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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un 17. 2023

미대생, 공시생이 되다.

 


경제학과: 미대생은 나가주세요. 


미시경제학 첫 수업에 들어갔을 때였다. 당시 윤은혜 하의실종 패션이 유행이라 나도 보일듯 말듯한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다녔다. 강의실에 갔더니 여자가 소수이고, 하의실종 옷차림도 나 뿐이었다. 혼자 민망해하며 엉거주춤 교실에 앉았다. 


출석을 부르던 교수님께서 "어? 미대에서 왜 경제학 수업을 듣지?" 저에게 질문을 하셨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란 나는 얼굴이 빨개져 대답을 했다. "아... 관심이 있어서요." 교수님께서는 "경제학 총론은 들었나? 경제수학은?"이라고 질문을 하셨다. "아... 선수과목이 있는지 몰랐습니다."라고 땅을 보며 대답했다. 교수님께서는 "자네한테 이 수업은 너무 어려울 것 같은데. 드랍하는 게 좋겠어."라고 말씀하셨다. 저는 "네... 조금 들어보고 도저히 어려우면 안 듣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개미 소리로 답했다.


당시 우린 미시경제학의 가장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선호'에 대한 내용을 공부하고 있었다. 정말 쉬운 내용인데도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미대생도 기본은 한다!'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 교과서를 읽고 또 읽고 그 다음 주에 첫 쪽지 시험을 봤다. 결과는 20점 만점의 10점. 그 수업은 잔인하게도 쪽지 시험을 매 주 보면서, 결과를 등수별로 강의실 앞에 붙여놓는 방식이었다. 1등부터 5등까지는 실명도 공개하였다. 10점을 받은 나는 아마 30등 쯤 했을 줄 알았는데, 밖에 나가서 명단을 보니 4등이었다. 


교수님은 그 날 또 갑작스레 내게 질문을 하셨다. "수학은 어디서 배웠지?" "아..고등학교 때 이과였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이 수업 들어도 좋겠다." 


꾹꾹 눌려 있던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나도 할 수 있구나.

당시 우리는 교수님이 직접 쓰신 교재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전부 수식과 그래프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이준구 교수님의 서술형 미시경제학 교재를 구입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2주일 동안 읽었다. 다 읽고 나니 우리 교수님의 교재가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액기스만 뽑아서, 엄밀한 언어로 쓰여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엇다. 그 교재는 후에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계속 꺼내서 보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특이한 말투로 재미 없게 강의를 하시지만, '굿윌헌팅'에 나오는 것 같은 천재 스타일의 교수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시카고 대학 경제학 박사시다. 그 때는 얼마나 대단한 학위인지 몰랐지만...). 이 분한테 최대한 많이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때부터는 퀴즈와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계속 1등을 했다. 나처럼 목숨 걸고 두 개의 교과서를 꼼꼼히 읽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미분을 하니 재미가 있었고,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알쏭달쏭한 철학보다 명료하게 다가왔다. 


그래도 행정고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주변에 비밀로 했다. 언제든지 얼굴 붉히지 않고 도망갈 수 있게 퇴로를 마련해둔 것이다. 그래도 3학년 1학기에 거둔 작은 승리들(토익 930점, 미시 경제학 1등)이 그 후 2년의 고된 공부를 버티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법학과: 자기 말만 들으면 합격한다는 교수님


미대생이 수업 듣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기는 행정법 교수님도 마찬가지였다. 출석을 부르다가 내 이름에서 잠시 멈추신 후 출석을 다 부르고 말씀하셨다. 


"독특한 전공에서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있군요. 제가 어떻게든 도움이 될지 모르니 왜 이 수업을 듣는지 이야기를 나누러 제 연구실에 언제든 찾아 오세요." 


교수님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 

미대에서는 학생들이 교수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 노력했고, 교수님 번역을 나누어 대신 해준다거나.... 오히려 부당한 노동을 당하는 것이 심심치 않게 있었기에, 교수님이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행정법 수업은 경제학보다 수월했다. 교수님의 유머 감각이 좋으셔서 다들 신나게 웃다보면 강의가 끝났다. 칠판 판서를 친절하게 해주시는 편이었고, 교과서가 딱 정해져있으니 그것만 계속 읽으면 되어 마음이 편했다. 미대에서는 영어로 된 논문을 수십 편 씩 인쇄해서 보고, 읽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편, 법학 서적은 훨씬 짜임새 있게 (일반인을 위한) 언어로 쓰여 있어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논문은 동료 학자가 읽을 것을 전제로 쓰여 있고, 교과서는 학생이 읽을 것을 전제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행정법도 경제학도, 미술이론보다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좋은 교과서가 여러 종 구비되어 있었다. 


