일이 있어 먼저 가본다고 하며 일어난다.

속으로는 내심 '내일 이것들을 어떻게 잡을까. 김대리, 이대리 두고 봐' 하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 


다음날

오늘도 어김없이 일찍 나와서 방 문을 열고 앉아 모니터와 모니터 뒤로 보이는 복도를 번갈아본다.

8시 50분 김대리가 복도를 지나 사무실로 들어간다. 김대리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메시지를 보낸다.

"잠시 방으로." 

김대리가 노트를 들고 방으로 들어온다. 

"김대리, 어제 매출 어땠어?" 

"지금 와서 아직 확인 못 했.."

"책임감이 아예 없네? 아직도 확인을 못 해? 회사 와서만 확인할 수 있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제도 매출 달성 못 했잖아! 어떻게 할 거야!!!!!!!!!!!!!!!!!!!!"

아침부터 시원하게 김대리를 향해 샤우팅을 하니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기분 나쁘게 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마우스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김대리는 놀란 눈을 하고 바닥에 뒹굴고 있는 마우스를 쳐다봤다. 

"나가봐"

"네.."

김대리가 방을 나가고, 나는 기분이 한층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러게 어디서 건방지게 대리 나부랭이가 상무한테 불만을 이야기해. 이번주 내내 괴롭혀줘야지. 하고 생각한다. 

한 주간 괴롭힐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김대리의 고통이 하상무의 기쁨인 것처럼.



회사에서 마련해 준 고급 세단을 타고 퇴근하는 길. 고액 연봉에 고급 차, 회사에서 주유하고 밥 먹으라고 준 법인카드까지.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는 하상무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텅 비어있는 것 같다. 집에는 토끼 같은 자식과 마누라도 있는데 왜 이렇게 고독한지 모르겠다. 세단과 어울리지 않는 락을 크게 틀어 차를 가득 채우고 집으로 향한다. 


"여보 나왔어." 아내를 부른다. 

휑-

답이 없다. 

"수진아 아빠 왔어." 딸을 부른다.

역시 답이 없다. 


방으로 들어가 외투를 걸고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깨끗하게 씻는다. 어디선가 대화소리가 들린다.

딸 방 쪽으로 가니 대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린다. 


딸아이의 방문을 살짝 열어본다. 

"아빠! 노크하라고 했지!"

"아.. 아 미안해.. 집에 있었어?"

"어 문 닫아." 

"어.." 


딸아이 방에 아내와 딸이 같이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래도 아빠가 왔으면 인사라도 좀 해주지.. 나와서 인사도 없고, 반가운 내색도 보이지 않는 딸과 아내가 오늘따라 서운하다.


잠시 뒤, 아내가 딸 방에서 나와 나를 지나쳐간다. 

"여보"

"ㅡㅡ?"

"혹시 저녁 먹었어?"

"어 나는 수진이랑 먹었으니까 너껀 네가 차려먹어."

"어? 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라면을 끓인다. 딸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냄비를 식탁에 올려놓고 젓가락을 가지러 간다. 


"좀 조용히 해 먹어라. 저녁에 시끄럽게." 아내가 방에서 나와 나를 흘겨보며 말한다.

"어" 퉁명스럽게 답하고 젓가락을 들고 라면 앞에 앉는다.


호로록호로록. 빠르게 라면 한 그릇을 비웠다. 

설거지 통으로 그릇을 가져가 대충 헹군다. 

"제대로 씻어놔라. 물로만 헹구지 말고. 저번에도 더럽게 씻어놨던데"

소파에 앉아 나를 보고 있던 아내가 말한다. 화가 나지만 꾹 참고 알겠다고 답한다. 주방 세제를 꾹 눌러 수세미에 묻히고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낸다. 


설거지를 끝내고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나온다. 방으로 들어가 로션을 바르며 침대를 쓱 보니 아내는 이미 이불속으로 들어가 있다. 로션을 다 바르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 앉는다. 

"나가서 자" 아내가 공격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왜?" 

"살 닿는 거 싫어."


... 할 말이 없다. 우리 사이가 언제부터, 왜 이렇게 된 지 모르겠다. 조용히 베개를 갖고 거실 소파로 나온다.

소파에 베개를 던지듯 두고 TV를 켜고 볼륨을 가장 낮춘 상태로 쓰러지듯 눕는다.

아내가 있어도, 딸이 있어도 너무 외롭다. 모두가 다 가졌다고 하지만 나는 행복하지가 않다. 알 수 없이 또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른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에서 땀이 난다. 왜 이러지 요즘...



"하대리, 이거 뭐야? 내가 본 적도 없는 보고서를 사장님께 직보고 드렸어?"

"네, 제가 보기에 사업성 있어 보여서요. 이렇게 만들면 무조건 성공해요." 대리 시절의 하상무다 대답한다. 

"그걸 왜 내 컨펌도 없이 바로 올려? 정신 나갔어?" 

