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한 방에 앉아 귤 까먹는 그 새콤달콤한 맛은 겨울의 행복 중 하나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턴가 겨울에 차가운 귤을 까먹는 것이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더 이상 귤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추운 겨울에 오히려 달콤한 즙이 줄줄 흐르는 복숭아 생각이 많이 난다. 어릴 때 외가인 청도에 가면 나 실컷 먹으라고 외할머니가 다라이(큰 고무 그릇) 가득 따서 담아두던 복숭아맛은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 복숭아 통조림을 먹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 적도 있다. 복숭아와 외할머니 생각을 하다가 떠올린 그림책이 있어 소개해 본다.
『린 할머니의 복숭아나무』는 표지의 색감과 그림이 눈길을 끄는 그림책이다. 하늘마저 분홍빛인 배경에 분홍색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큰 나무 한 그루가 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할머니의 머리카락과 치마도 분홍색이다. 온통 분홍색으로 채색되어 있어 표지를 보고 선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이야기는 린 할머니네 집 앞 복숭아나무에 꽃이 활짝 핀 내용으로 시작된다. 린 할머니네 집 앞 복숭아나무에는 꽃이 활짝 피어 있다. 만개한 꽃들만큼 복숭아 열매도 탐스럽게 많이 열렸다. 쪼르르 달려온 귀여운 아기다람쥐가 할머니에게 복숭아 하나만 달라고 부탁하자 할머니는 흔쾌히 복숭아를 내어준다. 복숭아를 맛있게 먹은 아기다람쥐가 씨앗을 땅에 묻었다.
뒤이어 염소 세 마리가 찾아와 느긋하게 복숭아를 먹고 시냇가 근처에 똥을 누었다. 여기까지만 읽었는데 슬슬 뒷부분의 진행 과정이 예상되었다. 아마도 줄줄이 다른 동물들이 찾아올 것이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씨앗이 묻히겠지. 너무 뻔하게 뒷부분이 짐작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 다소 김이 샜다.
복숭아는 중국이 원산지인 과일이다. 중국인들은 이상적인 마을에는 꼭 복숭아나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도원결의도 그렇고, 무릉도원도 그렇고, 복숭아는 하늘과 연결되는 특별하고 신비한 과일이며 장수와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이완 출신인 작가가 복숭아를 선택한 이유도 아마 이런 맥락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복숭아는 누구나 먹고 싶을 만큼 달콤한 향과 과육이 일품인 과일이다. 작가는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복숭아를 많은 이들이 나누어 먹고,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성하고 큰 행복으로 돌아온다는 분명하고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이야기다.
이 그림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분홍색을 주요 색깔로 썼다는 것이다. 실제 복숭아는 품종에 따라 희고 노랗고 약간 주홍빛이고 붉은 빛깔도 띠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복숭아를 그릴 때 분홍으로 칠한다. 관습적으로 그래온 것이긴 하지만 할머니의 머리카락과 치마, 집의 지붕, 커텐, 출입문, 물뿌리개, 뒷산, 그리고 하늘마저도 분홍색으로 칠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 생각하다가 분홍만큼 사랑을 잘 나타내는 색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분홍 복숭아와 사랑 넘치는 할머니의 마음! 그러니 분홍은 옳다.
꽃이 피고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린 장면에서 전체적인 분홍색 배경은 절정을 이룬다. 그러다가 하나둘 나눠주면서 나무에서 복숭아가 줄어들고 결국 하나만 남게 되자 분홍빛은 사라지고 배경은 온통 흑백이 되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어두운 분위기가 된다. 화사하고 풍요롭고 사랑이 넘치는 느낌이었던 분홍색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어 강렬하게 느껴진다.
남들에게 다 나눠주고 겨우 하나 남은 복숭아를 할머니가 따려고 할 때 거북이 가족들이 할머니네 집 앞에 도착했다. 느린 걸음으로 힘들게 왔지만 드디어 맛있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리라. 겨우 도착했는데 할머니가 하나 남은 복숭아를 따 버리는 걸 보고 너무나 실망한 어린 거북이 한 마리가 드러누워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복숭아를 들고 집으로 향하는 할머니의 표정은 장난스러워 보여서 물음표가 생긴다. 왜 그러시는 거지?
그 많던 복숭아를 다 나눠 주느라 할머니는 아직 제대로 한 입 먹어보지도 못했으니 이제 하나 남은 귀한 복숭아를 드실 때가 되었다. 그런데 거북이 가족이 나타나 복숭아를 먹고 싶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해 보게 되는 장면이었다. 이 그림책을 아이들과 읽는다면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면 좋을지 이야기 나눠보면 재미있겠다. 그림책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함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같은 책, 같은 장면을 보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것.
집으로 들어갔던 할머니는 파이를 만들어서 가지고 나왔다. 복숭아를 7조각으로 잘라 토핑으로 올린 파이를 보고 안도감과 감탄이 동시에 밀려왔다. 6마리의 거북이 가족과 할머니까지 모두 한 조각씩 먹을 수 있도록 지혜롭게 만든 복숭아 케이크는 아마도 천상의 맛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시간은 흘러가고 때로는 맑고 때로는 비가 오는 날이 이어진다. 복숭아나무와 할머니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시라.
동물들이 먹고 여기저기 뿌려놓았던 복숭아 씨앗은 싹을 틔우고 나무로 자란다. 그러는 동안 할머니 집에는 어느새 손녀가 생겼는지 창으로 다정한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시간은 또 흐르고 흘러 할머니 집 주변 언덕이 온통 복숭아나무로 울창해져 여기가 무릉동원인가 싶다.
한 그루였던 복숭아나무는 이제 셀 수 없이 많아져 복숭아나무 숲을 이루었다. 할머니의 너그러운 마음이 퍼져나가 주변을 분홍빛 복숭아 천국으로 물들인 것이다. 천상의 낙원, 무릉도원은 하늘에 있지 않고 마을에 생기게 되었다. 나눔에 대한 주제가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라 식상할 것 같지만 점점 삭막해지고 개인화되어 가는 우리 사회에 나눔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게 해주는 이런 그림책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