그러다 행정법 교수님을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무슨 용기에서인지 "아... 제가 사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고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교수님께서는 "바로 옆이 제 연구실이니 들어오세요!"라고 문을 여셨다. "미리 예약을 안했는데, 제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나요?"라고 여쭤보니, "그럼! 교수의 시간은 학생들의 것인데."라고 말씀하셨다. 교수님의 그 흔쾌한 친절함. 포카리스웨트 같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기분이었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교수님 연구실에는 책이 2천 권쯤 있는 것 같았다. 책이 너무 많아서 바닥에 쌓여 있는 책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서 앉아야 했다. 이런 건 다 사비로 사시는 걸까... 저런 독일어 책들을 다 읽으실 수 있는 걸까. 


그 날,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갔던 걸로 기억한다. 


교수님: 그래, 공무원 시험을 생각한다고. 5급? 7급? 9급? 

나: 현재는 5급입니다. 그런데 아직 시험 과목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PSAT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고.... 

교수님: 그래. 포부가 좋네. 무슨 일이 하고 싶은 거지?

나: (당황해서) 아...저는 문화재를 좋아해서 해외 문화재 환수 일을 하고 싶습니다. 

교수님: 와! 진짜 멋지다!

나: 네??

교수님: 진짜 멋지다고! 미대에서 행정으로 가서 해외 문화재 환수를 위해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정말 멋지다! 공무원 면접이라면 바로 뽑을 것 같애! 

나: 아....네..... 그런데 너무 허무맹랑한 것 같기도 해서.... 

교수님: 허무맹랑하다니 무슨 소리야! 나는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행정부에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 학교 미대생들이 얼마나 훌륭한지도 잘 알고 있고. 정말 탁월한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이렇게 만나서 너무 반갑습니다. 하하하! 

나: 제가 다만 공부를 잘 못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본 적도 없고. 고시 공부라니 당치도 않은 것 같아요. 무언가를 열심히 해 본 일이 없어서.... 최근의 토익 공부 말고는.... 

교수님: 토익 700점은 넘었나? 

나: 네, 다행히 넘었습니다. 

교수님: 토익 때문에 시험도 못보는 친구들도 있어. 그것만도 대단한거야. 



교수님은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사법시험을 합격하신 분이었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똑똑한 사람들끼리 있다보면 고시 공부를 하는 것도 저렇게 쉽게 말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내가 이야기하는 대로 하면 합격할 수 있어. 일단 2년만 투자해봐.

나: 네????? 진짜요? 

교수님: 응. 진짜지. 



이쯤되선 교수님이 거의 약장수처럼 보였다. 고시는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이 아니던가? 저렇게 합격 방법이 자명하다면 왜 모두 합격하지 못하는거지? 



교수님: 응. 내가 말하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나도 좀 더 빨리 합격할 수 있었을텐데. 난 한 4-5년 공부했거든.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지. 

나: 네......

교수님: 자, 이 원칙만 지키면 돼. 

첫째, 휴학을 하지 않는다. 

둘째,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셋째, 학교 고시반에 들어간다. 매일 9시까지 고시반으로 출근을 해서 밤 10시에 퇴근을 한다. 

넷째, 하루에 가급적 10시간 공부시간을 확보한다. 

다섯째, 1시간에 10페이지 씩 읽는다.  

어때, 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니? 

나: 휴학을 하지 않는다구요? 고시생은 다 휴학을 하던데요?

교수님: 그래. 그게 흔한 패착이야. 사실 휴학해봐야 더 풀어지고 공부도 못해. 수업을 시험 과목으로 채워서 들으면 되지. 

나: 한 시간에 10페이지라고요? 너무 적은 것 아닌가요? 한 시간에 20페이지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교수님: 한 시간에 10페이지 씩 꾸준히 읽으면 대단한거다. 이 두꺼운 행정법 교과서, 하루에 100페이지 씩 읽으면 2주 만에 다 볼 수 있어. 그렇게 5권 읽으면 5 과목을 1회독 하는 거고. 그걸 네 번에서 다섯 번 정도 하면 합격할 수 있어. 그렇게 2년 정도 잡으면 되지. 

