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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May 07. 2024

내가 죽으면 이 일기장들은 어쩌지

다 태워버리진 않으려고요.

기대했던 3일 연휴 동안 저는 장례식장에 다녀왔습니다. 3일 내내 장례식을 갔는데, 제가 머무는 시간은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분위기가 주는 무거움이 있잖아요. 어찌나 피곤하고 마음이 좋지 않던지. 어제는 새벽 3시에 일어나 발인 예배에 갔다가 집에 오니 아침 6시더라고요. 아침 6시밖에 안 됐는데 뭐하지 생각하다 며칠 밀린 일기나 써볼까 싶어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 초등학생 때는 모두 일기를 썼을 거예요. 그게 또 핵심 숙제 중의 하나였거든요. 방학 일기라든지, 무슨 일기, 저런 일기, 뭐 그리 일기를 쓰라고 하는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는 일기를 쓰는 행위보다, 내 일상을 들여다보는 선생님이 더 좋았었나 봐요. 오늘은 선생님이 뭐라고 코멘트를 남겼을까, 그걸 기다리는 재미가 있었거든요.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도 참 대단해요. 제가 어릴 때는 한 반에 3-40명 있었는데, 그 많은 일기를 어찌 다 보고 적절한 문구를 남겼을지. 분명 남길 말이 전혀 없을, 그런 일기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어쨌든 초등학교 시절을 제외하고 고등학교 때도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20살 때부터였어요. 거의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일기가 아니라 일지와 비슷한 그런 글이에요. 뭐 먹고, 뭐하고, 뭐 샀고, 화장실을 갔고. 대부분 그런 이야기입니다. 가장 고독했던 취준생 시절의 일기가 그나마 글과 비슷한 형식을 띠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30대 중반이 된 지금 뭔가 대단한 글을 적지는 않습니다. ‘일기‘라는게, 매일의 하루를 적는 거잖아요. 사색한다거나. 그래서 그런지 개인의 생활반경이나 경험을 넘어선 글을 쓰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소설을 적을 순 없으니까요.


며칠 분의 일기를 주절주절 쓰는데 문득 ‘갑자기 내가 죽으면 이 일기장들은 어쩌지’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오는 데는 순서 있지만 가는 데는 순서가 없으니까요. 남겨진 일기장들이 삶의 흔적이 되는 건데, 제 일기는 정말 제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글들이 제법 있어서요. 갑자기 저 없이 남겨질 일기장들이 저를 위협할 무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문득 작년에 읽었던 조경국 작가의 <일기 쓰는 법>이란 책이 기억나지 뭐예요. 작가는 책에서 일기쓰기란 무엇인가를 조곤조곤 알려주는데요, 죽기 전에 일기장을 다 태워버리겠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안 그래도 제가 이 책을 읽고 나서 남겨질 일기장에 대해 잠시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진 것도 조금 슬픈 이야기인데, 그나마 있던 제 소소한 삶의 흔적까지 다 태워버릴 생각을 하니 마음이 더 울적해지더군요. 누군가 제 흔적을 보고 ‘이 시대 인류는 이리 살았더라.’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어딘가 묻어둘까 봐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인터넷에 글을 쓰는게 아이러니 하네요.

2024년 일기장은 테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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