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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ul 09. 2023

스탈린은 한국전쟁에서 무엇을 얻으려 했을 까?

한국전쟁의 미스테리; 휴전협정 70 주년

https://kiss.kstudy.com/Detail/Ar?key=3370840

"1953년 3월 5일, 소련을 장기간 통치한 지배자, 요지프 스탈린의 사망이 국제정치적 상황, 더 특정하게는 한국 전쟁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케네츠 왈츠를 비롯한 신현실주의 학자들은 국내 요인과 국제 요인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국내의 정치적 요소들이 국제 체제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적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서방국가들과 이전 공산권 국가들에서 새로 공개된 서고의 문서 자료들과 1차 증언에 기반한 본고는 일국 안에서 일어난 온전히 국내적인 변화가 다른 국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나아가 국제 체제 전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입증하려 한다. 유럽 대륙에서 곧 미-소 간 전쟁이 곧 임박 했으며 미국의 군사적 역량을 한반도에 묶어 두는 것이 유럽 대륙에서 곧 발발할 전쟁에서 소련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도록 한다고 믿은 스탈린은 중공 지도자들과 북한 지도자들이 한국전쟁을 지속하는 작전에 대해 우려를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지속하고자 했다. 1953년 5월에 이르면소련 내부의 공산당 지도자들 모두가 한국에서 지속되는 전쟁을 중단해야만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스탈린의 사망은 소련의 고위 지도자들로 하여금 일련의 정치 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것이었다. 소련의 외교 정책의 전면적인 선회와 그로 인한 중대한 국제 체제의 변화는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의 고위 정책 결정자들에 의해 가능했다. 1953년 봄과 초여름, 특히 소련의 지도자들은 이제 한반도에서 스탈린이 고집한 ‘잘못된 정책’을 중단할 수 있었고 동시에 신속한 사태 종결을 추구했다. 1953년 봄과 초여름 소련의 정책은 얼마전 스탈린 지배 하에 견지되었던 정책 기조와 비교해 급격히 변화했다. 따라서 휴전 협정은 7월 26일 체결될 수 있었다.

What are the implications of the death of the long-time ruler of the Soviet Union, Iosif Stalin, on 5 March 1953 to the broader international context and especially the Korean War? Regarding internal-external linkage in international politics, Kenneth Waltz and other structural realists have argued that the study of domestic politics is of little relevance to an understanding of system-level change. Based on the newly declassified archival materials and firsthand accounts from Western and former Communist countries, the author tries to determine whether purely domestic changes in one state can indeed have important effects not only on other countries, but on the whole international system. Stalin whose conviction had made him believe that a war would soon break out in Europe and attenuating U.S. military capabilities in Korea would serve as a diversion to help USSR win in Europe insisted that the Korean War continues in despite the misgivings of Chinese and North Korean leaders. By May 1953, no one in the Soviet leadership doubted any longer that the time had come for a settlement in Korea. Thus Stalin’s death opened a way for a group of high-ranking political leaders to carry out a flurry of political reforms. The impetus for far-reaching changes in Soviet foreign policy thus came mainly from above. Particularly Soviet leaders could now move away from long-entrenched position of Stalin’s “mistaken policy” in Korea towards the rapid cessation of the war in the spring and early summer of 1953. Soviet policy in the spring and early summer of 1953 changed almost completely from what it had been only a short time earlier under Stalin. Thus the cease-fire negotiations bore fruits in the armistice signed on 26 July."(Mark Kramer)


멕아터는 그의 화려하고 영웅적인 경력의 군인으로서 마지막 국회 연설을 "노병은 죽지 않는 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유명한 말로 끝 맺었다. 미군 군가의 가사에서 인용한 문구이다. 그는 미국정부의 정책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미국회와 타국 외교관들에게 표명 했다는 이유로 직위 해제 되어 귀국 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구절 보다 연설 내용에 경청 해야 한다고 생각 한다. 그는 중공군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했다. 그리고 중공과의 전면전을 하더라도 인공을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유일한 친미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그러나 투루만정부는 아시아 전선에 몰두하면 유롭전선에서 실패 할 수 있기 때문에 38선 이남의 남한 고유의 영토를 회복하는 선 에서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 했다. 맥아터는 이날 연설에서 "아시아에서 패배하면 유롭에서도 승리 할 수 없다"고  종래의 주장을 반복 했다.


미국은 유롭과 아시아의 중간에 있다. 그러나 미국은 항상 아시아 보다는 유롭을 중시 했다. 한반도의 분단도 어떤면에서는 미국의 유롭 편향 정책에서 비롯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차 데전 중 아시아에서의 전쟁 즉 태평양 전쟁은 미국이 전적으로 수행 했다. 한반도와 만주의 일본 관동군도 마땅히 미국이 해결 했어야 했었다. 그러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미국이 지나치게 아시아에 집중하면 유롭전선이 부실해 질것을 염려 했다. 특히 그는 독일 항복 이후 유롭에서 소련 세력 확장을 견제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스탈린에게 일본 관동군이 주둔하고 있는 만주와 한반도 공격을 부탁 했다. 소련군을 아시아에 보내서 유럽지역의 활동을 약화 시키고 미국의 아시아 전선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였다. 


