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웬걸. 우리 집에는 아직 믹서기가 없다. 신혼에 아침마다 남편에게 과일도 좀 갈아주면 좋으련만. 그래서 강판에 양파를 간다. 생강도 함께 갈아준다.배는 따로 구하지 못했으니, 갈아 만든 배 음료로 대체한다. 강판에 손이 긁히지 않으려 조심히, 천천히 간다. 갈다 보니 손에 매운내가 배긴다. 손에 음식 냄새가 배이는 것도 꽤 괜찮다.
회사에서는 주어진 작은 일, 수동적인 일만 하다가 내가 진짜 만들어보고 싶었던 걸 주도적으로 만드는 과정이 흥미롭기만 하다. 나름 능동적인 작업이다. 신선한 쪽파를 고르고, 쪽파의 뿌리를 일일이 잘라내고, 세척하고, 양념을 만들고.. 이러저러 맛을 보다 보면 벌써 1시간이 훌쩍 넘어가 있다. 고작 파김치 하나 만들었지만, 나의 파김치는 오늘 나의 노동이 꽤나 값지게 만든다.
하루 지난 파김치..
하지만 완성된 파김치 맛이 이상하다. 액젓 맛이 많이 나고, 어딘가 2% 빠진 느낌이다. 물도 많이 생겼다. 뭐가 잘못된 걸까. 남편에게 한입 먹어보라고 말하지도 못하겠다.
나: 그냥, 만들었어. 근데 좀 이상해.
남편: 좀 익도록 기다려 보자.
아침 일찍 일어나 파김치가 잘 된 건지, 맛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양파를 더 갈아 넣어야 할지, 밀가루 풀을 쒀서 넣어야 할지 하루종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다. 하지만 남편의 말대로 뭔가를 더 넣지 않고 기다려 보기로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했던 나의 능동적인 자아는 잠시 접어두고, 시간에 맡긴다.
내 일도 그렇겠지. 뭐든 기다리다 보면 지금의 재미도 감동도 없는 시간이 그리울 때가 오겠지. 그리고 진짜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겠지.
몇 년 전에 쓴 브런치 글을 보니 그때도 자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더라. 100살까지 고민하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