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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Apr 16. 2021

글쓰기 싫은데 작가는 되고 싶어

영어 북 챕터를 쓰다





"In 2001, when Adversarial Legalism was published, I never imagined that the book would deserve or need a second edition."


- Kagan, R. (2019). Adversarial legalism : The American way of law (Second ed.).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방금, 내 인생 첫 책 원고의 제출을 마쳤다.

논문을 몇 편 써본 일은 있지만, 책에 들어갈 글을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랜 기간 꿈을 꾸어 온 일이다.


박사 과정 입학을 앞두고 수개월 간 고민을 하였다. 나이가 너무 많은 게 아닐까, 애매하게 경력을 단절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닐까, 박사과정을 내가 즐길 수 있을까, 시간과 노력만큼 내가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어보았다. "제가 지금 박사를 하는 게 맞을까요?"

그중 한 분이 내게 되물으셨다. "왜 박사를 하고 싶은 거지?"


"제 이름으로 된 글을 쓰고 싶어서요."


나도 이렇게 답변할 줄은 몰랐었다. 나는 당시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글은 회사의 명의로 나갔고 저작권도 회사에 귀속되었다. 엄밀히 말해 내 생각을 자유롭게 쓴 것도 아니었다.


어느 학술지에서 부탁을 받아 썼던 토막글에 내 이름 세 글자가 인쇄된 것을 보고 작게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학술지에 논문을 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삶에 치이다 보면 뒤로 밀리곤 했다. 그래서 박사를 한다면 공부를 하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해왔었다. 그래도 그것이 내 머릿속에서 1번으로 튀어나온 이유일 줄은 몰랐다.


그 말을 들으신 분이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해라. 만약 네가 '더 좋은 직업을 갖고 싶어서'라고 말했다면, 나는 아마 말리고 싶었을 거야. 박사를 해보면 알겠지만, 생각보다 대학원이 직업을 업그레이드하는 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수가 있어. 그런 불확실성을 감수하면서 공부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네 이름으로 된 글을 쓰는 것은 박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할 수밖에 없는 일이잖아? 이룰 수밖에 없는 꿈을 꾸는 사람은 지치지 않겠지!"




그래서 왔다(!)




미국에 와서 한국어로 된 논문 세 편을 발간하였다. 20페이지 이상의 진지한 글을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기부여를 지속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애초에 제목에 (1)을 붙이고 세 편짜리 글로 기획을 하였다. 그리고 2020년 봄, 가을, 2021년 봄까지 해서 마무리를 하였다.


글을 쓰는 일은 정말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일단 형식적 측면에서, 하필이면 전공을 법학으로 선택한 덕분에 footnote를 거의 매 문장 달아야 하는 압박이 있었다.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하기까지 국내외에 나온 유명한 논문은 다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에 자료조사에 상당한 시간을 투입하였다. 그런 후에도 글을 쓰는 내내 생각이 바뀌어서 처음의 얼개를 뒤집어엎곤 하였다. top-down 식 글쓰기와 bottom-up 식 글쓰기가 있다면, 나의 사고체계는 bottom-up 스타일에 해당하는데, 논리적인 전개가 있는 비문학 글쓰기를 하다 보니 억지로 top-down 방식을 먼저 시도하고 실패하고를 반복했던 것이다.


자료조사조사조사조사



하지만 이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쓰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글쓰기는 방청소, 설거지, 학교 숙제, 친구와의 통화, 유튜브, 요리, 심지어 운동보다도 순위가 뒤로 밀렸다. '저자가 되고 싶은 마음'과 '글을 쓰고 싶은 마음' 간의 간극은 너무나 멀었다. 저자가 되고 싶은 마음에 약속해놓았던 글 빚을 갚을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결코 글을 쓰지 않았다.




세 번을 내리 같은 과정을 반복하였다.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괴로워하기를 한 달, 데드라인이 도과한 날부터 밤을 새우며 글쓰기 시작해 3일 만에 초안을 마치고, 고쳐쓰기를 미루다 또 편집본 데드라인이 도과한 날부터 3일 간 밤을 새우며 수정을 하였다. 결국 인쇄 직전까지 편집진에게 부탁을 해가며 오타를 수정하였다. 아마도 우리 학술지에 블랙리스트가 있다면 내 이름이 첫 번째일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궁금해하고 또 궁금해했다. 나는 왜 글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렇게 글쓰기에 기가 질린 후에도 놀랍게도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컴퓨터 사이언스 책에 챕터 하나를 맡겠다고 자원을 하였다. 나는 당연하게도 컴퓨터 사이언티스트가 아니다. 그런데 마침 컴퓨터 사이언스 책 내에 데이터 기술이 야기하는 위험과 그에 대한 해결책을 포괄적으로 다룰 필진을 찾는다는 이메일을 보았고, 법학에 치중해 써도 괜찮냐는 메일과 함께 내 이력서를 보내 보았더니 덜컥 채택이 되고 말았다.




