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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혜경 Apr 02. 2023

벽장

8화

    태경은 일어나자마자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성주는 눈썹을 그리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화장대 거울을 사이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여행? 혼자?”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태경은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신경질적으로 그래, 툭 내뱉자 침묵이 흘렀다. 성주는 뭔가 감지한 듯 펜슬라이너를 내려놓더니 몸을 완전히 돌려 태경을 보고 앉았다.


    “왜?”


    목소리가 차분했다. 평소엔 좀체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냥.”

    “태경아.”


    성주가 손을 뻗었고, 태경은 뒤로 물러났다. 성주는 허공에 남겨진 손을 보다가 핏 웃었다.


    “너 지금 되게 어린애처럼 구는 거 알지?”


    태경이 욱해서 뭔가 말하려 했지만 성주는 이미 등을 돌린 채였다. 아무렇지 않게 눈썹을 마저 그린 성주가 말했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신경전을 벌이는 걸까. 성주의 얼굴을 가늠하던 태경은 허탈해졌다. 성주의 얼굴이 너무도 평온해서였다. 그리고 그 얼굴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태경은 성주가 출근한 뒤 빚쟁이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기차표를 끊었다. 목적지는 부산. 태경이 나고 자란 곳이었다. 태경은 아무 생각 없이 기차에 몸을 실었다. 뭘 보고 싶다거나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부산은 정말이지 너무 멀었다. 태경이 빈손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책도, 음악을 들을 이어폰도 없었다.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나자 태경은 자신의 머릿속을 뒤덮은 생각들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엉덩이는 아프고 허리는 찌뿌둥했다.


    마침내 부산에 도착했을 땐 어디든 그저 걷고 싶었다. 태경은 진부한 관광객처럼 해운대로 가는 버스를 탔다. 창가로 햇볕이 쏟아졌다. 버스에선 라디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부모님과 나라는 주제로 사연을 받아봤습니다. 유독 어머니에 관한 사연이 많네요. 마지막 사연을 들으니 명언이 하나 생각나는데요.’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가 햇볕보다 따사로웠다. 태경의 눈이 슬슬 감겼다.


    ‘가장 유명한 명언일 거예요.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죠.’


    가물가물 시야가 흐려졌다.    

 



    해운대는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특히 남녀 커플 여럿이 눈에 띄었다. 저도 모르게 그들을 보던 태경은 지금이 대학교 겨울방학 시즌인 걸 상기했다. 늦봄의 바닷바람은 찼다. 그래서 개운했다. 태경은 모래사장을 하릴없이 걸으면서 커플들을 구경했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였다. 꺄르르, 꺄르르, 웃는 소리. 철썩, 철썩. 파도 소리. 남자친구의 등을 퍽퍽 내리치는 젊은 여자. 태경은 어쩔 수 없이 성주를 생각했다.     


    네가 단단해서 좋아. 나 태경이 너 좋아해. 친구로 말고.     


    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태경이 방황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 현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성주도 그랬을까. 태경은 그걸 궁금해한 적도, 물어본 적도 없었다.     


    문득 성주가 보고 싶었다. 엉덩이를 혹사시켜 여기까지 와버렸는데. 억울해졌다. 태경은 벤치에 앉았다. 일부러 엉덩이를 벤치 끝까지 바짝 붙였다. 모래사장 위 젊은 연인들, 기꺼이 배경이 된 바다. 수면이 아무렇게나 반짝였다. 


    “그래서 네가 좋아.”


    언제였지, 성주가 이 말을 한 게.


    이사 오기 전에 있던 일이다. 성주가 집에서 안경을 잃어버렸다. 집인 건 확실했다. 씻기 위해 벗어두었다가 잃어버렸으니까. 성주는 그 안경을 한 달간 찾았다. 소파를 뒤엎고, 침대 아래를 샅샅이 훑었다. 그쯤이면 나올 만도 했는데 안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성주는 나 바보인가 봐, 징징거렸다. 결국 한 달 후 성주가 백기를 들었다. 성주는 그날 퇴근길에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안경을 새로 사 왔다. 금요일이었다. 둘은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기 위해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았다. 태경과 성주의 집엔 텔레비전이 없었다. 성주가 뭐가 불편한지 엉덩이를 들썩이다 어, 잠깐만, 하더니 허리 뒤에 받혀있던 의자 쿠션을 들었다. 그 사이로 툭, 안경이 떨어졌다. 성주가 쓰고 있는 것과 똑같은, 한 달 전 감쪽같이 사라졌던 그 안경이었다. 성주가 으앙, 이게 뭐야, 짐짓 아이처럼 비명을 질렀다. 자책이 뒤를 이었다. 이거 도수 다 맞춘 건데 환불해달라면 해줄까? 아, 나 너무 멍청하다. 돈 아까워. 진짜 바보인가 봐. 가만히 듣고 있던 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주의 손에 있던 안경을 집었다. 그리고 덤덤히 의자 쿠션 사이에 다시 끼워 넣었다. 쿠션을 몇 번 만지자 안경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모습을 감췄다. 태경이 성주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성주는 멍한 얼굴로 태경을 보다가 이윽고 웃음을 터뜨렸다. 눈매가 와락 접혀 동공을 아예 가려버리는 웃는 눈. 발그레한 볼.


    그래서 네가 좋아, 태경아.


    나는 뭐라 대답했을까. 나도 그래서 네가 좋다고 말했을까.


    태경은 어쩔 수 없이 한숨 쉬었다가, 웃다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 엉덩이가 얼얼할 정도로 오래 앉아 있어야 했다.


    해가 저무는 시간, 문을 열자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성주가 현관에 서 있었다. 태경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성주가 다가와 태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잘 다녀왔어?”


    얽혀오는 온기가 당연하게도 따듯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주를 안았다. 너른 품이었다. 성주의 품은 생각보다 무척 어른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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