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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un 24. 2023

미국이 싫어서



미국에 처음 온 1-2년 간은 허니문 스테이지를 겪었다. 영어가 어렵고 힘들지만, 대체로 친절한 사람들. 학비를 내고 다니는 나. 이 사회를 위해 돈을 쓰겠다고 온 나를, 모두들 웃는 얼굴로 대해준다. 


"어떻게 second language로 이렇게 어려운 법학을 하니! 난 내가 외국어로 법학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면..... 너 정말 대단해!!"


엄지척해주는 친구들을 많이 만난다. 너무 의기소침하지마. 너 정도면 정말 훌륭한거야! 


진심으로 의기를 북돋워주려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느끼며. 역시 미국은 여유가 넘치는 곳이구나.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구나. 껍데기가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구나. 


한국에선 여자라서, 어리다고 무시를 당했던 것 같은데. 여기는 나이도 묻지 않고 남녀 간 성의 구분도 불분명하다(시애틀은 남녀화장실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트렌스젠더가 많고 non-binary라면서 남녀 중 어디에 속할지 결정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 여기에선 오롯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구나!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간혹 catcalling이라고 하는, 조롱 어린 부름을 받는 경우를 마주치게 된다. 어이! 거기 동양 여자애! 예쁘게 생겼네? 나랑 놀까? 


이런 질 낮고 할 일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기분이 나쁘지만 반격은 못한다. 총을 들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라면,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저한테 말씀하신 거에요?"라고 물어볼 법도 한데. 여기에선 그냥 눈을 꾹 감고 귀를 닫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내 옷에 먼지처럼 묻은 말들이 빨리 씻겨가길 바라면서. 










지나가다가 껌을 밟듯 캣콜링은 계속 된다. 


껌을 많이 밟은 날은 짜증이 나지만, 그래도 하루를 망칠 일은 없다. 


껌은 껌이니까. 








배제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 학생들 팀에 끼지 못하거나. 교수가 기회를 주지 않거나. 나에게만 이메일 답장을 하지 않거나. 교내 직장 여러 곳에 이력서를 보내도 답을 받지 못하거나. 


아마도 내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인 것 같다. 여기도 경쟁이 치열하니까. 그래, 한국에서도 장애인을 잘 채용하지 않는 이유가 고용주 입장에서 신경쓸 일이 많기 때문이겠지. 굳이 추가적인 노력을 기울여가며 나를 챙겨달라는 건 무리한 요구야. 난 잘 듣지도, 말하지도, 쓰지도 못하니까. 벌써 1년이 되었는데도 영어를 어버버하고 있는 내 문제다. 스무 살 넘어서 배우는 영어는 고통받는 만큼 는다고 하던데. 아직 내가 고통을 덜 받았구나. 


자! 다시 매일 아침 30분씩 영어발음 연습을 시작하자.  









레스토랑 서버가 나에게만 이상한 대우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백인 테이블에서는 살갑기 그지 없다. 그는 그냥 동양인을 대해본 적이 없는 걸까? 어색해서일까? 


길거리에서 나를 보고 저 쪽으로 피하는 백인 아주머니를 만나면, 혹시 나를 코로나 바이러스로 보는 건가 하는 기분이 든다. 동양인 만큼 마스크를 잘 쓰는 사람들이 없는데... 


마트에서 계산을 할 때, 유독 나를 이상하게 대하는 캐셔를 만난다. 그 캐셔는 동양인일 수도 있다. 내가 영수증을 보고 두 번 계산되었다고 질문을 할 때 내 영어발음을 듣자마자 한숨을 쉰다. 영수증을 가지고 실랑이를 하는 고객이 지겨운건가? 내 영어발음을 알아듣기 위해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짜증나는걸까? 


여전히 만나는 사람들의 80%는 다정하지만, 20%의 사람들은 나에 대한 적대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적대감은 아마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내 정체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어쩌면 영어를 엄청 잘하게 되더라도.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원치 않는 가르침을 받는 일들이 생긴다. 수업을 같이 듣는 동유럽계 친구가 왜 내 노트북 셋팅이 한글인지 묻는다. "너 영어 배우고 싶지 않니? 미국에서 적응하고 싶지 않아? 기분나쁘게 듣지 마. 너 미국에서 적응하려면 네 주변 모든 걸 다 영어로 바꿔야 하는 건 기본이다!"라고 한다. 


