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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Apr 28. 2021

시애틀은 커피의 도시라고 한다.

시애틀에 유학을 가기로 했다고 주변에 알렸을 때, 가장 흔한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1. 와, 시애틀에 가면 잠 못 이루겠구나!

2. 커피는 실컷 마시겠구나! 

3. 커피를 마시다가 잠 못 들겠구나....! 


아마 시애틀이라는 도시를 '들어봤다'는 점에서 친근감을 표하기 위해 하신 말씀들이겠지만, 딱히 응답할 말이 없어서 허허허 웃기만 했다. 



톰 행크스는 그때도 지금도 리즈.  이미지 출처: variety.com


주지하다시피 시애틀은 스타벅스의 본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살면서 꽤 많은 시간을 커피를 찾고 마시는 데에 투입해 왔다. 음식이든 술이든 지나친 리서치와 노력 투입은 피곤해하는 편이기 때문에 자격증을 따거나 희귀 원두를 구해서 마시거나 30만 원짜리 그라인더를 구입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커피 애호가라 칭할 수준은 결코 못되지만, 회사와 학교 근처에서 조금 더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려주는 카페를 찾아다닌다든가, 프라이팬 로스팅을 해보거나, 매일 아침 혼자 핸드드립을 내려마시는 것과 같은, 작은 투자들은 아끼지 않았다. 5천 원을 주고 진하고 향긋한 커피를 마실 때의 그 감사함이란. 그리고 같은 5천 원을 주고 맹물 같은 커피를 마실 때의 그 참담함이란. (...) 


여하튼, 어쩌고 저쩌고의 본점! 에는 실망한 기억이 많기 때문에, 스타벅스 1호점의 커피가 세계 각국 분점의 커피보다 맛있을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보편적인 맛을 구현했기로 알려져 있는 스타벅스 아닌가! 단지 '시애틀 사람들'이 정말 미국의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커피를 더 좋아할까, 그래서 스타벅스라는 로컬기업이 세계적 기업으로 클 만큼 커피를 많이 소비해준 것일까 궁금했다. 만약 그렇다면 스타벅스 말고 시애틀 전역에 아기자기한 카페들도 많을 테고, 다양한 지역의 원두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내리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18개월 여 간 시애틀에서 살게 되었다. 


그 동안 느낀 '커피 희로애락'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스타벅스 커피가 더 맛있지는 않다. 더 다양하다. 


스타벅스의 고장답게 사이렌이 고속도로를 섬뜩하게 내려다보는 헤드쿼터도 있고, 모든 관광객이 다 가기 때문에 나는 가지 않는 스타벅스 1호 점도 있다. 


이 건물이 무서운 건 나뿐..?  이미지 출처: Bluestar's photolog


시애틀 사람들은 친구가 오면 '스타벅스 1호점'보다는 '스타벅스 리저브'를 데리고 간다. 스타벅스 1호점이 뉴욕제과라면 리저브는 파리크라상의 뮤지엄 버전이랄까.. 휘황찬란한 브론즈색 로스터가 있는 공간이다. 100명은 족히 수용할 만큼 넓고, 다양한 빵류를 팔고, 커피와 관련된 칵테일(메뉴)도 판다. 예약을 하면 프라이빗 투어도 되고, 시간대별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명회를 하기도 한다. 또 온갖 스타벅스 굿즈(컵, 텀블러, 앞치마, 도마, 와인잔, 다이어리, 숟가락 등...)를 파는데, 가격이 비싸지 않고 디자인이 고급스러워서 웬만한 관광객들이 흡족하게 기념품 쇼핑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스타벅스 리저브의 외관과 내부. 이미지출처: starbucksreserve.com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스타벅스는 우리 학교의 '해리포터 도서관' Suzzalo library의 1층에 있는 스타벅스이다. 공부하기 좋은 분위기여서 도서관보다도 자리가 더 빨리 차는 곳이다. 다양한 빵류가 있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가서 빵을 먹으며 공부를 하다가 너무 붐비기 시작하면 도서관에 올라가 자리를 잡곤 했었다. 이런 날은 등록금이 아깝지 않았다.  



