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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금 Aug 07. 2024

대파, 전쟁의 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크게 싸운 적이 있다.

어느 주말 저녁, 밥을 먹을 때였다. 우리의 싸움은 사소한 말 한마디로 시작했을 거다. 말투, 대화 방식 뭐 그런 류였겠지. 동갑에다가 워낙 오랫동안 친구였기에, 사소하게 투닥거린 건 일상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렇게 크게 싸운 건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였는데, 왠지 모르겠지만 그때만큼은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큰소리를 냈다. 내가 이겨야만 했다.

어라, 평소에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먼저 사과하는 사람인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나는 속상한 마음에 밥 다 먹었으면 저리 가라고, 얼굴 보고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모진 말을 내뱉고는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 담당자인 남편이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지만, 고무장갑을 내어주지 않았다. 남편의 역할을 뺏어버렸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거에 속상해할 사람이라, 이렇게라도 벌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노의 설거지를 다 마치자마자 싱크대 위에 올려진 낮에 사 온 대파 한단이 보였다. 우리 집에는 밥 먹는 사람이 단 둘밖에 없으니 대파를 이대로 두면 다 먹지 못한 채 썩어버릴 게 분명했기에.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손질을 시작한다.

반 정도는 찌개나 국에 넣을 대파를 잘게 썰어 냉동실에 얼리기로 한다. 파를 썰고 또 썬다. 매워서 눈에 눈물이 맺힌다. 서러워서, 져서 우는 게 아니다. 매워서 우는 거다. 이 전쟁에서 꼭 승리할 거라 다짐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할 말을 곱씹어 본다. 송, 송, 송. 아무리 썰어도 파가 끝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파 써는 소리가 빨라지진 않는다. 열심히 썰다 보니 벌써 지퍼백 두 봉지나 나왔다. 한 봉지는 어슷하게, 한 봉지는 둥글게.

반은 얼리지 않고 바로 쓸 수 있도록 냉장 보관하기로 한다. 냉장 보관할 때는 파를 세워서 보관해야 한다. 세울 수 있는 긴 통을 고르고, 길이에 맞춰 대파를 잘라 넣는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바닥에 키친타월을 깔아주면 신선도를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파 한 단을 모두 손질하고, 싱크대의 껍질들을 정리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마지막으로 흙이 묻은 싱크대까지 행주로 깨끗하게 닦아내면 끝이다. 처음 파를 썰 때의 전쟁 같은 마음이 사그라진다. 승리를 쟁취해야겠다는 욕심도 누그러뜨릴 여유가 생긴다.


벌써 3주가 지났지만, 냉장 보관한 대파는 아직도 건재하다. 대파 끝의 색이 살짝 바랬지만, 먹는 데 문제없다. 오늘은 이 분노의 기억을 간직한 대파로 대파라면을 끓여 먹기로 한다. 손가락 크기로 얇게 썬 대파를 기름에 볶아준다. (나는 신라면 건면을 먹기로 했는데, 여기에 함께 들어 있는 조미기름으로 대파를 볶았다.)

어느 정도 대파가 익으면 가루 수프와 건더기 수프를 넣고 좀 더 볶아준다. 그러다가 물을 적당량 넣어준다. 팔팔 끓으면 그때 면을 넣는다. 면이 끓어가면서 물이 더 적어진다. 조림이 될 지경이라 생수를 더 넣는다. 그래도 물이 적다. 많이 짜 보이니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팽이버섯도 조금 가미해 준다.


전쟁이 있었던 날, 나는 대파를 다 정리한 다음, 방에 들어가 잠에 들었다. 싸우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고 싶진 않았다. 부스럭부스럭.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 나가보니 남편이 집정리를 하고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갈피를 잃은 물건들의 자리를 찾아주는 듯보였다. 미처 나눠주지 못해 남은 청첩장들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나온 각종 서류들을 파기했다. 그리고 결혼 액자 앞에 신혼여행을 갔던 리조트에서 찍어준 허니문 사진이 세워져 있었다.

싸운 와중에도 둘이 먹을 요리 재료를 손질하는 나나, 싸운 와중에도 신혼여행 사진 전시하는 너나... 똑같은 사람들이다.


물이 너무 없다.. 짜다..


이제 각자가 아닌 두 사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개인이 아닌, 매 순간 소통하고 매 순간을 공유하는 관계 그 자체로의 삶을 살아간다. 순간의 감정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지 않길, 이 싸움이 또 다른 싸움의 지름길이 되지 않길, 이기고 지는 것보다 서로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남편이 야근으로 늦는 탓에 혼자 대파 라면을 먹는다. 남편은 매운 걸 못 먹으니 대파라면을 야식으로  못하겠다. 짠 라면 면발과 부드러워진 대파를 함께 흡입하며 어떤 걸 만들어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나저나 더울 때일수록 매운 음식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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