직장 동료와 어떤 문제를 두고 견해 대립이 있는데, 갑자기 내가 관사 the와 a를 잘못 썼다고 지적을 한다. 사이가 좋을 때는 내 영어가 너무 훌륭하다고 했던 사람이다. 


직장 동료에게 내 논문 제출 데드라인 날에 쉼표를 따옴표 안에 써야 하는지 밖에 써야 하는지 (영국과 미국의 방식이 다르다) 메신저로 물어보자, "넌 지금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쓸 때가 아니야!!! 콘텐츠에 신경써야지, 무슨 문법 따위를 신경쓰니!!! 쉼표 때문에 논문을 떨어뜨리는 경우는 없어!!"라면서 열 개도 넘는 메시지를 보낸다. "외국어로 글을 쓰는 나는, 이런 게 하나 걸리면 다음 문장으로 못 넘어가...."라고 이야기하니, "그런가?"라고 답을 하고선 정작 쉼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미국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 열심히 쓴 글에 대해 한 교수님에게 피드백을 요청했더니, 마지막에 '한국' 이야기를 뒤에 조금 넣어서 '아시아 계통 저널'에 제출해보는 것이 어떻냐는 피드백을 받는다. 내 글이 그렇게 보잘 것이 없나? 내 모국의 정체성을 넣어야지만, 어딘가에 들이밀어 볼 수라도 있는 것일까? 


회의 석상에서 '아, 미국에선 다 이렇게 하는데... 넌 정말 모를 수도 있었겠네!'라는 말에 항변을 하지 못하고 돌아온 날. 그리고 며칠 후 사실은 내가 맞고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아!! 왜 좀 더 확신을 갖고 한 번 더 말하지 못했을까??? 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었을까. 


그래. 그들은 의도가 좋았겠지. 나를 무시하려는 태도는 아닐거야. 누군가를 일부러 기분 나쁘게 하려는 사람은 없겠지. 내가 너무 꼬아서 생각하는 거겠지. 








크고 작은 배제와 무시를 무수히 겪는다. 점점 분명해지는(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나는 무시를 당하고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견디기가 힘들다. 


상대방의 의도를 추정하는 것에 지친다. 속 좁은 나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에도 지친다. 그 자리에서 왜 난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걸까. 그리고 하루 종일, 몇 일간 곱씹으면서 쳇바퀴 속에 갇혀 있는 것인가? 그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었을텐데.  


미국에서 오래 산 친구들에게 묻는다. 넌 이럴 때 어떻게 하니? 







다들 각자의 팁이 있다. 

'"그래서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라고 대놓고 물어봐!' 

'"혹시 농담하신거에요? 전 재미 없어요!"라고 면박을 줘!' 

'상사나 HR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해. 그거 요즘은 심각하게 다들 받아들인다니까!'


두 손 꼭 쥐고 영어로 문장을 외우고 또 외워서 목소리를 덜덜 떨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다. 못할 것 같다. 








책을 읽는다. 

Dr. Sue가 쓴 Microaggressions에 관한 책이다. 


Dr. Sue의 말로는 아주 노골적인 인종차별은 미국에서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노골적인 인종차별은 어쩌면 더 무시하기가 쉽다. 한편, 은근한 차별적 발언은 상대가 정말로 악의를 가지고 가해를 하려고 한 것인지 불분명할 때가 많다. 때로는 '조언'의 형식을 띄고 있고, 나를 배려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고, 나와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진심으로 미워하거나 그 사람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기가 힘들다. 이런 생채기가 수천 개쯤 나면 인간은 우울해진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의도가 어찌되었든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Dr. Sue는 2010년에 Microaggressions을 고안하는 책을 쓴 후 작년에 '가해자에게 대항하는 법'에 대한 책을 한 권 더 썼다. 