"저번에 팀장님께 올렸었는데 반려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반려했다는 건 내가 컨펌하지 않았다는 뜻 이잖아. 근데 팀장 컨펌 없이 상부로 올리는 게 정상이야?"

"무조건 돼요. 이거 진짜예요. 제 말 한 번만 믿어보세요."


하상무는 대리 시절부터 욕심이 많았다. 통계청을 매일 같이 들어가서 통계 자료를 보고, 뉴스 기사를 보고, 앞으로 어떤 분야가 뜨는지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지 등을 매일 같이 고민했다. 그러던 중 '온라인'에 꽂혔다. 지금껏 오프라인 기반의 사업을 하는 회사에서 온라인이라니!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도 믿어주지도 않았다.


하대리는 온라인 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보고서를 써서 팀장과 실장에게 보고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본인 판단에는 무조건 '될' 사업이었는데 너무 답답했다. 자료를 계속해서 보완하고 시도했지만 위에서 막혀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사장을 찾아가 직보 고를 드리게 된 것이었다.


사장은 하대리의 패기와 안목을 높이 샀고, 온라인 사업을 시작했다. 하대리를 중심으로 TF가 짜졌고 사이트를 만들어 홍보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지지부진한 것처럼 보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거래액이 쭉쭉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볼 수 없던 성장이었다. 하대리는 본인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대리는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하고 빠르게 인정받았다. 


승진이 누구보다도 빨랐고, 동일 직책에서 나이는 가장 어렸다. 그러다 보니 점점 거만해지기 시작했다.

한 번의 큰 성공이 모든 사람을 본인 발 밑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거만함을 넘어 오만해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회사가 본인 것이라도 된 냥 회사에서는 폭군이 따로 없었다.


부하 직원은 물론이고, 동료에게까지 소리를 지르고 제 멋대로 행동했다. 특히 고학력자를 엄청나게 싫어했다. 고등학교 때 공부 좀 잘했다고 콧대 높은 게 특히 싫었다. 회사에서 본인만큼 큰 성과를 내지도 못해 놓고 학력이 높다는 이유로 본인을 무시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상무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열심히 본 수능의 등급은 서울 전문대나 지방대 정도밖에 가지 못 할 수준이어서 하상무는 어쩔 수 없이 수능 점수에 맞춰 지방대를 택했다. 4년 동안 타지에서 홀로 학교를 다니며 마음 붙일 곳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매일 혼자 밥을 먹고, 수업을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름 학점 관리는 잘 되어 있었다.


그렇게 지방대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는 데 무려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학력이 좋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겨우 중견기업에 취업을 한 하상무는 그때부터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했으니 일이라도 최선을 다 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벌이 안 좋아도 일을 잘해서 인정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상무는 사원, 대리 시절 본인의 시간을 회사에 온전히 바쳤다.


그렇게 중견 기업에 커다란 성공을 가져다주고, 본인도 이제까지 받아본 적 없는 대우를 받으며 완전히 제 멋대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본인이 회사에 큰 성과를 가져다주었으니 화가 나면 참지 않고 화를 내고, 일을 못하면 사람들을 무시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본인이 세우고, 키운 회사의 오너처럼 행동했다. 점차 사람들이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는 회사에서의 평판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그와 일하는 걸 꺼려했다. 하상무는 이때즈음부터 온라인 사업에 관심 있는 여러 중소, 중견 기업에서 스카우트받기 시작했다. 시장에서는 하상무의 인성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저 '엄청난 성과를 낸 대리' 정도로만 알았다. 일 잘하는 사람을 마다할 회사는 없었고, 여기저기서 그를 모셔가려고 했다. 


그렇게 여러 군데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하상무는 그중 본인에게 가장 높은 연봉과 좋은 조건을 제시한 중소기업을 골랐고, 재직 중인 회사에 퇴사를 통보하고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게 됐다. 새로운 회사는 임원으로 가게 되었으니, 더욱더 막강한 권력을 가지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110%로 확대하세요" 하상무가 말했다. 

"네" 

"100%로 축소하세요" 다른 팀 이상무가 말했다. 

"네"


매 달 진행하는 성과 보고가 있는 날. 모든 팀의 상무가 미팅에 참석했다. 

유독 하상무와 이상무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그들은 회의실이든, 사무실이든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기 일쑤였다. 오늘은 보고 자료가 보이는 비율이 크다, 작다로 싸우고 있다. 


중간에서 화면을 켠 대리만 곤욕이었다. 화면을 확대했다, 축소했다 난리였다. 

그렇게 화면 비율로 싸우다가 사장이 회의실에 들어오자 싸움이 자연스레 중단됐다. 


각 팀 별 보고가 시작됐고, 하상무 차례가 됐다.

"저희는 이러저러한 전략으로 이런 과제들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장이 쏘아 부치듯 말했다. 

"지금 매출 계속 떨어지고 있지 않나요?"

