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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Nov 04. 2023

차가운 책더미, 그 위에서

보통 학창시절하면 다들 무얼 먼저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학교를 나왔고, 평범한 친구들과 평범하게 놀고 공부하고 그렇게 지냈다. 정말 무수히 많은 기억 속에서 '학창 시절'하면 불쑥 떠오르는 기억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책을 어깨높이만큼 쌓은 기억'이다. 책상 서랍에 묵혀두던 책은 무척이나 시원했고, 시원한 냉감에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두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렇다. 책을 쌓은 이유는 두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생각해 보면 두통은 어릴 적부터 나를 괴롭혔다. 나는 가령 약물부작용이나, 생리를 시작하며 호르몬에 의해 생긴 두통이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초경을 하기 전부터 종종 머리가 아팠고, 그때마다 게보린이나 엉뚱하게도 화이투벤을 복용하곤 했다.(머리가 아픈 게 감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름 편두통 경력직인 지금 되돌아보면 증상도 편두통과 매우 흡사했다. 머릿속에 굵은 혈관이 힘차게 펌프질을 하듯 한쪽 머리가 맥박처럼 쿵쿵 뛰거나, 오심이 있어 구토를 한다거나, 눈알이 아프거나, 귓구멍 아프거나, 콧등이 아픈 적도 있다.


한 번 온 두통은 쉽사리 잠들지 않았다. 물론 이것도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약 먹는 것을 매우 꺼려하는 아이였고, 그래서인지 두통이 시작된 후 못 참겠다 싶을 때 약을 먹어 항상 초기진압에 실패했었다. 그래서 늘 고통의 중심에서 진통제가 온몸에 퍼지기만을 간절히 기다렸고, 그 기다리는 시간엔 어딘가 시원한 곳(주로 맨바닥이었다)에 새우자세로 꼬부려 누워있거나, 어두운 곳을 찾아 기어가거나, 이마 위에 팔을 얹어 머리에 어느 정도 무게감을 줬다. 요즘도 나는 편두통이 오면, 아픈 쪽으로 돌아 눕는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픈 쪽에 압력을 주면 0.1%의 고통이라도 줄어드는 느낌이 들어서다.


그런데 그날이 그랬다. 15살인가 16살, 지금은 나이조차 기억나지 않는 날들 중에 하나였다. 몹시 기분 나쁘고, 아주 의뭉스럽게(내가 두통을 묘사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한쪽을 건드리던 두통은, 오후가 되자 머리 전체로 확 퍼져나갔다. 오후 3시 종례를 앞두고는 도저히 똑바로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보통 내 기준에서 편두통은 (1)머리만 아픈 편두통, (2)오심을 동반한 편두통(>비상이다, 비상!!) 이렇게 둘로 나뉘는데, 저당시 두통은 (2)번, 즉 오심을 동반한 편두통이었다. 막말로 교복 입고 교실 바닥에 새우처럼 꼬부려 누울 수도 없는 일이라, 나름의 묘책으로 서랍 속에 넣어둔 모든 책을 꺼내 높이 탑을 쌓고 가장 아픈 머리를 대고 누웠다. 책 속에 스며들어있던 쾌쾌한 냄새와 함께 차가운 김이 두피로 스며든다. 통증이 아주 조금 줄어든 것 같지만, 체온이 더 높은 까닭에 책은 금세 따뜻해진다. 밑에 있는 책을 젤 위로 올려 다시 시원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좌, 우 머리를 왔다 갔다 냉찜질을 하면서 엄마에게 급하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좀 데리러 와주면 안 돼? 나 머리가 너무 아파.'


두통은 유전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라곤 하지만, 최근 대학병원 진단을 통해 알았고, 이 얘기를 다른 두통인들에게 말하니 다들 처음 듣는 표정이었다. 부모 중, 한쪽이 편두통일 경우 자녀가 편두통을 앓을 확률은 대략 50%, 부모 양 쪽 모두 편두통일 경우 자녀가 편두통을 앓을 확률은 75%라 한다.(*Medicover Genetics, 2023) 아주 나중에야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모계유전을 통한 편두통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오빠도 학창 시절과 군 시절에 두통으로 꽤 고생한 것 같지만, 본인 말에 의하면 어느 순간 두통이 사라졌다 했다. (나는 오빠의 군 일기를 몰래 본 적이 있다. 담배 피우고 게보린 먹고, 불침번 전에 게보린 먹고,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오빠는 50%의 확률을 피해 갔고, 나는 50%의 늪에 빠졌다. 두통의 확률게임에 딱 걸린 셈이다.


청소년기에는 남들도 다 나처럼 사는 줄 알았다. 친구들끼리 만나서 '너는 요새 어디가 아프니?'라고 대화하지 않기에(30대 중반인 요즘은 만나자마자 어디 아픈지 자랑? 한다.) 다들 머리가 아프고, 너무 머리가 아픈 날은 구토도 하고, 이렇게 사는구나,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평생을 살면서 머리가 안 아픈 사람도 있었다. 혹자는 학창 시절 공부만 하기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거라고, 대학에 다니면서 잠도 잘 자고 빡빡하게 살지 않으면 괜찮아 질거라 했다. 결과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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