거기에선 가해자에게 피해를 알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슬프게도, Dr. Sue의 연구에 따르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직접 대항하는 것은 피해자 입장에서 심리적 비용이 크고 효과도 낮다고 한다. 피해자는 권력관계에서 열위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시작해도 계속 굴레로 빠진다. 가해자는 (1) 본인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2) 설령 누군가 피해를 입었다 할지라도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자신을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면 피해자 입장에선 나에게 공감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이에게, '당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는 피해를 입었노라'고 말을 하는 것이 괴롭다. 자아를 지키려고 말을 꺼낸 것인데, 결백하다는 그의 앞에서 자아는 점점 위축된다. 


Dr. Sue는 White allies (강자 집단 중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와 Bystanders (상황과 무관한 지나가던 사람이 '저건 인종차별 맞네. 너무했네.'라고 약자에게 공감해주는 경우)가 있어야 가해자가 변화된다고 한다. 특히, 가장 강한 것은 Bystanders. 가해자는 지나가던 사람까지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인종차별을 당한 순간에 어떻게든 용기를 짜내어 상대에게 해명을 요구하고(다른 사람들 앞이면 더 좋다), 해명을 들은 후에도 여전히 피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공식 창구에 신고하는 방법 밖엔 없다고 한다. 최대한 White allies와 우호적인 bystanders가 도움을 주기 쉬운 상황을 만든다. 그래도 성공률은 높지 않단다. 


세상은 하루 아침에 변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책을 읽으면서 나만 이런 것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흑인도. 가난한 백인도. 히스패닉도. 장애인도. 

계속 사회가 나에게 부과하는 시선. 

은근한 적개심과 차별에 맞서 싸웠구나. 


이렇게 커다란 구조를 보게 되면서 

나를 탓하던 마음을 한꺼풀씩 벗겨낸다. 


"영어를 못하는 네가 문제야." 

"네가 너무 예민해." 

"상대의 의도를 확대해석하는 네가 문제야." 

"용기 있게 맞서지 못하는 네가 문제야." 



내 안에 매일 울려 퍼지는 이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궁금하다. 

나의 목소리일까. 

그들이 내게 심은 목소리일까. 










그래서 나는 미국에 사는 것이 싫다. 

모국이 아니면 꼭 미국이 아니라 어디서라도 느낄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어디가서 타로점을 보았는데 '딸이 향수병이 심하네요.'라고 했다고 한다. 

아, 향수병은 내 나라를 좋아해서 생기는 마음인 줄 알았는데,

내가 사는 곳을 싫어해서 생기는 마음이었구나. 



"언니. 그런 거 다 신경쓰면 미국에 못 살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그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한거야!"라는 말, 

내가 마인드컨트롤을 못하기에 인종차별을 아프게 느낀다는 그 말을, 

더 이상 한 귀로 못 흘리겠다. 



"응. 난 그런 거 다 신경써서 남의 나라에 못 사니까 내 나라에 갈려고." 

네가 좋다는 이 땅을 싫어할 수 있는 힘.  

내 안에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 겨우 이거다. 







내 나라에선 택시기사가 날 유난히 이상하게 대하면, '아, 이 기사님 젊은 여자라고 무시하네. 말 섞지 말자.'라는 판단이 선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이 기사님은 악의가 없으실텐데...'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직장 동료가 내 문법을 트집잡는 일은 없다... 직장 동료가 나를 젊은 여자라서 대우해주지 않으면 '저 사람 별로구나. 꼰대네.'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꼰대가 꼰대처럼 행동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때 이따금 적정하게 지적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소소한 승리를 거두면 좋고, 안되면 어쩔 수 없고. 그렇게 맞춰가다가 팀을 옮기고, 이직을 하고. 


그런 삶도 충분히 힘들었었는데. 

그게 그렇게 담백하고 소중한 것이었구나. 

내가 그 사회의 가치를 잘 알고 있고, 누가 선을 넘을 때 '어, 선 넘었네'라고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는 힘. 그 사회 구성원으로서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자신감. 


있을 때는 공기처럼 몰랐던 그것. 


흔들리지 않는 내 안의 균형추.

   


그것이 나의 향수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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