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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un 17. 2023

갤러리 무급으로 일하다 해고를 당하다.

무 임금, 무 계약서, 무 개념 일자리 


2010년 2월 10일. 

녹사평 역에 내려서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마을 버스를 타면 '하얏트 호텔' 쪽으로 올라간다. 콩나물처럼 마을버스에 실려 이리 저리 몸을 흔들다 내렸다. 10분쯤 걸어올라가면 하얗디 하얀 갤러리 정문이 나온다. 바닥에 얼음이 얼어 있어 구두를 신은 발을 조심조심 움직인다. 


벌써 2달 여 그 길을 걸어오르고 있었다. 

당시 나는 대학교 2학년. 무급 갤러리 인턴이었다. 


홍익대 예술학과 2학년을 다니며 칸트의 <판단력 비판> 같은 문헌을 읽고, 일본의 토우가 몇 년도에 만들어졌는지,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어떻게 다른지를 배웠다. 학교 공부는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웠다. 이론 대신 실기를 해보려고 노력도 했으나, 애초에 그림을 그렇게 잘 그리는 축에 못 들었고, 꼭 그리고 싶다 하는 그림도 그닥 없었다. 


그래서 졸업하면 현대미술을 연구하고 설명하는 '큐레이터'나 옥션 컨덕터가 되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 해 겨울도 나는 과외알바나 하면서 책이나 읽을 계획이었지만, 당시 현명했던 남자친구는 '그렇게 손 놓고 있지 말고 한 번 잡 마켓에 나가서 어떤 일이든 해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네이버에 검색을 해서 갤러리 순위 1위부터 10위까지 전화를 돌렸다. 딱 한 군데에서 무급으로 채용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처음 출근한 날 앞으로는 '화장을 하고, 검은 정장을 입고, 검은 구두를 신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학부생인 내게 주어진 일은 육체노동이었다. 사실 대학원을 나온 다른 유급 인턴(한 달 월급이 50만원이다) 언니들도 주로 육체노동을 했다. 


평생 할 페인트칠을 거기에서 다 한 것 같다. 새하얀 갤러리 벽을 보고 어쩜 저렇게 하얗지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으신지. 그 이유는 전시를 바꿀 때마다 페인트를 새로 칠하기 때문이다. 실내에 해가 들어오면 액자를 걸어놓은 부분만 하얗게 남고 나머지는 노란 빛으로 변한다. 그래서 전시가 바뀔 때마다 전면 페인트칠을 다시 해야 한다. 검은 구두에 검은 정장을 입고 수없이 페인트칠을 하고 못질을 하고 평형을 맞추고 그림을 포장하고 포장을 풀었다. 


전시 오프닝에는 와인을 따르고 케이터링 음식을 준비하고, 좁은 부엌에서 와인잔을 닦고 또 닦았다. 백남준 작품의 70년대 텔레비전 연결선 300개를 직접 하나하나 연결하는 노동도 나의 몫이었다. 이유는 '내가 몸집이 작기 때문'이었다. 좁은 공간에 비집고 들어가서 야물딱지게 선 연결을 잘할 것 같다는 것이다. 기계치인 나는 수 억 짜리 백남준 작품을 훼손할까 손을 덜덜 떨었다. 팀장님은 "이거 잘못되면 네가 손해배상 해야 하니까 조심해"라고 엄포를 놓았다. 무급으로 손을 베이고 다쳐가며 노동을 하는 것도 억울한데 잘못되면 배상까지 해야 하다니. 


난 이 갤러리에 무슨 빚을 진걸까. 


우리 갤러리의 B2B 고객은 KB 프라이빗 뱅킹 센터, 청담동의 재무설계 컨설팅 같은 곳들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섭스크립션 또는 큐레이션 개념이었다. 클라이언트가 갤러리에 1년치 사용료를 지급하면 갤러리는 매 달 가서 작품을 교체해준다. 무슨 작품이 나갈지는 작품의 가격대와 장소 크기에 따라 대충대충 결정되었다. '그 공간의 정체성을 담아 결이 맞는 작품을 추천해주는' 섬세함 따위는 없었다. 창고 상황에 따라 기계적으로 결정된다. 거기는 100호? 이거 남았어? 음. 그래 이거. 


갤러리에서 외부 대여를 하는 작품 중에선 작가가 갤러리에 '판' 것이 아니라 '맡겨놓은' 것들도 있었다. 작가도 작품을 다 보관하기 어려우니 갤러리의 수장고를 이용하는 것이다. 나는 작가들이 자기 작품이 어떻게 대여되는지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생각보다 작가들은 갤러리에게 '을'이었는데, 어차피 생존 작가 중에서는 갤러리가 잘 보여야 할 만큼 엄청난 '갑'은 많지 않았다. 


작품 배송은 당연히 우리 몫이었다. 대여를 나갈 때면 커다란 밴에 검은 정장에 구두를 신은 '인턴 큐레이터' 서너 명이 짐을 싣고 갔다. 벽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랗고 무거운 그림이나 조각도 여자 셋이 낑낑대며 옮겼다. 우리가 맨 바닥에 무릎을 꿇고 포장을 뜯거나, 거대한 조각을 비틀거릴며 들어올릴 때, 센터 직원들은 '아이고 아이고' 걱정하는 소리를 냈다. 그들도 우리처럼 검은 치마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추운 겨울 날, 나는 해고 통보를 받았다. 


원래 2월 28일까지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무조건 3개월은 채우는 것이 도리라고 했다. 그런데 대졸자, 심지어 SKY를 졸업하고 석사를 수료한 사람이 무급 인턴으로 근무하고 싶어 하는데 책상이 없다는 것이다. 이사님은 내게 "미안하지만 네가 내일부터 책상을 비워줘야 겠어. 그간 고생 많았어."라고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어차피 계약서도 쓰지 않았었는데, 의무가 사라진다니 좋으면서도 '이게 뭔가' 싶었다. 


