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오랫동안 친구였다. 한 번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었는데, 이 친구가 자신의 음식에서 당근을 모조리 골라내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참 어린애 같으면서도 당근을 안 먹는 나와 취향이 비슷해서 신기했다. 나 역시 볶음밥이나 김밥에 들어간 익은 당근이 아닌 이상, 생당근은 모조리 골라낸다.
맛과 향이 좀 특이하달까. 어떨 때는 연필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신기하게도 결혼을 하고 집밥을 해 먹다 보니, 우리 집 냉장고에는 언제나 당근이 자리하고 있었다. 불고기를 할 때, 소시지를 볶아 먹을 때... 당근은 꽤 많은 곳에 들어갔고, 마트에 가면 당근을 하나씩 꼭 사 왔다. 하지만 남편도 나도 좋아하지 않으니 매번 그대로 버려지기 일쑤. 음식물 쓰레기에 쌓여 있는 주황빛깔 당근이 아깝고 불쌍하기만 했다.
사실 당근은 항산화 방지에, 면역력 강화, 고혈압 예방... 특히 눈 건강에도 좋단다. 남편도 나도 눈 건강에 진심이기에, 더는 당근을 외면할 수가 없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의 팀장님이 우스블랑이라는 샌드위치 가게를 추천해 준 적이 있다.
(우스블랑이란 북극곰을 의미한단다. 가게에 들어서면 곰 일러스트가 그려진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남편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바게트 샌드위치 안에는 당근이 수북하게 들어가 있었다. 맛이 괜찮을까.. 싶었지만, 한입 먹어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상하게 당근 맛이 나지 않는다. 당근 특유의 향도 없었고, 우리는 엄청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찾아보니 샌드위치에 들어간 당근은 생당근이 아닌, 당근라페란다. 연예인들이 이걸로 다이어트했다나. 추천 메뉴는 김밥에 다른 재료 없이 당근라페만 가득 넣어 먹거나, 혹은 빵에 크림치즈 혹은 그릭요거트를 바르고 당근라페를 얹어 먹는다. 나도 도전해 보자.
집에 김밥 싸다가 남은 당근이 있으니, 여기에 작은 당근 하나만 더 사 오면 괜찮을 거 같다. 마트에서 파는 990원 당근 하나를 집는다. 이밖에 필요한 게 올리브유, 홀그레인 머스터드, 레몬즙... 평소에 먹지 않는 재료들을 하나둘 담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기분이다.
당근을 채 썰어준다. 유튜브에서는 채칼을 쓰지만, 나는 칼로 썬다. 당근은 칼로 써는 맛이 있는 재료다. 서걱서걱 소리도 좋고, 일정한 크기로 자를 때마다 희열도 있다. 양파나 파처럼 눈이 맵지도 않기에 한도 끝도 없이 썰어 놓을 수 있겠다. 채 썬 당근은 소금에 10분 절여준다. 짤수록 맛있을 거라 생각하고 소금을 골고루 많이 넣어줬다. 앗 실수했다. 다시 보니 1/2 티스푼만 넣으란다. 너무 많이 넣어버렸다.
나와 남편은 둘 다 당근을 싫어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점도 많다. 남편과 가장 큰 차이점은 정석대로 사느냐 아니냐다. 한 예로, 운전할 때도 남편은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가고, 나는 감대로 간다. 어느 날, 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길을 따라가다가 남편이 이 길이 맞냐고 물었다. 나는 다른 앱으로 길을 한번 살펴보고 큰길로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결국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이 좁다 보니, 군데군데 세워진 킥보드나 오토바이와 닿을까, 조심스레 운전했다.
"이봐, 내비게이션 따라가면 안 된다니까. 큰길로 갔어야 했다니까."
나의 핀잔에도 남편은 내비게이션을 이해해 준다.
"여기가 제일 가까운 길이라서 그래. 내비가 맞아."
그래, 나도 같이 사는 사람을 따라서 정석대로 살아보기로 한다. 당근이 절여지기 전에 물에 헹구고 다시 소금을 1/2 티스푼을 넣는다. 그리고 10분. 10분이 지나자마자 당근에게 달려왔지만, 아직 다 안 절여졌다. 좀 더 기다린다. 그리고 절여진 당근의 물기를 꾹 짜준다.
양념도 유튜브에서 시키는 대로 만든다. 올리브유는 한 스푼, 홀그레인 머스터드는 반 스푼, 그리고 레몬즙 조금. 거기에 설탕 반 스푼. 이제 잘 섞어준다. 그리고 당근 한 줄기를 집어 맛을 본다.
이게 맞나. 홀그레인을 한 스푼 더 넣어보고, 레몬즙도 몇 방울 더 넣는다. 올리브유가 아무래도 적게 들어간 거 같다. 다시 올리브유도 반 스푼 넣는다.
역시, 정석대로 만들진 못했다. 차이점은 차이점대로 남겨둔다. 남편은 정석대로 사는 사람, 나는 정석대로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 각자 편한 방식대로 살면 되지. 그걸 서로 잘 수용해 주면 되지.
이것저것 막 섞어 넣다 보니 애초에 당근라페라는 게 어떤 맛인지 기억이 안 난다.그냥 내가 만든 당근라페를 기준 삼기로 하자. 우리집 한정 최초의 당근라페 탄생이다.
퇴근하고 토스트를 만들어 당근라페와 먹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우스블랑에서만큼은 아니겠지만, 당근을 많이, 그것도 잘 먹는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면 뿌듯하다.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는 게 아닌, 먹고 싶지 않은 것도 건강을 위해 잘 챙겨 먹는 성숙한 어른이 된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