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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Nov 11. 2023

불꽃놀이

평소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편두통과 동고동락하면서 기억력이 더 좋아졌다. 매월 몇 개의 약을 먹었는지 기록하고 있어서일까. 그래서 그런지, 그냥 이런저런 모양으로 앉아서 멍때리다 보면 '그날은 그랬지. 머리가 무척 아팠고,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았고... 그래서 이랬고 저랬지.'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우습게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날은 모두 편두통을 앓았던 날이다.


그러니까 그날도 그랬다. 22살 때 동네 내과에서 편두통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미국에서 썸머스쿨(같은 짧은 교환학생이었다.)을 보낸 건 편두통 진단을 받기 전이었다. 그래서 당시 나는 머리가 아프면 타이레놀 같은 약한 진통제를 주로 먹었고, 지금처럼 머리가 언제 아플지 몰라 전전긍긍하지는 않았다. 내 좌우명은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Fear always Springs from Ignorance."인데, 당시에는 '무식하면 용감하다.', '무식한 게 편하다.'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무지가 편했었다. 나는 모르니까, 머리가 이럴 때 아프고, 아프면 어떤 약을 먹고, 이런 정보가 없으니까 오히려 두려움이 없던 시절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시 나와 기숙사에서 같이 지낸 사람은 한 살 위인, 같은 대학, 그것도 같은 과였던 언니였다. (같은 과인데도 사실 만날 일이 없어서 미국에서 처음 봤다.) 내가 있던 곳은 인디애나였는데, 분명 미국에 도착한 1주일 정도는 40도를 웃도는 여름이었고, 그래서 언니와 나는 월마트에서 조립식 선풍기를 사서 열심히 꿰맞췄는데, 몇 주 지나고 나니 갑자기 10도 안팎의 겨울이 됐다.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인지 어느 날 수업에 참석할 수 없을 정도의 두통이 찾아왔다. 대학 내, 카페테리아에 가지 않는 이상, 방 안엔 먹을거리가 없어서 빈속에 감기약(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머리가 아프면 감기약을 먹었다.)을 먹고, 점심에는 바나나를 먹고 약을 먹었다. 그리고 땀을 쫙 빼고 오후쯤 일어나, 언니와 몇몇 학생들과 대학 호숫가에 앉아 육개장을 먹었다. 그 육개장이 정말 얼마나 맛있던지, 아직도 그 맛이 기억난다.


독립기념일 때였다. 언니와, 그리고 같이 수업을 듣던 몇몇과 함께 시카고로 놀러 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머리가 정말 너무너무 아팠고, 더운 시카고의 열기와 하루종일 걸어다닌 일정 때문인지 더 이상 걷기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그냥 두통도 아닌 오심을 동반한 두통이라, 당장 숙소에 가서 눕지 않으면 안 됐었다. 동료들에겐 너무 미안했고, 특히 나는 낯선 곳에 가면 매우 의존적인 성격이 되는 바람에 언니에게 사정해서 같이 잠시 숙소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아뿔사, 그런데 독립기념일 아닌가. 미국의 독립기념일. 모두가 나와서 즐기는 그날. 시카고 거리에 인파가 너무나도 많았다. 


속은 뒤집어지고, 머리는 쿵쾅거리고, 체면이건 뭐건 바닥에 그대로 눕고 싶었다. 하지만 낯설고도 두려운 미국이었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무서웠다. 게다가 언니와 나는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완전히 잃었고, 말 그대로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먼 이국땅에서 같은 민족을 알아보는 촉이라도 발달했는지 무수히 많은 인파 중, 한 커플이 보였다. 동양인이었다. 일본인일 수도 있고, 중국인일 수도 있고, 홍콩인일 수도 있고, 모르겠다. 무작정 인파를 헤치고 다가가 말했다. "저기, 00호텔을 가야 하는데 길을 잃었어요. 알려주세요." (한국인 맞았다.)


타이레놀 두 알을 먹고 내 정강이보다 높은 미국식 침대에 기어올라 몸을 뉘었다. 늘 그렇듯, 머리가 아픈 쪽으로 지압하듯이 누웠다. 언니는 호텔 갓등 하나 킨 채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내 곁에 있어 줬다. 고마운 언니. 그리고 잠들기 전에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여행을 와서요. 더 아프면 안 될 것 같아요. 이 약만으로 제발 두통을 잠재워 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이불을 꼭 쓰고 억지로 잠을 잤다. 땀을 쭉 뺐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고 일어나니, 머릿속 폭탄은 잠잠해 있었고, 밖은 해가 지고 있었다.


"언니, 우리도 나가보자." 언니와 호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름치고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시카고 호수 때문인지 약간 비릿한 냄새도 났다. 머리 위로 펑펑 폭죽이 터졌다. 생각해 보면 별것도 없는 폭죽인데, 초록, 빨강, 주황, 폭죽의 색이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왜 이리 기억에 남는지. 바람에 흩날려 얼굴에 붙던 머리카락마저 기억나고, 한바탕 두통을 치르고 평온해진 내 마음, 컨디션, 모든 게 너무나도 선명하다. 지금도 나는 두통이 있던 날의 일들은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게 10년 전이든, 15년 전이든. 머릿속의 불꽃놀이가 기억 어딘가를 자극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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