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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훈실 Sep 04. 2023

그날의 반야용선

싸목싸목 여행기

      

봄빛이 사방에 가득했다. 새들의 지저귐과 만물의 사귐이 다르지 않았다. 서로 정답고 맑고 순진했다. 

시인들이 창녕 관룡사에 모여 들었다. 눈록과 유록을 지나 신록에 파묻힌 절집은 그대로 피안의 세계였다. 우리는 조금은 높고 쓸쓸한 족속이 됐다. 일행을 기다리며 절집 곳곳을 기웃거렸다.      


근육질의 기암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구룡산은 관룡사 창건 설화와 관련이 깊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오색채운이 영롱한 가운데 벼락 치는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놀라서 원효대사가 하늘을 쳐다보니 화왕산 정상의 월영 삼지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래서 절 이름을 관룡사라 지었고, 절의 뒷산 이름을 구룡산 또는 관룡산으로 지었다고 한다. 옛사람들의 상상력은 오늘날과 견주어도 남루하지 않다. 돌올하고 흔흔하다.      


대웅전을 기웃거리다 부처님을 떠받친 수미단을 살폈다. 거기에 조각된 개구리 자라 다람쥐 백로 비천상들이 황홀했다. 설교단이 가려 다 볼 순 없었지만 해학적이고 향토색 짙은 조각들이 관룡사 부처님마저 동심으로 이끄는 것 같았다. 천심이 곧 동심이라 했으니 3백년 전 목수는 이미 그 사실을 간파하고 조각도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시인들은 각자의 세계로 빠져든 듯 말이 없다. 같은 곳을 보아도 마음에 이는 상은 천차만별인 것처럼 때로는 끄덕이고 때로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런 침묵이 싫지 않다.


인생이 제자리 걸음인 이유는 썩은 뿌리는 염두하지 않고 그때그때 시든 잎사귀만 떼어내기 때문이란다. 나를 돌아본다. 부처는 작게 웃고 새 잎은 잎에 포개진다.


 누군가 후다닥 달려온다. 일주문 옆에 서 있는 벚나무가 일 년에 두 번 꽃을 피운다고 살뜰하게 설명하는 보살. 신기해서 나무를 한참 쳐다보았다. 춘추벚이다.  시든 잎사귀뿐만 아니라 썩은 뿌리도 갈무리 했기에  빛나는 춘추벚이 되었으리라. 가을에 와서 꼭 벚꽃 핀 황홀을 맛보고 싶다.      


같이 때로는 홀로

우리는 상대가 존재하는 풍경을 안아주었다. 

‘풀 한 포기 뽑았을 뿐인데 지구가 한편으로 기우뚱하다’는 싯구처럼.

공기를 꽉 물고 있는 빨래집게를 완상하듯, 이윽고 닳아 없어지는 석감을 바라보듯 우리는 각자 느끼고 물들어 간다. 모든 존재가 집합이면서 개체이듯.    

 

관룡사 꽃밭을 지나 용선대로 향했다. 용선은 반야용선(般若龍船)’에서 유래된 용어다반야용선은 사람이 죽어서 저 세상으로 갈 때 타고 가던 배를 말한다.

사바세계에서 피안(彼 岸)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간다는 상상의 배.

우리는 살아서 피안을 건너는 배에 오른다



20여분을 올라오니 온화한 미소의 여래가 우뚝 솟은 바위를 용선 삼아 앉아 있다답답한 석실이나 전각이 아닌 확 트인 산 정상에 앉은 부처는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우뚝 솟은 머리 위 육계가 봄바람에 실룩거릴 것만 같았다소라모양 머리칼은 창녕 들판으로 둥글게 둥글게 흩날린다하여둥근 양파의 밑동이라도 되는 양 싶다  


   

시인의 재산은 상상력이 전부다마음껏 각자의 상상력을 발동해 석조여래를 감상했다온화한 인상의 여래는 광휘를 드러내는 광배도 없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앞에서 보면 근엄한 여래지만 반전이 있었다바로 뒤태였다신생아처럼 둥그스름하고 납작해 귀여움마저 묻어나는 뒷모습그래서 간절히 삼배를 올린 시인들은 여래상의 뒷모습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생의 소멸과 신생의 법칙은 이렇듯 천진하고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반야용선의 후미에 빙 둘러앉았다용선대 뒤편의 기울기가 심한 너럭바위였다아래는 천길 낭떠러지담력 테스트가 자연스레 벌어졌다누군가는 무서워 한 걸음도 못 뗀채 껌딱지처럼 앉아 있고 누군가는 낭떠러지 근처에 천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삶과 죽음이 따로 있지 않다는 불이不二가 현현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순간이 전부가 아닐까.  그 순간과 순간의 스파크 속에서 우리는 크게 웃고 먹었으며 행복했다. 돌아앉은 돌부처도 궁금해 고개를 돌리고 싶었으리라.       


사랑이여 쓸쓸한 세월이여

내세에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     


이 싯귀를  빗대어 읊조리며  용선대를 내려왔다.     


내세에는 관룡사 용선대 끝에서 만나자

인연의 얼룩에  한눈 팔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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