나: 정말요? 그것만 하면 돼요? '행시사랑' 카페에서 보면 다들 13시간씩 공부하던데.... 

교수님: 그거 다 믿지마. 내가 신림동에서 계속 생활해봐서 아는데, 담배 피면서 쉬는 시간 다 포함한거야. 공부하는 시간으로 자랑하는 거 만큼 미련한 게 없어. 하루에 8시간 30분만 빡세게 공부해도 진짜 피곤하고 힘들다. 10시간 하면 정말 힘들고. 그 이상은 꿈도 꾸지마. 







교수님의 말씀은 뭐랄까. '서울대 아빠들이 뭣도 모르고 하는 조언' 같았다. 대치동 상담 선생님들이 "어휴! 옛날 아저씨들 말 믿지 마세요. 교과서만 보면 된다구요? 요즘은 학력고사 세대 아니잖아요. 다 바뀌었어요! 정보력이 얼마나 중요하다구요!"라고 웃어 넘길 것 같은. 


그래도 이상하게 교수님의 말씀에 끌렸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행시사랑' 카페의 사람들은 기준이 너무 높아보였다. 15시간씩 공부를 한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홍대에는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고시반이 없었다. 연대에 있는 스터디모임 몇 곳에 끼워달라고 쪽지를 보냈더니 싫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 교수님이 확고하게 "나만 따라와!"라며 방향성을 제시해주시니 그저 믿고 따라가고픈 심정이었다. 


교수님: 어때. 내가 지도해주는 대로 할 수 있겠니? 대신 나는 네가 질문하는 모든 것에 대답해주도록 하지. 1주일에 한 번 정도 미팅을 하면 어떨까? 

나: 네. 한 번 해보겠습니다. 다만, 제가 워낙 게을러서 시간 관리를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교수님: 아! 그건 문제 없지. (뒤적뒤적) 이 시간표 보이니? 오늘 어떤 선배가 만들어서 제출하고 간거야. 

나: 아, 네. 이 정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 그래. 다음 미팅 때까지 숙제는 이 시간표 만드는거야. 다음 주에 보자. 



그 시간표는 아주 간략했다. 

너무 간단해서, 12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복기할 수 있을 정도다. 

여기에 탬플릿을 공유한다.



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날짜 칸, 가용 공부시간, 페이지 수를 비워두고 여러 장을 출력한 다음 손으로 날짜를 기입합니다. 

2. 공부에 할애할 수 없는 시간들(수업시간, 다른 업무시간, 미팅시간 등)에 색칠합니다. 

3.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남은 빈 칸을 세서 '가용 공부시간'을 적습니다. 

4. 1시간에 10p로 계산해서 하루에 볼 수 있는 '페이지 수'를 적습니다. 

5. 일주일 합산 페이지 수를 토대로 목표를 세워서 계획표 아래에 적습니다. 

6. 주말은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데, 하더라도 5시간 정도만 가벼운 마음으로 합니다. 

7. 매일 스탑워치를 사용합니다. 공부하는 시간만 딱 정확하게 잽니다. 50분 공부하고 10분 쉬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용 공부시간'을 전부 공부에 쓰지는 못합니다. '분' 단위로 매일 '실제 공부시간'을 정확히 기입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 방법을 2년 간 꼬박 지켰다. 

그리고 더.럽.게. 힘들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 책상에 잠자코 앉아 있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3개월 쯤 하니 몸 여기저기가 고장나기 시작했다. 의자를 편한 것으로 바꾸고, 매일 저녁 '클라우디아 쉬퍼' 하체 운동을 했다. 상체 운동은...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더군요. 



하지만 저 주간계획표 덕분에, 아무리 무너져도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다. 새 계획표를 뽑아서 예쁜 형광팬으로 칠해서 책상 위에 붙여 놓으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한 주가 내 손 위에 선물로 놓인 기분이었다. 한 시간을 오롯이 점심과 저녁에 투자할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어쩌다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고 두 세시간 날리고 오면, 아린 마음으로 5:30분이라고 '실제 공부시간'을 적어야 했다. 



매일 밤 10시. 벽에 붙어 있는 주간계획표에 사각거리며 실제 공부시간을 쓰는 시간.

오늘은 조금 아쉬웠네. 내일은 조금 더 잘하자.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다짐. 


그 때의 그 마음을 지금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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