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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ul 08. 2020

청, 조선, 일본, 유럽의 변화와 청과 조선의 멸망

04. 1870-1912년 청의멸만과 일본의 조선강점


1840년에 시작되어 1860년에 끝난 아편전쟁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구미 중심으로 바뀌는 계기였다. 2000여 년 동안 동양인이 굳게 믿고 있던 유교를 바탕으로 한 사고와 제도가 계몽시대에서 비롯된 그리스도교 중심의 근대사상으로 전환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동북아에서 이러한 시대의 전환을 확실하게 파악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청은 오랫동안 익숙한 제도에 안주하여 부패한 나머지 개혁의 필요성은 알았어도 불가능했고 조선은 사대를 버리지 못하고 청나라만 처다 보고 있으면서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부패의 늪에 빠졌다. 마치 목적지가 정해진 열차처럼 아편전쟁 이후의 동북아는 중국 대신 일본이 주도하는 세상으로 바뀌어져 간다.


고분고분할 줄 알았던 며느리는 뜻밖에 욕심 많은 간악한 여인이었다. 1873년, 고종이 20세 되던 해에 민비는 반 대원군 세력을 총동원하여 대원군 섭정을 종식하고 고종 친정을 시작했다. 흥선 대원군은 서원 철폐 등으로 수구 보수세력인 유학자들의 원한을 샀다. 최익현을 비롯한 이들의 상소로 10년이 조금 모자라는 흥선 대원군의 섭정은 막을 내렸다. 60년 동안 계속된 안동 김 씨 세도정치가 끝난 지 10여 년 만에 민 씨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민비와 민 씨 가문 척족들의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는 세도정치 때보다 훨씬 더 심했다. 백성들의 생활은 토탄에 빠졌다. 백성들은 흥선 대원군 섭정 시절을 그리워 했다. 대중들의 지지를 알고 있었던 흥선은 호시탐탐 민비를 제치고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노렸다. 민 씨가 권력을 독식하자 흥선을 내 쫒았던 수구 보수세력은 친 대원군 세력이 되었다. 안동 김 씨 김 병학과 대원군이 한편이 된 것은 정치가 예나 지금이나 무상함을 알 수 있다. 고종이 나라 문을 열자 쇄국을 주장했던 대원군과 보수 세력은 더욱 돈독 해졌다. 이들이 소위 위정척사파 이다. 옳은 것(정)은 유교적 도덕 윤리이고 외국에서 들어온 상행위, 공업 등은 "사"이니 배척해야 한다는 당파를 뜻한다. 


조선은 원칙적으로 일본과 통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산에 왜관을 설치하여 대마도 사람들과 무역을 허용하였다. 따라서 일본 쪽의 창구는 대마도였고 조선 쪽의 창구는 부산 왜관이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조선이 상국, 일본이 하국으로 통했다. 왜냐면 조선은 청과 정식 조공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조선의 왕은 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았던 반면에 일본은 청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격미달 국가였다. 이것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였다. 말하자면 청이 1 등국, 조선이 2 등국, 일본이 3 등국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1867년 11월 9일 대정 봉환 이후로는 이야기가 달랐다. 막부시대가 막을 내리고 일본 천황이 나라를 다스리게 된 것이었다. 천왕이 아니고 천황이었다. 청나라의 황제와 대등한 관계였다.  일본은 대원군에게 대등한 외교 절차와 통상을 요구했다. 청나라가 세상의 제일이라는 사고에 젖어 있는 그에게는 기상천외의 이야기였다. 흥선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무렵(메이지 유신 초기) 일본 정계에서는 당장 조선을 무력으로 정벌하자는 정한론의 강경파와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떼어 놓고 일본이 힘을 기른 후에 정복하자는 온건파로 나뉘어 논쟁이 심했으나 온건파가 집권하게 된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힘만 생기면 항상 한반도를 수중에 넣으려는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하기 전에 청나라와 조선 통상문제를 협상했다.  조선의 종주국이 청나라이기 때문에 일본뿐만 아니고 구미국가들도 대부분이 청에게 먼저 상의했다. 한편 청나라는 국토의 이곳저곳을 유럽 국가들에게 떼어 주고 조공국들이 이들의 식민지가 되어 가는 판이어서 조선도 자기네 영향권에서 벗어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침공하면 도저히 일본과 전쟁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청의 이홍장은 조선이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맺으면 서로 견제하여 청과 조선의 관계가 지속될 것으로 판단하고 조선에 적극적으로 나라를 개방할 것을 권유했다. 일본은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을 것이니 전여 관여하지 말라고 요구하자 이홍장은 일본이 무력을 사용하지 말 것을 다짐받고 조선과의 통상에 동의했다.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대를 끌고 와서 함포사격으로 위력을 과시하여 일본과 통상을 성사시킨 방법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했다. 일본은 함대를 끌고 와서 부산, 인천에서 함포사격을 하여 조선사람들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고 군대가 부산시가지를 행진하여 그 위용을 자랑했다. 이를 운요호 사건이라고 한다. 1877년 2 월, 일본군대가 회담장소를 포위한 가운데 조선은  일본과 병자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통상 조약이었다. 일본의 권리만 명기되고 조선의 권리에 대한 조항이 하나도 없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선은 근대식 통상조약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었다. 관세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문서에는 일본 상품이 무관세로 조선에 들어온다고 적혀 있었는 데도 조선 관리 중에 아무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1880년대의 조선 정국