갤러리에서 매일 오이와 당근을 먹던 언니가 있었다. 예쁘고 하얀 얼굴에 긴 생머리를 하고 얄쌍한 검은색 정장 코트를 입던 이였다. "언니 그걸로 점심이 돼요?"라고 물었을 때, 언니는 "이게 몸에도 좋고 가벼워."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언니가 얌체처럼 다이어트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아마도 저 언니는 집에서 생활비를 받고 있지 않구나.'라고 생각했다. 월급이 120만원이었으니, 서울 월세와 휴대폰비 교통비를 내면 남는 돈이 거의 없었을 터다. 오전 8시까지 한남동 산 꼭대기로 출근을 해야 하니, 따뜻한 밥을 지어 도시락을 쌀 시간이 없었으리라. 그래도 그 언니는 그 생활을 참아낼 만큼의 끈기가 있어 보였고, 실제로 그 후 '갤러리 현대'에 취업이 되었단 소식을 들었다. 그 분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멋진 전시 기획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해고되던 날, 그 언니가 화내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아니 너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돈도 안 받고, 그렇게 시키는 육체노동을 열심히 하고, 토요일에도 나와서 일했는데. 고작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을 위해 책상 비워줘.'라는 말이야? 나 정말 이 갤러리가 싫지만 욕하기 싫어서 안했는데. 오늘은 참을 수가 없다, 정말. 진짜 사람도 아니야. 귤 한 박스라도 들려보내야 하는 것 아니야? 박카스 한 상자라도. 응?" 


나는 '이 추운 날 귤 한 박스를 들고 산을 내려가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라리 안 들려줘서 다행이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그 후로 그 언니를 떠올리면 그 언니의 따뜻한 마음과 '귤' 생각이 난다. 



나는 갤러리에서 예술계 노동구조에 좌절감을 겪었다. 


훌륭한 집안이 받쳐주거나, 당시 유명했던 신정아 님처럼 정재계 인사들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인간적 매력이 없으면, 발붙일 수 없는 곳 같았다. 나 같은 평범녀에게는 문이 실낱처럼 좁아 보였고, 그 보이지 않는 틈새를 향해 더듬더듬 어두운 벽을 짚으며 한 발씩 내딛을 자신이 없었다. 


한편, 그림도, 공부도, 갤러리에서 버티기에도 자신이 없던 나는 점점 가라 앉았다. 






그러면 이런 혹독한 노동구조를 겪지 않아도 되는 예술계 일자리가 어디 있을까. 


당연히 국립중앙박물관이 생각났다. 


거기라면, 그래 국가기관이라면, 무급으로 이렇게 부려먹고 한 마디로 자르진 않을 것이다. 


학교에 중박에서 큐레이터(학예직)를 하는 선배가 강연을 온 적이 있었다. 그 언니에게 솔직히 물었다. 


나: 선배. 어떻게 하면 선배처럼 중박 큐레이터가 될 수 있나요?

선배: 아..... 쉽지 않은데... 대학원 갈거야?

나: 필요하면....요. 사실 가고 싶지 않아요. 

선배: 솔직히 말하면 대학원 나와도 우리 학교에서 박사를 해도 학예직으로 채용된다는 보장은 없어. 

나: ??! 진짜요?

선배: 응.. 나도 운이 좋은 케이스였어. 

나: 그러면 전 어떻게 하죠...?

선배: 갤러리는 싫은 거지? 

나: 네.. 이번에 ㅇㅇ갤러리에서 인턴하고 너무 힘들었어요. 

선배: 그러면 차라리 공무원 시험을 봐. 공무원 시험봐도 박물관 들어올 수 있고, 어쩌면 학예직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어. 

나: 공...무원 시험이요? 


마침 괴로워하는 내게 엄마도 '도사님이 행시를 보면 될수도 있다'는 샤머니즘 레슨을 전달하며 압박을 하던 차였다. 그 때 나는 5, 7, 9 급으로 공무원 시험이 나뉘어 있다는 것도 잘 모르던 잼민이였다. 이내 7급, 9급은 국어와 국사, 영어 같은 과목이 있고, 전부 객관식이라는 이야기에 주눅이 들었다. 암기식 공부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수십,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을 수 있으리란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주변의 친구들도 제가 공시생이라고 하면 비웃을 게 뻔했다. 나는 홍대 '술파는 꽃집'에서 친구들과 실컷 술을 마시면 그저 행복해하던 타입이었으니까. 


그래도 그 때는 무슨 귀신에 씌였는지, 아니면 너무 길이 안보여서 절박했는지, 아니면 '도사님'의 말을 조금은 믿고 싶었던 것인지 시도는 한 번 해보기로 결정을 했다.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할지 말지 고민만 2개월은 했다. 당시 나보다 다섯살 많던 남자친구는, 이런 것도 결정 못하는 것이 바보 같다는 내게 이렇게 답을 해주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네 미래를 위해 고민했던 시간은 정말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될거야. 오래 고민해도 돼. 계속 고민한다는 게 중요한거지. 



여하튼 5급이든 7급이든 경제학과 행정법은 꼭 공부를 해야 하기에. 3학년 1학기에 학교에서 '미시경제학'과 '행정법총론'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다. 수업을 중간에 철회하지 않고 끝까지 들을 수 있다면, 그 때가서 공무원 시험을 도전할지 말지 결정하도록 하자. 이렇게 약간은 느슨한 마음이었다.



다음 해 시험 접수까지 10개월 남짓한 시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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