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하나 둘 셋, 하면 눈을 뜹니다. 하나, 둘, 셋.”
눈을 떴을 때 태경은 울고 있었다. 수 초가 지난 후에야 자각했다. 태경은 느릿느릿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고,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무거운 가슴을 몇 번 문질렀다. 연재가 옆에서 태경을 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눈. 태경은 불쾌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 눈을 그녀의 직업적 태도로 납득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뭘 봤는지 설명할 수 있어요?”
연재가 물었다. 태경은 아직 소파에 반쯤 누워있었고, 연재를 올려다봐야만 했다. 태경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연재가 한 걸음 물러섰다.
“…….”
태경은 미처 닦지 못한 눈물이 있을까 볼과 턱을 쓸었다. 할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벽장. 엄마 냄새가 나던 담요. 분홍색 손톱. 아이처럼 울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태경의 눈이 질끈 감겼다. 감은 눈두덩 위로 연재의 시선이 느껴졌다. 태경은 읊조렸다.
“벽장 안에 있었어요.”
“벽장이요?”
“어릴 때 살던 집 안방에 벽장이 하나 있었어요. 정확히 언젠지 모르겠는데, 부모님이 이혼한 날인 것 같아요. 어린 제가 벽장 안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자주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앞에 나타나요. 그리고 울어요. 아이처럼. 떼쓰는 것처럼.”
“그때 태경 씨는 어떤 생각을 했나요?”
태경이 눈을 떴다. 연재가 잔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숨이 너무 막혔어요. 벽장 안이 너무 답답하고, 숨쉬기가 힘들고.”
태경은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긴 숨을 들이마셨다. 생각들이 어지럽게 머릿속에 떠다녔다. 말로 정리하기 어려웠다. 답답하다. 숨쉬기가 힘들다. 아이처럼 울던 은숙의 옹송그린 등이 흐릿하게 겹쳐보였다. 이제까지 엄마가 그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작고 마른 등이었다. 손톱 끝이 저릿하게 아리던 감각. 그때 태경 자신은 뭘 하고 싶었나.
연재가 탄식 같은 한숨을 흘리더니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녀는 내내 침착했다. 노트에 볼펜 끝을 콕 찍은 연재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그 기억과 잠자리가 변한 게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잠자리요?”
“벽장 안이 무척 답답하고 숨쉬기가 힘들다고 했죠? 지금 바뀐 잠자리가 그 느낌을 상기시켰을 수도 있어요. 침실에 원래 창문이 있었는데 없어졌다거나, 침실이 이전에 비해 많이 좁아졌다거나. 태경 씨의 의식이 그 기억을 불러냈잖아요. 관련이 있는 거예요. 제가 보기엔 압박감의 문제일 것 같은데. 물리적으로요.”
압박감. 태경은 목을 조르듯 덮쳐오던 벽장 안의 공기를 떠올렸다. 순간 머릿속이 번쩍였다.
“아.”
“뭔지 알겠어요?”
“자는 위치가 바뀌긴 했는데.”
“위치요?”
“이사 오기 전엔 침대를 방 가운데에 뒀었어요. 이사 오면서 침실이 좁아져서 침대를 벽에 붙이게 됐고요.”
“태경 씨는 침대 어느 쪽에서 주무세요?”
“안쪽에서요.”
침실을 정하면서 성주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일이 생생했다. 침대를 어떻게 하지. 벽에 붙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침실이 좁아져서 아쉽다. 아쉬워하던 성주의 얼굴도 생생했다. 어디에서 잘지 위치를 결정한 건 성주였다. 프리랜서인 태경에 비해 직장에 다니는 성주가 일찍 일어나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태경은 잠귀가 예민했다.
연재가 물었다.
“혹시 벽을 보고 주무시나요?”
태경은 기억을 되짚었다. 확실히 성주에게서 등을 돌리고 잔 날이 많았다. 습관이었다.
“네. 그랬네요.”
뭔가 부지런히 쓰던 연재의 손이 멈췄다. 연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이 태경을 보았다. 건너다보는 눈. 그것 보라고 말하는 눈이었다. 태경은 난데없이 빚을 떠안은 기분이었다.
연재는 최면치료가 잘된 게 아니라고 했다. 원인을 발견하고 인지하는 건 목적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라는 말이 덧붙었다.
원래 한 번에 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댁에 돌아가시면 잠자리부터 바꿔보시고, 다음 이 시간에 또 오세요.
태경은 알겠다고 했다.
성주는 최면치료 결과를 듣자마자 자는 위치를 바꾸었다. 태경은 이사 온 뒤 처음으로 옆이 트인 침대 모서리 쪽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성주가 쌕쌕 내쉬는 숨이 뺨에 닿았다. 성주는 태경 쪽을 보고 누워 있었다.
무늬라도 헤아려보자 눈을 돌린 천장에는 작고 마른 등이 보였다. 이때껏 알지 못한 낯선 등. 그건 정말 엄마였을까. 태경은 머릿속이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네가 단단해서 좋아. 나 태경이 너 좋아해. 친구로 말고.
먼저 반했던 건 태경이지만 고백은 성주가 먼저 했다. 태경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덤덤하게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하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여느 드라마나 소설의 광경처럼 죽을 듯이 힘들어하지도, 방황하지도 않았다. 모든 게 당연한 일 같았다. 앞으로 아무에게나 애인이라며 사진을 보여주기는 어렵겠지. 결혼하고 애를 낳는 일이 내 삶에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 정도의 생각.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걱정보다는 감격이 앞서서 그랬다. 그때의 성주는 폭탄발언을 해놓고 헤, 바보같이 웃었다. 얼마나 해맑게 웃었는지 광대가 툭 불거졌다. 태경은 그 광대가 발그레하게 물드는 걸 말없이 보고 있었다. 재난은 발그레한 색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다행이었다. 휩쓸린다 해도 마냥 어둡지는 않을 테니.
어느 순간, 암전된다. 태경은 사방이 막힌 곳에서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희끄무레한 물체가 보였다. 썩어 물러진 과육을 닮은 무언가. 눈을 깜빡이던 태경은 이내 그게 등이라는 걸 깨닫는다. 무르게 무너진 등이 속삭였다.
네가 훨 낫지. 뚝뚝하니 믿음직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