나는 영어로 된 글쓰기가 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해, 영어 글의 저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법학 논문을 쓰기에는 아직 내 영어실력도 미국법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듯싶다. 그러니, 막바로 논문을 쓰기보다는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의 한 챕터 정도를 영어로 써보는 것은 좋은 훈련이 되지 않을까. 법학이 아니라 컴퓨터 사이언스 책인 것도 부담을 덜어주었다. 독자들이 내 흠을 덜 알아채지 않을까? 아직 학생인데 책의 저자(중 한 명)가 되다니! 사실 이런 것은 제대로 된 학술 실적으로 잡히지 않겠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



기숙사의 식탁


저자로 선정이 된 후 편집진으로부터 1000 단어로 된 proposal을 제출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proposal을 심사한 후 게재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 1000 단어는 A4로 2-3장 정도 되는 짧은 글이다. 하지만, 아직 글의 얼개를 생각해놓지 않은 데다가 bottom-up 식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다 보니 전체 아우트라인을 미리 잡는 것은 돌을 씹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여하튼 꾸역꾸역 얼개를 그려 proposal을 제출하고 나니 몇 주 후, 향후 proposal의 내용대로 작업을 하여 6500 단어의 글을 완성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6주 간 고통스러운 미루기를 하였다.

'영어로 된 글을 쓰는 건 처음이잖아! 지금부터 작업을 하라고! 앗! 그런데 저녁에 카레를 먹으려고 했는데 돼지고기가 없잖아? 조금 있으면 마트가 닫겠어...'

'이 단어가 영어로 뭐였지? 어? 구슬샘의 새 강의가 나왔군....'


데드라인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부터 Microsoft Word를 켜놓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의 얼개가 다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이 써지지 않았다. 한글 논문 쓰기의 어려움에 영어의 어려움이 더해져 한 발자국도 앞으로 가지 못했다. 법 문언, 판례, 논문 등의 레퍼런스를 찾아 정확한 스타일에 따라 명기를 하는 것이 극도로 내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다. 좋은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영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데드라인이 되었을 때 불과 2장 정도의 글이 추가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조차도 대부분 레퍼런스를 여기저기서 짜깁기해 온 정체불명의 글이었다.


데드라인이 도과하였고, 독촉 이메일이 오기 시작하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쓰기 시작했다.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넘어가고 레퍼런스를 찾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겠다 싶으면 해당 내용을 포기하였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두 번 데드라인을 연기하였다. 세 번의 밤을 새웠다.


그리고 오늘이 두 번째로 연기한 데드라인이었다. '목요일까지 보내겠다'라고 하였지만, 결국 금요일 아침에 보내게 되었다. 편집자는 인도에 있는 것으로 보이니 그쪽 시간으로는 목요일이 지난 지 한참이 되었을 것이다. '결론'을 대충 복붙해서 abstract를 만들고, plagiarism report라는 것도 처음으로 구매하여 사용해보았다. 문장들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제출본을 준비하였다.



연장된 데드라인 (...)


그런데 이게 웬걸. 시스템에 들어가보니 데드라인이 4월 20일로 연장되어 있었다. 나만 벼락치기 하고 있던 것이 아닌걸까.....? 이 화면을 보고 순간 조금 더 수정을 할까 하는 유혹이 들었지만, 이미 며칠 간의 밤샘을 한 터라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었기 때문에 오타가 가득한채로 제출을 하였다. 편집진은 나를 더욱 미워하게 될 것이지만, 두 번째 리뷰 때에 조금 더 수정할 기회가 있겠지.



영어 북 챕터 쓰기를 일단 마무리한 소감은 이렇다.


(1) 글쓰기는 힘들다.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2) Zotero와 Onedrive가 없다면 100개의 footnote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3) 나는 영어문장을 유려하게 쓸 수 없다.

(4) 좋은 글을 쓰지 못했다.

(5) 그래도.. 마쳤다!



그리고 벌써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 생각을 하고 있다.

다음에는 컨퍼런스 페이퍼를 써볼까? 아니면 바로 Law Review Article을 써볼까..?

쓰고 싶은 주제는 엄청 무궁무진한데....?

Google Scholar 페이지도 만들고 SSRN에도 등록을 해야겠군..!

언젠가는 Citation Index가 10을 넘는 날이 올까?



글쓰기를 싫어하는 주제에 저자는 되고 싶은, 그것도 인용이 많이 되는 유명한 저자가 되고자 하는, 이런 강렬한 욕구는 명예욕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매슬로우가 말한 자아실현 욕구일까.



하여튼 이렇게 브런치에 최초로 발행을 하게 된 것 또한 미루기의 일환이다.

지금 시간은 새벽 6시이지만, 이제 일주일 간 미뤄왔던 장학금 지원서를 2시간 만에 쓰기 위해 다시 Microsoft Word로 돌아가야 한다.




워싱턴의 하늘은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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