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나는 이 문구를 보면 주눅이 든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니, 잠시 쉬어가도, 엉금엉금 기어가도 괜찮다는 위로의 말로 고안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너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맞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니?'라고 채근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난 셈이 얕아서 5일 이후의 미래도 잘 내다보지 못한다.
그래서 먼 미래를 생각하면 머리가 하얘진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데,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잘못되었다면 지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틀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어디를 보아야하지? 누구에게 물어봐야하지? 뭘 더 배워야 하지? 뭘 더 읽어야 하지?
어떤 방향도 내 인생을 걸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았고, 내가 노력을 한다해도 실현 가능성이 높아보이지 않았다. 방향의 부재는 의욕 저하로 이어졌다. 학창 시절의 나는 내 미래가 머릿 속에 그려지지 않아서 항상 괴로워했었다. 그러다가 시한에 받쳐서 주변 사람들의 말 한 두 마디에 이끌려, 또는 내 변덕에 따라 엉뚱한 결정을 하곤 했다. 엉뚱한 고등학교를 지망하고 엉뚱한 대학 전공을 지원하고 (호텔경영학과, 미대, 자연계열, 약학대학 등...) 엉뚱하게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어디로 나아가는지 알지 못한 채, 망망대해를 항해하다보면 새하얀 벽 앞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다. 손을 푹 넣으면 퍼석한 소리가 나는 두터운 벽. 자괴감과 두려움과 죄책감이 밀려온다. 이래서 '아프니까 청춘'인걸까?
'청춘'의 시기를 지나 삼십 중반을 넘어선 오늘날까지도 난 '방향'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보았다.
스탠포드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한 연설인데, 벌써 15년이 지난 영상이다.
점을 연결한다.
Connecting the dots
이것이야말로 나의 방향무감각을 가장 아름답게 설명해주는 문구였다. 세상에서 가장 성공했다는 사람도 대학 시절에는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흐르게 될지를 몰랐구나. 헤매면서 살다보면, 언젠가 뒤를 돌아보면서 '그래, 그 때의 노력은 이런 의미가 있었네.'라고 매 순간에 의미부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구나.
어차피 시대는 우리의 사고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 유튜버가 근사한 직업이 될 줄, 웹툰작가나 웹소설 작가가 등단작가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지망생층을 갖추게 될 줄, AI가 코딩을 하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누가 알고 있었을까.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고 내 적성에 맞추어 올바른 방향을 찾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먼 미래를 내다보기보다 당장 내 눈앞의 아이디어를 빠르게 실행(execute)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인생은 방향이 아니라 속도일지도 모른다고.
일정한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려면 내가 나에게 부여한 과업을 수행해가는 성실함과 인내심, 그리고 장애물이나 날씨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일정한 균형감각을 갖추어야 한다. 나 자신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서도 안되고,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나아가는지 의식할 필요도 없고, 내 몸과 마음이 편안한 속도에 맞게 꾸준히 페달을 밟으면 된다.
그렇게 흔들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 있으리라.
이 책에는 무수히 흔들리는 내 삶의 순간들이 담겨 있다.
매일 흔들리고 깨지고 내 자신의 부족함을 목놓아 슬퍼하면서.
영어 한 단어를 외우고, 문장 한 줄을 쓰고, 논문 한 편을 읽고, 언젠가 시장에 내놓을 제품을 구상해보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 날들이 언젠가 나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해본다.
불안해도, 그냥 믿어야 한다.
나의 일천한 글들이 나와 같이 불안한 영혼들에게,
불안해도 한 걸음씩 나아가는 용기를 내보는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