"네 지금은 전체적으로 경기가 좋지 않아..." 하상무가 말을 더듬이로 이어갔다.

"지금 하는 과제들 효과는 있나요?" 앙숙인 이상무도 거들며 하상무를 공격했다.


하상무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이상무를 잠시 흘겨보고 말을 이어갔다.

"네, 진행 과제들 성과 보고하려고 준비 중인 상태에 있습니다. 매출은 이번달 목표 달성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1시간이 넘는 전투 같은 회의가 끝나고, 사장은 하상무를 불렀다.

"하상무 님, 이전 회사에서 큰 성과를 냈다고 들어서 스카우트 제의 드린 것이었는데요. 심지어 요구하셨던 연봉도 맞춰드리고, 별도 방을 만들어 달라고 하셔서 방까지 만들어드리느라 회사의 많은 비용을 썼습니다. 근데 1년이 넘도록 진전되지 않는데 어떻게 되고 있는 거죠?"


"네, 노력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서비스의 성장이 더딥니다.. 사람들도 비협조적이고.."


"그럼 성장을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 사람들을 협조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 여기서 블로커가 무엇인지 등을 제게 보고해 주세요. 그래야 해결해드려야 할 부분을 해결해 드리고 하상무 님이 좋은 퍼포먼스가 날 수 있도록 도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지금과 같으면 계속 함께 하기 어렵다는 거 아시죠?"


"네" 하상무는 본인을 무시하고, 믿어주지 않는 사장의 태도에 또 분노가 끓어올랐다.

또, 매출이 계속 떨어져도 쪼아야만 방안을 가져오는 팀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멍청한 놈들 때문에 내가 사장한테 이런 말이나 들어야 되고. 화가 난 하상무는 팀원들을 또 회의실로 소집해서 본인이 받은 면박과 수치를 팀원들에게 푼다.


"그니까!!!!!!!!!!!!!!! 매출 올릴 수 있는 방안 가져오라고!!!!!!!!!"


우연히 하상무 방이 있는 층에 있던 사장이 하상무가 팀원들을 향해 소리 지르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하상무에게 잠시 본인의 방으로 오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하상무 님, 미팅 끝나면 제 방으로 잠시 오시죠."


소리를 지르다 메시지를 본 하상무는 빠르게 미팅을 끝내고, 노트를 들고 빠르게 사장실로 향한다

눈은 웃지 않고 입만 얍삽하게 웃으면서 사장실을 노크한다. 


사장은 냉정한 표정으로 하상무를 쳐다보고, 방금 목격한 일과 그동안 하상무 팀원이 퇴사하면서 하상무에 대해 이야기 한 내용, 그리고 퇴사 비율까지 이야기하며 하상무의 팀 매니징 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는 회사가 성장하려면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하상무 님이 우리 회사에 오고 나서부터 전체적으로 조직 분위기가 침체되고 무거워진다는 것을 느꼈어요. 처음엔 제가 예민한가 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어느 순간부터 조직이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상무 님이 오실 때 받은 고액 연봉과 고급 세단, 별도의 방은 모두 하상무 님을 위해 기꺼이 쓴 돈이었는데, 회사에서 돈을 쓴다는 건 결국 하상무 님에게 지출한 비용보다 더 큰 수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까 소리 지르는 하상무 님을 목격하고 하상무 님이 저희 회사, 조직 전체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나가..."


"나가겠습니다."


"네?"


"퇴사하겠습니다." 하상무 자존심 상 중소기업에서 잘리는 건 죽는 것보다 싫었다. 그래서 나가달라는 타이밍에 본인이 먼저 나가겠다고 선수 치듯 이야기했다. 


하상무는 퇴사하겠다는 말을 하고, 부들거리며 사장실을 나와 곧장 본인 방으로 향했다.

그동안 누렸던 호사를 모두 내려놓고 나가야 한다니, 한동안은 직장도 없는 채로 백수로 살아야 한다니, 지금도 가족들에게 무시당하는데 아내가 알면 얼마나 더 구박할까..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상무는 몇 주간 넋이 나간채로 지내다 퇴사 당일이 되자, 짐을 바리바리 싸 퇴사 준비를 했다.

그동안 본인에게 충성한다고 생각했던 부장을 비롯한 모든 팀원들이 본인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마지막 날이지만, 팀원들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짐을 싸놓고 퇴근 시간까지 기다렸다.

팀원들이 하나 둘 퇴근을 하는데, 방문을 꼭 닫고 마지막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박스만 응시했다. 


오후 8시쯤 되었을까, 모든 팀원이 자리를 비우자 그제야 박스를 들고 이제는 마지막이 될 본인의 방에서 걸어 나왔다. 매일 성큼성큼 걷던 하상무가 박스를 들고 나온 그날만큼은 터널 터널 느린 걸음이었다.

고급 세단 옆에 주차된 볼품없는 본인의 차에 박스를 실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와도 인사하지 않은 채, 도망치듯 회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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