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금 Jul 24. 2024

일이 재미없어도, 파김치는 맛있었으면 좋겠다

요즘 들어 회사 일이 재미가 없다.

재미는 물론, 감동도 없고, 그렇다고 바쁘지도 않다. 물론 바쁜 시즌이 찾아오면 이렇게 재미없다고 투덜거렸던 게 참 배가 불렀었구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 요청하는 보고서를 정리하고, 원고에 오류 난 게 없는지 확인하고.. 주어진 일들만 조금씩 해나가다 보면 어느새 6시. 예전에는 선배들 눈치 보여서 바로 일어나지도 못했지만, 일이 없는 요즘은 그냥 바로 일어나서 씩씩하게 인사하고 회사를 나선다.


빠르게 집에 와서 하는 일은 요리다.

요리를 조금도 하지 않는 남편을 만나 자연스레 나는 우리 집 요리 담당자, 남편은 설거지 담당자가 됐다. 사실 거창한 요리는 몇 번 선보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만들고 싶은 반찬류가 있으면 즉각 즉각 만들어둔다.

지난번에는 시장에서 사 온 청양고추 한봉다리가 썩을까 걱정되어,  밤 10시에 고추장아찌를 만들었다.

간장을 끓이고, 물과 식초, 설탕을 동량 넣어서 끓이다가, 한 김 식힌다.

잘게 잘라놓은 고추에 식은 간장을 부어 숙성시키면 끝이다. 여기에 양파까지 넣어두면 더 좋다. 나중에 삼겹살 함께 먹으리라 다짐한다.


이번에는 파김치다. 라면을 먹을 때도 김치를 먹지 않는 남편이 유일하게 먹는 김치가 파김치라고 했다.

유튜브를 검색하니, 이영자 표 파김치가 맛있단다. 손질한 쪽파를 꽃게 액젓에 절여두고, 양파, 생강, 배, 새우젓을 갈고, 고춧가루를 섞어서 버무리면 끝이다.

그런데 웬걸. 우리 집에는 아직 믹서기가 없다. 신혼에 아침마다 남편에게 과일도 좀 갈아주면 좋으련만. 그래서 강판에 양파를 간다. 생강도 함께 갈아준다. 배는 따로 구하지 못했으니, 갈아 만든 음료로 대체한다. 강판에 손이 긁히지 않으려 조심히, 천천히 간다. 갈다 보니 손에 매운내가 배긴다. 손에 음식 냄새가 배이는 것도 꽤 괜찮다.

회사에서는 주어진 작은 일, 수동적인 일만 하다가 내가 진짜 만들어보고 싶었던 걸 주도적으로 만드는 과정이 흥미롭기만 하다. 나름 능동적인 작업이다. 신선한 쪽파를 고르고, 쪽파의 뿌리를 일일이 잘라내고, 세척하고, 양념을 만들고.. 이러저러 맛을 보다 보면 벌써 1시간이 훌쩍 넘어가 있다. 고작 파김치 하나 만들었지만, 나의 파김치는 오늘 나의 노동이 꽤나 값지게 만든다.


하루 지난 파김치..


하지만 완성된 파김치 맛이 이상하다. 액젓 맛이 많이 나고, 어딘가 2% 빠진 느낌이다. 물도 많이 생겼다. 뭐가 잘못된 걸까. 남편에게 한입 먹어보라고 말하지도 못하겠다.

나: 그냥, 만들었어. 근데 좀 이상해.

남편: 좀 익도록 기다려 보자.


아침 일찍 일어나 파김치가 잘 된 건지, 맛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양파를 더 갈아 넣어야 할지, 밀가루 풀을 쒀서 넣어야 할지 하루종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하지만 남편의 말대로 뭔가를 더 넣지 않고 기다려 보기로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했던 나의 능동적인 자아는 잠시 접어두고, 시간에 맡긴다.

내 일도 그렇겠지. 뭐든 기다리다 보면 지금의 재미도 감동도 없는 시간이 그리울 때가 오겠지. 그리고 진짜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겠지.

몇 년 전에 쓴 브런치 글을 보니 그때도 자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더라. 100살까지 고민하려나 보다.

파김치가 잘 익으면 짜파게티랑 먹어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