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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Dec 30. 2023

단종, 새로운 치료의 시작

호환마마보다 무서웠던 약 단종

20년 말, 다니던 내과에 이전처럼 평범하게 편두통 약을 받으러 갔다. 일주일치 처방전을 받고 약국에 제출했는데, '미가펜이 없으니 다른 약국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약이 충분치 않아서 다른 약국에 가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근처 다른 약국에 가서 처방전을 내밀었다. 비밀스러운 통로 뒤에서 '약국에 미가펜 20개 이상 있는지 좀 찾아보라.'는 말이 작게 들렸다. 그때였다. 왜 여기저기, 발길이 닿는 약국마다 미가펜이 없다고 하는 건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7일 치, 즉 21개의 약봉투를 받고 집에 돌아왔다. 그때만 해도 십여 년을 꾸준히 먹던 약이 단종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21년 2월이었나. 설날을 앞두고 방문한 내과에서 더 이상 미가펜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미가펜이 없으니 소화제와 같이 펜O을 처방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땐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선생님. 지금 미가펜으로도 아팠던 머리인데, 펜O이라니. 말이 됩니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충격적인 약 단종 소리에 어버버한 상태로 병원을 나왔다. 약국에 물어보니, 코로나19로 원료 수급에 문제가 생겨 더 이상 미가펜이 나오지 않는댔다. 현실일까, 꿈일까, 미가펜에 울고 웃었던 나에게 당시 충격은 상상이상이었다.


초비상이었다. 펜O은 먹나 마나였다. 편두통 약이 아닌 만큼 두통에 별로 효과가 없었고, 아침, 점심, 저녁 약을 먹어도 두통이 가라앉을까 말까였다. 비상이다. 좀비가 들이닥친 아포칼립스 시대를 맞이한 사람처럼 갖고 있는 조제약(미가펜이 들어있는)을 펼쳐서 개수를 세었다. 본가 외, 서울 집에도 있는 약까지 합치면 족히 10봉은 됐다. 다소 오래된 약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10봉만이 나의 살 길이라는 생각에 두통의 등급에 따라 그에 맞는 약을 복용했다. 강도 약-중의 두통에는 펜O을 복용했고, 고강도의 두통에만 미가펜을 복용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났고 한 달이 지났다. 남은 미가펜은 이제 5알뿐.


초조해졌다. 마치 언어를 포함해 비언어적인 표현도 통하지 않는 미지의 국가에 나 홀로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두려움은 집착으로 변했고, 극도의 염려는 편두통을 불러왔다. 미가펜 숫자가 점점 줄어갈 때쯤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울하기까지 했다. 약국 리스트를 뽑아서 본가의 약국 주변에 전화를 돌렸다. '미가펜 있나요?', '미가펜 있어요?' 등등 수량조사를 했지만 '단종'이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출근을 한 날엔 회사 주변의 약국을 방문했다. 자취집 근방의 모든 약국을 싹 다 뒤졌다. 대형약국 포함, 다 허물어져가는 동네 후진 약국까지 뒤졌지만 미가펜은 없었다.


꼭 미가펜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같은 이소메텝텐 계열인 마이드린 등 비슷한 약을 찾았지만 없었다. 아니, 하루아침에 수급이 안 돼서 약이 싹 다 사라질 수 있나? 코로나19가 무슨 약물 수입까지 영향을 주나? 이건 좀 아닌 듯? 패닉이 오기 시작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카페에 글을 올렸다. 누군가가 댓을 달았다. '부산 어디 약국에 미가펜이 좀 있는 것 같다.'라고. 그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뭔가 파사삭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높은 건물이 무너진 후, 먼지구덩이와 함께 쥐 죽은듯한 정적이 찾아오듯 갑자기 고요해졌다. 그렇게 약에 집착했던 주제에, 부산의 어느 동네에 있는지도 모를 약국까지 무작정 찾아갈 용기는 없었다. 그냥 이제는 미가펜을 대신할 약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거다. 그리고 그때는 대학병원에 가서 정확한 검사와 분석을 할 때였고, 그때가 지금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이 기억난다. 몇 월 며칠인지는 잊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그날을 떠올리면 내 스스로가 짠해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다. 꽃샘추위로 매우 추웠던 날이었다. 마스크 때문에 속눈썹에는 물방울이 대롱대롱 맺히던 겨울 같은 봄이었다. 무섭게 춥던 그날에 롱패딩을 입고 신촌 거리를 헤맸다. 눈에 보이는 약국마다 다니면서 '미가펜 있나요?'를 외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가씨, 그 약 단종돼서 다른 곳에서도 찾기 힘들 거예요.' 그리고 돌아서는 내 표정도 한결같이 실망스러웠다. 그런 봄이었다. 소설 속 흔한 문장 같지만, 정말 유난히 추웠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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