고종은 청, 일본,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어 외국 문물을 배워오게 하고 새로운 지식을 정책에 반영하려고 했다. 개혁 바람이 불자 조선 정계는 친청 온건 개화파(사대당), 친일 급진 개화파(개화당) 그리고 위정척사파로 나뉘어 졌다. 친청 온건 개화파는 청나라 이홍장의 양무 개혁과 같이 유교의 전통과 제도를 유지하고 군사, 과학 등 유럽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급진 개화파는 반청 친일이었다. 종주국인 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배워 빠른 시일 내에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조선이 낙후한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에 종속되어 이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위정척사 파는 전통적인 유학자들이었다. 오직 유교사상만이 옳은 것이고 서양의 문물은 사악 것들이기 때문에 옳은 것을 위하고 사악한 것을 배척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파였다. 돈을 탐하는 상업과 공업은 사악한 일들이니 장려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 참으로 한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를 개방하려는 고종과 민비를 반대했고 쇄국으로 사악한 외적을 물리첬던 흥선 대원군을 지지했다. 이들은 백성들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는 정파였다.


1882년 임오군란; 대원군의 쿠데타, 대원군 텐진 구금, 청의 조선 통치

조선은 망하기 전에 청나라가 다 스리 던 시기, 러시아가 좌지우지하던 시기를 거치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다. 임오군란은 청이 직접 조선을 다스리게 되는 계기였다. 대원군은 섭정 시절에 군제를 개혁하여 직업군인들에 대한 대우도 썩 좋아졌다. 말하자면 대원군의 군대라고 할 수 있었다. 섭정이 끝나고 고종 친정이 시작되자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만들었다. 일본 교관이 훈련시키는 일본식 군대였다. 이들은 민비와 고종이 선호했던 군대였다. 양반 자제들이 별기군으로 뽑혔다. 구식군대에 비할 수 없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 반면에 구식군대는 푸대접했다. 군량미 조달을 책임지고 있던 민비의 오라비 민겸호는 구식군대에 지급될 군량미를 떼어먹었다. 무려 13개월 동안 월급을 지급하지 않았다. 13개월 만에 지급된 한 달 치 봉급은 썩은 쌀겨와 모래가 섞인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쓰레기 였다. 해당 관청에 다시 지불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하고 오히려 이들을 체벌했다. 이에 반발하여 구식군대는 반란을 일으켰다. 민겸호의 집을 불태우는 등 일이 커지자 흥선 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민비 세력 타도를 지시했다. 기근이 심해서 백성들은 민 씨 일족의 가렴주구에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많은 백성들이 반란에 참여했다. 그들은 고종과 민비 대신 대원군을 원 했다. 


민 씨 척족을 처단한 반란군은 민비를 붙잡아 죽이려고 궁중을 이 잡듯이 뒤졌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그는 이미 궁중을 빠저 나가서 충주 장호원에 있는 충주 목사  민응식의 집에 숨어 이었다. 한편 고종은 자신과 민비를 배척하고 대원군을 지지하는 백성들을 무시하고는 사태를 수습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대원군을 섭정으로 불러들였다. 다시 권좌로 복귀한 흥선 대원군은 송장 없는 민비 장례식을 치루 었다. 개화파들을 모두 관직에서 몰아내고 위정척사파들을 불러들였다. 청나라의 이홍장은 조선이 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조선을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영선사로 청에 와있던 김윤식과 접촉하여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 보내어 반란군을 진압 할 것을 제안 했다. 친 민비 파였던 그로서는 민비와 고종을 복권시킬 좋은 기회였다. 조선에 들어온 청군은 대원군을 체포하여 텐진에 자택 구금시켰다. 흥선 대원군의 섭정은 33일 만에 끝났다. 