놀라웁게도 이러한 셈법은 스탈린도 하고 있었다 는 것이 최근들어 속속 밝혀 지고 있다. 한국전쟁을 복기 해 보면 스탈린은 전쟁 초 부터 사망 직전 까지 미국을 한국전쟁에 묶어 놓고 유롭에서 세력 확장을 도모 하려 했다는 정황을 발견 할 수 있다.


https://brunch.co.kr/@jamessunohn/159

 

소련은 미국이 유엔군 한국전쟁 파병안을  논의 하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안전보장 이사회 이사국인 소련은 거부권을 행사하여 유엔군 파병안을 부결시킬 수 있었 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엔군 파병안이 가결되어 유엔군이 파병되면 인민군에게 불리한 데도 그것이 통과 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 천만다행으로....유엔주재 소련대사가 불참하여....가결되었다."는 식으로 이해 되었다. 소련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좀더 의심 했어야 될 문제였다. 


유엔주재 소련대사 야콥 말리크는 1950년1월 부터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었다. 유엔은 안전보징이사회 상임 이사국으로 중공 대신에 중화민국(타이완)을 정한데 대한 항의 였다. 말리크는 유엔군 파병 문제가 상정된 안보리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스탈린에게 보고 했으나 스탈린은 그를 말렸다. 왜 그랬을 까?


1950년8월27일 스탈린은 체코스로바키아 주재 소련 대사에게 편지를 한장을 주고 체코스로바키아 대통령 클래멘트 고트발트에게 전하라고 했다. 편지 내용을 구두로 전하되 그가 요구 하면 필사하여 주라고 당부 했다. 아마 크트발트 체코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유엔군 파병을 저지하지 않았는 가? 하고 따져 물었을 것이다. 당시에 체코는 공산진영이었고 물론 인공과 같은 편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가 인공에 의해서 통일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장이 전해질 무렵 1950년8월 말 경에는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은 이미 패색이 짙었다. 미군, 유엔군, 국군이 완벽하게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하고 있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인민군의 공군과 해군이 무척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미군은 한반도 전역에 큰 저항 없이 인민군의 보급로 차단을 위한 폭격을 가 할 수 있었고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병력과 군수물자를 부산을 통해 낙동강 전선에 투입 할 수 있었다. 낙동강 전선은 북의 동서와 서쪽의 납북 육지만 방어 하면 되었다. 동쪽과 남쪽의 바다는 인민군의 저항이 없었다. 그래서 8월15일 적화통일 완수를 장담했던 김일성은 군수물자, 식량, 무기, 병력의 부족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9월중순에 괴멸 되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 했지만 공군과 해군 지원을 하지 않았다. 유엔군 파견을 방치해서 미군의 개입이 확실 함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에게 탱크를 앞세운 육군만으로 김일성이 적화 통일을 완수 하리라고 그는 믿었을 까? 


스탈린이 허락하지 않았으면 김일성은 남침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가능하게 한 최종적인 원흉은 스탈린이다. 그러나 전쟁의 목적은 김일성과 스탈린이 서로 달랐다. 전자는 적화통일이었고 후자는 미국의 유롭 영향력 약화 였다고 생각 한다. 그는 미국이 한국전쟁에 집중하여 유롭을 소홀히 하는 동안 자신은 유롭에서 세력을 팽창 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스탈린은 한국에 전쟁 판을 벌려 놓고 미군 개입을 방치 했지만 미군과 직접 충돌은 철저하게 피했다. 인민군이 미 공군과 해군에게 폭격 당하든 말든 이에 대항 할 만한 공군과 해군 지원을 하지 않았다. 물론 적화통일의 성공 여부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공의 38선 이북 영토는 보호 하려고 최선을 다 했다. 그는 중공군 개입을 전쟁 초 부터 확실하게 다져 놓았다. 신생 중공에게 군사 경제 원조를 약속하고 미군이 38이북으로 진격할 경우 중공군이 개입 할 것을 약속 받았다. 김일성에게도 이것을 직접 확인하라고 했다. 


전쟁 발발 일년 만에 양 쪽이 대강 본래의 38선 이남과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자 휴전 회담이 시작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휴전 합의를 이런 저린 이유로 방해 했다. 그는 미군이 한반도에 묶여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1953년 3월5일 스탈린이 사망 했다. 새로 구성된 소련 정부는 휴전 명령을 내렸다. 휴전회담은 급속하게 진전 되었다. 1953년7월27일 휴전 협정이 맺어 졌다. 결국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그의 소련 유롭 팽창 욕망은 5백만명의 사상자와 막대한 재산 피해를 유발 했다. 그러나 그 댓가는 원상 복귀와 불과 했다.  미국의 마샬 정책은 유롭을 부흥시켜 공산주의 팽창을 막았고, 약 40년 후 소련은 붕괴되어 동구의 소련 위성국가도 소멸 되었다. 투루만 정부는 스탈린의 음흉한 전략을 알았을 까? 아무튼 투루만 정부는 아시아 전선에서 끝장을 보려는 맥아터를 소환하여 한국전쟁을 38선 이남 영토 회복에서 종식 시키고 유롭 전선 강화에 집중하려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푸틴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의 전쟁 목표는 구 소련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나토와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인도-태평양 재해권을 놓고 미국와 경쟁하고 있다. 여기다 타이완과 한국 문제 까지 합세 하여 미국은 유롭과 아시아 양쪽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도전을 받고 있다. 과연 미국이 예전 처럼 양쪽을 다 감당 할 수 있을 까? 


Mark Kramer is the Director of the Cold War Studies Project at the Davis Center. He is the author and/or editor of several books and has written nearly 200 articles on a variety of topics. He has worked extensively in newly opened archives in all the former Warsaw Pact countries and several Western countries. He edits both the Harvard Cold War Studies Book Series and the peer-reviewed Journal of Cold War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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