Suzzalo 1층의 스타벅스와 도서관 내부. 이미지출처: starbucks.com, uw.edu




가장 특기할 만한 스타벅스는 시애틀 다운타운의 'Princi.' (2023년 현재는 문을 닫았다) 약간 스타벅스의 고급 버전?이랄까, 가구가 좀 더 비싸 보이고, 유럽 풍의 테라스 카페식 인테리어에 고급진 패스트리류, 피자 브레드 등을 판다. 커피는 일반 & 리저브 모두 가능했던 것 같다. '프린치'인지 '프린시'인지 모르겠어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프린시'라고 알려주었다. 그간 주문해 본 음식은 모두 맛있었고, 생각보다 비싸진 않았다. (대부분의 샌드위치류가 1만 원 미만) 



스타벅스의 이태리 카페 Princi.  이미지출처: Nation's Retaurant News



대체적으로 스타벅스 커피의 맛은 한국과 같거나, 한국보다 조금 못한 것 같다. 스타벅스 리저브는 성심성의껏 내린 커피답게 원두의 신맛이나 밸런스를 섬세하게 잡아내고, 일반 스타벅스 커피는 예의 구수한 고구마 탄맛을 낸다. 하지만 한국의 스타벅스들이 놀랄 만큼 일정한 품질을 이루었던 것과 다르게, 시애틀의 스타벅스들에서는 가끔 깜짝 놀랄만한 맹물 커피를 경험하기도 했다. 특히 드라이브 스루를 할 경우 위험이 가중된다. 그래서 '아아'를 시킬 땐 반드시 Light Water + More Ice 옵션을 추가한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미국의 스타벅스 직원들은 매우 친절하고, 덜 바빠 보인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도 결코 여유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심지어 스타벅스 푸드트럭(학교에 스타벅스가 5개는 있는데도, 가끔 푸드트럭까지 주차되어 있다)에서도 직원과 '오늘 하루 잘 보냈냐'는 둥 스몰토크를 하게 된다. 



2. 일반 카페에서 장비빨이나 손맛을 기대하기 어렵다.   


테라로사 느낌의 거대한 우주선 같은 에스프레소 머신은 음...  시애틀에선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가져오는 맛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은 특히 아쉽진 않았다.


다만 핸드드립 문화가 흔치 않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었다. 시애틀에서는 핸드드립을 'pour-over'라고 부르는데, pour-over가 메뉴판에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커피를 잘하기로 유명한 Zoka Coffee에 일반 원두 pour-over와 single origin pour-over가 있어서 크게 기대를 했지만, 아쉽게도 내가 내린 pour-over와 맛이 비슷했다. 샌 프란시스코에서 pour-over에 목숨을 거는 카페에 한 번 가본적이 있다. 커피에서 풍기는 풀냄새나 흙냄새가 독특했다. 이런 식의 하이엔드 핸드드립을 시애틀에서 찾기는 좀 힘들다. 


코스트코의 본 고장인 커클랜드(Kirkland: 당연히 코스트코 1호점이 있다)는 시애틀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갈 수 있다. 커클랜드는 시애틀에 비해 거리가 안전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 젊은 층이 많이 모이는 곳이 되고 있다. 커클랜드에서 20년 넘게 장사한 터줏대감인 Thruline Coffee는 에스프레소, 콘빠냐, 아포카토 등을 아주 맛있게 한다. 하지만 Thruline의  pour-over도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시애틀의 어느 카페에서도 한국의 바리스타분들이 보여주었던 진지하고 정갈한 움직임은 보지 못했다. 사람이 온 마음을 집중해 장인정신으로 내리는 pour-over는 어쩌면 동양에 더 흔한 문화인 지도 모르겠다. 



