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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un 17. 2023

번아웃 이후 전업대학원생을 꿈꾸다.

워크-라이프 밸런스가 안좋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리고 그리던 전업대학원생이 되었다. 


그러니까. 음. 그 대학원생! 


출처: 본격 대학원생 만화(instagram.com/grad_comics)



처음 미국 유학을 왔을 때, 팍팍한 공무원 생활에서 긴 휴가를 떠나 온 기분이었다. 휴대폰이 울리지 않는 것만으로, "내일까지... 제발.. 너밖에 없어..!!" 이런 부담이 없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스물 여섯부터 일을 했으니, 꼬박 8년이었다. 




세종시 청사 밤 10시. 밀린 예산 자료를 만드느라 직원 여러 명과 야근을 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부처의 R&D 업무 총괄을 하고 있었다. 과기정통부와 기재부 양쪽에서 요구하는 자료를 만들려면 2배로 시간을 들여야 했다. 국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 마시러 나오라고 부르시는 건가? 


나: 네, 국장님. 

국장: 아직 사무실이야? 

나: 네.

국장: 아이고... 고생이 많다! 쉬어야지!

나: 괜찮습니다. 

국장: 내일, 장관님이 오전 8시에 부총리 만나서 10분 동안 우리 R&D 사업 증액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기로 했다. 

나: 네? 내일 오전 8시요? 

국장: 응. 

나: 그럼 뭐가 필요하실까요?

국장: 한 페이지 자료. 부총리님이 한 눈에 딱 보고 '아! 이래서 문화콘텐츠 분야의 R&D가 중요하구나!'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나: 헉.... 우리 예산 자료 제일 짧은 게 20 페이지인데...

국장: 잘 할 수 있잖아! 어차피 메시지가 중요한 거니까. 세부적인 건 장관님들이 아실 필요도 없고. 표 이런 거 넣지 말고. 메시지 중심으로. 

나: 그럼 지금부터 준비하면 어디로 보내드리면 되나요?

국장: 새벽 6시까지 장관님 비서 메일로 보내면 돼. 고생 많다. 미안. 수고좀 해. 

나: 네, 알겠습니다. 보고서 미리 보실 시간은 없겠네요. 국장님. 과장님께 이런 자료 나간다고 제가 말씀드릴까요?

국장: 내가 전화할게. 걱정 마. 


머릿 속이 새하얬다. 주어진 시간은 8시간. 


60대 어른들이 문화콘텐츠 R&D 필요성을 한 눈에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보고서가 과연 무얼까. 그 날 새벽, 방향을 잡았다가 폐기하기를 6번 정도 반복했다.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사무실에 굴러다니던 잡지와 연구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최종적으로 'Dreams come reality ' 뭐 이런 테마의 보고서를 썼다. 영화 <백투더퓨처>의 영화를 보여주는 자동차, 영화 <매트릭스>의 가상현실,, 60대 어르신들이 익숙하실 만한 영화 속 소재 5가지와 우리 부처가 지원했던 프로젝트와 연결해 그림을 만들었다. 향후 가상증강현실이나 인공지능 콘텐츠가 우리 삶에 얼마나 가깝게 들어올지, 왜 선제적인 기술 투자가 필요한지, 해외와 비교했을 때 우리 인력과 자본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등. 지난 수년 간 갈고 닦은 '한글과 컴퓨터' 기술을 살려 한 페이지에 너무 빡빡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단정하고 꼼꼼한 보고서를 완성했고, 5시 30분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런 작업은 초등학교 방학숙제와 비슷하다. 선생님이 한 눈에 이해할 수 있게 카메라로 실험사진을 찍고, 세심하게 설명을 덧붙이는 과정. 뚱뚱한 <방학생활>이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듯이, 열심히 공을 들여서 사진을 붙이고 스토리를 짜면 좋은 보고서가 나온다. 6시 30분, 비서관이 잘 받아서 전달해 드렸다는 연락을 주었다. 안심하고 샤워를 하러 올라갔다. 이제 2시간 정도 여직원휴게실에서 잘 수 있다. 


그렇게 부총리님은 기분 좋게 설명을 들으셨고, 원래 우리 부처에 우호적이던 담당자분도 좋아하셨고, 우리 예산은 대폭 증액이 되었다. 국장님은 내 보고서를 이 곳 저 곳에 뿌리셨다. "사무관이 똑똑하니 일이 너무 편해!!" 국장님의 단골멘트였다. 




