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경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경주에 가면교리 김밥을 먹어야 한다는 친구의 말에 김밥을 먹으러 갔다. 숙소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김밥집이 위치해 있었지만,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 굳이굳이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교리김밥은 계란이 가득 들어간 김밥이었는데, 참, 짜고 부드럽고 맛있는 맛이었다. 멀리서 온 보람이 있었다. 아니다. 멀리서 힘들게 와서 맛있었던 건가.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김밥을 좋아했다.
특히 김과 밥은 만나면 서로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강한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것만 같다.
요즘에는 K-푸드로 외국에서 그렇게 인기가 좋아한다던데. 이 맛있는 걸 이제야 알았다니.
이십 대 중반, 다이어트를 결심했고, 그때부터 김밥을 멀리했다. 김밥이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한 끼지만, 사실 다이어트에는 쥐약이다. 밥에 간이 되는 건 물론, 재료들 하나하나가 기름에 볶였기에 칼로리가 높을 수밖에. 그러던 중, 다이어트 김밥이라는 게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시도해 봤다.다이어트 김밥의 킥은 밥이 없는 거다.
난 밥 대신 두부를 넣었다. 두부에는 수분기가 많으니 꽉 짜주고, 기름을 두르지 않은 팬에 약불로 살살 볶아낸다. 고슬고슬해진 두부를 김에 밥 대신 깔아준다. 그리고 부친 계란과 단무지, 샐러드를 양껏 넣어 싸준다. 그럼 두부김밥 완성이다. 간이 센 재료라곤 단무지밖에 없는데, 왜 이리 맛있는지. 몇 줄이나 더 싸 먹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기분이었다. 두부 대신 삶은 양배추를 넣어도 맛있다. 삶은 양배추의 부드러운 식감이 김과 잘 어울린다. 계란 대신 닭가슴살이나 닭가슴살 핫바를 넣어도 좋다. 다이어트 김밥에는 정답이 없지만, 맛있는 다이어트를 찾는 이에게는 김밥이 정답이다. 김밥은 실패란 없는 음식이다.
결혼하기 일주일 전, 오랜만에 김밥 다이어트의 기억을 다시 꺼내게 됐다. 배고파배고파를 외치던 예비신랑, 지금의 남편과 다이어트 김밥을 해 먹었다. 김에 양배추와 당근, 계란, 단무지만 넣어 돌돌 말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살이 찔까, 부기가 오를까 두려워 꼬마김밥으로 작게 만들어 먹었다.
조금만 참자.
우리는 토끼처럼 꼬마김밥을 조금씩 나눠 먹으며, 식이 얼마 안 남았다고 서로를 다독였다.
본식이 무사히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이어트 김밥을 만들려고 사다 놓은 김밥김이 찬장에서 눅눅해지고 있을 때쯤, 다시 김밥을 싸기로 한다. 이번에는 밥도, 기름에 들들 볶은 재료도 듬뿍 넣고, 참기름도 듬뿍 발라야겠다고 다짐한다.
큰 라면 그릇에 밥을 가득 담는다. 참기름, 맛소금으로 간을 하고,당근을 볶는다. 당근이 기름과 만나면 달짝지근해진다. 달달한 맛을 상상하며 당근을 볶는다. 주황빛을 띠는 당근 기름에 계란을 풀어 부치고, 불맛난다는 햄도 굽는다. 재료 준비가 끝나면 김에 밥을 깐다.
어라? 근데 꼴랑 김밥 한 줄에 밥이 왜 이리 많이 들어가는 거지...
밥을 조금만 덜어내기로 한다. 그리고 얇게 깔아준다. 그런데 이게 밥이 들어간 건지 김에 밥이 묻은 건지 뭔지 모르겠다. 일단 말아보자..
평소 김밥천국이나 바르다김선생에서 먹었던 크기의 김밥이 아니다. 그냥 작은 김밥이다. 본식 전에 먹었던 그 꼬마김밥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다이어트 김밥도 아니다. 그리고 분명 10줄을 싸려고 했는데, 겨우 4줄밖에 못 말았다. 난 손이 왜 이렇게 작은 거지... 아 맞다. 위에 참기름을 바르는 걸 까먹었다. 썰어둔 김밥에 조금씩 바른다. 고소한 내와 함께 김밥에 생기가 돈다. 맛있다. 역시 김밥은 실패가 없다.
남편이 퇴근하고 오면 먹여야겠다.
이제 우린 양배추와 당근으로 맛을 낸 다이어트 김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부부라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이제 토끼가 아닌 곰이 된 남편을토닥토닥해 줘야겠다.
(하지만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치킨을 찾았다. 김밥은 보상심리를 자극할 만한 음식은 안 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