(1,2) Thruline coffee (Kirkland) (3) Zoka coffee (University Village) 이미지 출처: TripAdvisor, Workfrom




3. 오래 앉아 있어도 괜찮다. 


카페를 도서관처럼 쓰는 사람들과 카페 주인 간의 갈등은 미국에서도 없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내가 갔던 대부분의 카페들은 죽돌이 손님으로 가득했다. 스타벅스가 상권이 발달한 곳에 위치해 있고 붐비는 편이어서 회전율이 오히려 빨랐고, 로컬 카페들은 오래 앉아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컬 카페에는 지역 신문, 지역 잡지가 비치되어 있고, 보모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청소년들의 전단지, 주민센터에서 하는 뮤지컬 정보 등이 붙어 있는 가판대가 있다. 학교 근처에 있는 카페에는 대학생 노트북 군단이 몰려와서 팀 프로젝트를 하는데 카페 직원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가장 저렴한 드립 커피는 대부분의 카페에서 무료로 리필을 해준다. 


시애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들은 서점 안에 있다. 책을 사지 않고 카페에 앉아서 읽어도 괜찮고, 시간제한도 없고, 드립 커피를 무한 리필을 해준다. 시애틀에서 Elliot Bay Bookstore, Third Place Bookstore, Halfprice Books, 그리고 Mercer island의 Island Books를 종종 방문하는데, Elliot Bay와 Third Place에서는 넓고 관대한 커피숍이 있다. 시애틀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학도시라고 하는데(??), 이 크고 작은 독립서점들에서 사람들은 중고책을 거래하고, 독서모임을 하며, 세계 각국에서 초청된 저자들을 만난다. 


Third Place Books와 그 카페. 이미지출처: thirdplacebooks.com


Elliot Bay Bookstore와 Oddfellows 카페. 이미지출처: elliotbaybook.com



4. 술도 커피도 집에서 많이 마시게 된다. 


학생이기 때문에 2-3불도 아쉬운 나는, 이제 웬만하면 커피를 집에서 마신다. 카페들이 일찍 닫기도 하고(3시에 닫는 경우도 많다!) 길거리도 저녁이 되면 안전하지 않다. 한국에서처럼 퇴근 후에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게 여기에선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큐릭(Keurig) 커피 머신이 효자 아이템이다. 네스프레소의 하위 호환이라고 해야 하나? 머신(5~20만원대)도 컵(1개 500~1000원)도 네스프레소보다 싸다. 네스프레소 같은 특유의 향이 별로 없고, 아주 진하진 않지만 드립 커피 같은 느낌도 있어서 난 오히려 네스프레소보다 선호하는 편이다. 조금 시간 여유가 있을 땐 원두를 직접 갈아, 핸드드립이나 에어로프레스를 해서 마신다. 양쪽 모두 스타벅스 커피나 동네 카페 정도의 품질은 나온다. 


서점에 오래 앉아 있고 싶거나, 

콘빠냐처럼 집에서 만들기 어려운 메뉴를 마시고 싶거나, 

인생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앉아 있고 싶을 때, 

또는 레스토랑보다는 저렴하지만 품질 좋은 샌드위치를 파는 곳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싶을 때, 

이런 욕구들을 해결하러 일주일에 한두 번 카페에 간다. 


시애틀의 커피는 특별히 맛있지 않다. 아마 한국의 홍대 지역에만 해도 시애틀의 가장 맛있는 커피보다 더 맛있는 커피집이 20개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커피를 마시러 시애틀에 오는 것은 비추천이다.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온 분이 계시다면, 바쁘게 유명한 카페들을 돌아다니기 보다는, 동네 카페에 앉아 지역신문과 중고책을 넘겨보고 동네 사람들과 갤러리에 걸린 그림들을 구경하면서 그저 그런 드립 커피를 무한정 들이키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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