음. 똑똑하다기 보단 갈아넣은 것이 맞다. 나처럼 놀기 좋아하고 게으른 사람(대학생 때는 술 취해서 중간고사를 안보기도 하고... 뭐 그랬다)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나는 처음부터 열과 성을 다하는 공무원이었다. 실수를 많이 해서 선배들로부터 타박을 받던 시절에도 '일을 대충한다'는 소리 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다. 미대 출신이라서 곁눈질을 당해서일까? 나이가 어린 걸 벌충하기 위함일까? 선배들은 모두들 야근을 했고. '일을 잘한다'는 것을 최고의 칭찬으로 여기며 사는 것 같았다. 개인의 삶의 희생은 당연한 것 같았다. 인사청문회 자료를 준비하다가 자녀의 출산을 놓치기도 했고, 본인이 크게 아프기도 했다. 여유가 있는 집은 조선족 아주머니가 전담해 아이들을 길러주셨다. 


기준이 높기도 했다. 대한민국 공무원 사회에는 내로라 하는 인재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연수원 6개월을 보내며, '시험이 어느 정도는 사람을 가르는 척도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할 만큼 우수하고 공무원으로서 자긍심이 높은 친구들을 많이 보았다. 위에서 내게 전화하셨던 국장님도 이런 각잡힌 공무원 후배들을 무수히 접했기 때문에, 일 잘하는 사람을 한 눈에 알아보는 실력이 있다. 그리고 그만큼 인정도 확실하다. 사기업에서처럼 물질적 보상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일 열심히 한다고 질투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들 격려하고 칭찬해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국회나 기재부나 규제개혁위원회에서 대답을 '한 번' 잘못해서 사업이 날아가거나 법률이나 시행령이 잘못된 방향으로 개정되면, 대학원 학과가 연구예산 부족으로 폐지 위기에 놓이거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불필요한 절차를 따르느라 불편을 겪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대변하고 있었다. 일반 시민, 예술인, 박물관 이용객, 패션 디자이너, 대학원, 연구소 등등. 내가 대변해야 할 사람들은 "제발 방어를 잘 해주세요! 저희 이거 정말 이렇게 되면 안 돼요!!!!"라는 말을 절박하게 하곤 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실수를 저질러서 그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 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월급값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금세 상사들의 눈에 띈다. 항상 일이 많은 자리에 불려 다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고려되지 않았다.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자리'가 다음 내 자리였다. 회식 자리에도 엄청 불러 다녔다. 나는 다행히 직장 동료들과 술 마시는 걸 그렇게나 좋아했다. 회식을 하고도 들어와서 일을 하다보니 연애에 신경 쓸 겨를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일을 하는 과정에서 미대 출신이나 어린 여자라고 무시당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아, 더 이상 어리지 않게 되었다. 


다들 내가 크게 될 거라고 했다. 후배든 동료든 선배든 기자든 이해관계자든. 


쟤는 뭐가 되든 될 거야! 




정작 나는 8년 간 큰 혼란을 느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지? 나라고 답을 아는 것이 아닌데... 
난 크게 되고 싶지 않은데? 난 그냥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사람들이 가리키는 방향과 내가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동료들은 내게 물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열심히 해?"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가... 그런가? 나...도 모르겠어." 



<대행사>의 고아인 역 이보영 배우 



얼마 전 넷플릭스를 통해 드라마 <대행사>를 보았다. 뻔한 스토리지만, 이보영과 손나은이 너무 예뻐서 단 숨에 끝까지 보았다 (그래... 이것도 대학원생이니 누릴 수 있는 사치다). 나도 고아인(이보영 분)처럼 큰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성공하고 싶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 그래서 대기업의 머슴처럼 살지 않고 내 목소리를 내며 살리라! 


나는 이보영 느낌이 나는 선배들도 종종 보았다. 그치만 나는 그들과 같은 에너지가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성과급을 잘 받거나, 승진 순번이 위로 올라가도 시큰둥했다.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워라벨+적당한 성과'를 무조건 선택했을 것이기 때문에. '야근+고성과'의 결과가 반갑지만은 않았다. 빨라봐야 동기들보다 1년 먼저 승진할테고. 그 이후로 국장 승진은 이런 저런 외부적 영향에 의해 결정될텐데. 여기서 기뻐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 '넌 장관이 될 것 같은데!'라고 하면 '인사청문회가 싫어요!'라는 답변이 바로 나왔다. 당시의 난, 애도 없고 남편도 없고 재산도 없고 위장전입도 없고. 뭐 크게 걸리는 게 있었겠냐만은 내 사생활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추궁당한다는 것이 그저 싫었다. 야근을 통해 난 이 사회에 줄 수 있는 만큼 주었으니, 내 사생활까지는 건드리지 마시오. 같은 방어적 기분이 들었다. 최근 홍정욱이 어릴 때 쓴 <7막7장>을 읽어보니, 이 또한 하층민의 마인드셋(;;)인 것 같기도 하다. 홍정욱 씨와 그가 선망했던 케네디 집안 사람들은 '큰 꿈'을 위해 프라이버시 침해 정도는 가벼운 '리스크 매니지먼트'의 대상으로 여기며 자라는 것 같다.


설령 인사청문회가 없다 하더라도, '공인'이 된다는 것, 나의 시간을 사회를 위해 쓰고 사회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필요하다면) 가면을 쓴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축복처럼 느껴질 일이 나에게는 부담이었다. 드라마에서 검찰 총장이 되기 위해 악을 쓰는 검사들, 광고 대행사 대표가 되기 위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카피라이터들을 보면 궁금한 마음이 든다. 월급 때문에? 사회적 지위 때문에? 몸을 쓰는 3D 일을 하는 것(보고서 쓰기, 카피 쓰기, 현장 뛰기)이 싫어서? 


요즘의 젊은 층 퇴사 물결도 아마 저 가치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난 나의 직장,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 우수한 동료들, 정당하게 내 공을 인정해주는 상사들, 내가 일을 잘 마무리했을 때 기뻐하던 사람들을 보는 것을 참 좋아했지만, 나의 직장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승진, 해외주재원, 먼 미래에 '공인'이 될 가능성)에 크게 끌리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끝없는 야근. 쉼 없는 삶. 책임감의 굴레에 지쳐가기 시작했다. 다들 과장이 되면 훨씬 나아질 거라고 했지만, 나는 그 전에 뇌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공부를 좀 더 하고 내 이름으로 된 글을 쓰고 싶었다. 




하필이면 내가 유학을 떠올리기 시작했을 때 전 부처 경쟁을 통한 유학 선발(연공서열과 무관하게 시험으로 유학 대상자를 뽑는 제도)이 폐지되다시피 했었다. 아직 우리 부처의 선배들은 나보다 5년 윗 기수가 슬슬 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공무원 유학이 아니라 자비 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면 '공무원 유학파견'에 비해 승진 소요연수가 '반'만 산입되므로 내 2-3년 후배들보다도 늦게 승진을 할 리스크를 감안해야 했다. 그래도 일단 이 '쉼 없는 삶'에서 당장 벗어나는 것이 목표였다. 



주변에서 누군가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래, 나라고 못할 것 있겠나'하는 생각에 접수를 시작했다. 




지금도 조금 이상야릇하단 생각이 든다. 


그 때의 난 왜 그렇게 유학을 원했는가? 


먼저, 미국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었다. 할 수 있는 언어가 영어밖에 없었을 뿐.... 풀브라이트 장학 재단은 미국이 설립한 것이므로 이 장학금을 받은 이상 미국에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 오나, 대학원에서 풀 펀딩을 받아서 대학원에 가나 다른 점이 전혀 없다. 근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난 공무원 유학 아니면 풀브라이트 이렇게 이분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과만 풀 펀딩이 있는 줄 알았는데, 둘러보니 문과도 풀 펀딩인 경우가 꽤 있었다. 


공부를 좋아하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선택할 수 있다면 언어 장벽이 있는 해외 대학원 대신, 국내 대학원을 선택하고 싶었다. 내가 자유로이 외국어를 구사하며 해외에서 학자로 성장하는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당연히 한국이 나의 주 무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내 대학원은 휴직사유가 되지 않았다. 주말에 수업을 들으며 서울대 일반대학원 법학 석사를 마쳤으나. 총 6년의 시간이 걸렸다! 야근과 논문을 병행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교수님들은 박사 과정에 들어오길 바라셨지만, '갈아넣는 삶'을 지속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가사휴직이나 질병휴직을 하고 진정한 '쉼'을 할 수도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지만. 미친 폭주 기관자처럼 야근을 하던 내게, 진짜 죽도록 아픈 것이 아닌데 질병휴직을 하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실 뇌진탕, 목디스크,  허리디스크가 있었기에 질병이 있긴 했지만...) 


아마, 쉬더라도 이기면서 쉬고 싶었나보다. 몇 년 간 학위를 하게 되면. 그래, 버리는 시간은 아니니까. 


그야말로 도피성 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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