이후 청나라는 조선 조정에 뮐렌 드 로프와 마건충을 참여시켜 직접적인 내정 간섭을 했다. 더구나 용산에 청 나라 군대가 상주하여 조선은 사실상 청나라가 직법 지배하게 된다. 고종과 민비는 친청 온건 개화파를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에 합세한 백성들이 일본 영사관에 불을 지르고 일본인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으나 일본은 청이 대원군을 제압하고 조선을 청이 직접 지배하는 것을 무력으로 막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아직 청과 전쟁을 해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다. 따라서 친일 급진 개화파는 점점 정계에서 소외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후쿠자와 유키치와 개화파


조선의 개화파 인사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들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의 스승이며 후원자였다. 이들은 모두 유키치가 설립한 게이오 의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일본 사람들의 영웅이다. 일본돈 만 원권에 그의 초상화가 인쇄돼 있다. 그는 일본의 계몽사상가이다. 개화당 인사들은 그와 수시로 연락했고 그의 조언을 받았다. 유키치는 조선이 낙후된 원인은 조선이 장구한 세월 동안 중국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들도 공감했다. 종속 관계를 끝내는 길은 조선이 일본처럼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이 청에게서 멀어질수록 일본이 조선을 범하기가 용이 해 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 개화당이 집권하도록 도왔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민비와 사대당의 개화당 축출 작업이 진행되어 급기야는 중앙 관직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위기에 봉착한 개화당은 유키치와 상의하고 일본 영사관과 모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김옥균은 30대, 박영효, 서관범과 서재필은 겨우 20대 청년이었다. 거사 계획이 엉성했고 일본 영사관을 지나치게 믿었다. 더구나 백성들은 개화가 무엇인지도 잘 이해하지 못했고 개화를 원치도 않았다. 더구나 반일 감정이 지배적이었다. 청나라 장수 위안스카이(원 세계)가 이끄는 청군은 3일 만에 반란군을 제압했다. 철석 같이 믿던 일본군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했다. 


역모를 했던 개화당 인사들 본인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가족들은 삼족이 모두 죽어야 했다. 그들은 갑오경장 무렵까지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청의 위안스카이(원세계)는  청일전쟁 때까지 약 10년간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감국으로 군림했다. 고종은 왕이었지만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청은 조공국으로 약소국을 관리하던 전통적인 외교 관계에서 벗어나 서양식 식민지 지배를 흉내 내고 있었다. 


정변의 공모자는 일본이었으나 청이 개화파를 제압하는 데 도전하지 않았다. 조선을 놓고 한 판 승부를 벌릴 위기였으나 일본이 꼬리를 내려 청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1885년 5월 청의 이홍장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텐진으로 불러서 텐진 조약을 체결했다. 양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는 서로 통고하기로 약속했다. 이때 텐진에는 대원군이 구금되어 있었다. 


이 사건의 역사적 의의는 개화당의 실패보다는 조선이 자기 나라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 한 사건으로 기억되어 야 한다. 형식 상으로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후에도 당분간 존재했지만 사실상 갑신정변을 기점으로 청의 강점기-러시아의 섭정기를 거처 일본의 강점으로 연결된다. 조선 주권 상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884-1894년, 10년 동안은 사대당과 민 씨의 세상이었다. 백성들은 청나라의 착취와 민 씨 척족의 부정부패에 따른 가렴주구에 시달려야 했다. 


1894년,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


중앙정부 관리들의 집 앞에는 뇌물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들은 뇌물을 주고 벼슬을 샀다. 그리고 관직을 얻으면 임지에서 온갖 방법을 총동원하여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갈취했다. 중앙관리들에게 상납하는 것은 필수였다. 그래야 노른자위 관직이 유지되거나 영전이 가능했다. 본전은 기본이었다. 나머지가 자기 몫이었다. 당시에 조선 양반 어머니들의 꿈은 자기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호남지방의 원님이 되는 것이었다. 비옥한 논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는 지방이어서 관리들이 축재하기에 가장 좋은 지방이었다. 부안 고부 군수 조병갑은 당시 조선의 일류 재간꾼이었다. 한양 고위층 관리들에게 잘 보여 해산물과 농산물이 풍부한 고부는 전국에서 가장 좋은 지방관직이었다.


천주교는 서학이라고도 했고 천도교의 다른 이름은 동학이다. 둘 다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인도주의와 평등주의를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양반들의 착취에 살 수가 없었던 백성들 간에 동학은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갔다. 전봉준은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였다. 말하자면 고부 군의 동학교 지도자라고 보면 된다. 조선 제일의 탐관오리와 정의의 상징인 동학교의 선봉장이 고부에서 충돌했다. 마치 두 개의 부싯돌이 비벼서 불이 댕겨지듯 동학란이 일어났다.  오합지졸이었던 관군은 어이없이 동학 농민군에게 패했다. 전라도의 도성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함락되었다.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청했다. 청나라 정부는 일본에게 조선 파병을 통고하고 조선에 군대를 보냈으나,  일본은 텐진 조약을 위반했다고 꼬투리를 잡아서 자국 군대도 조선에 파병했다. 양쪽 군대 가 조선에서 충돌했다. 청일전쟁이었다. 


일본은 재 빨리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경복궁을 점령했다. 고종을 협박하여 대원군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대원군을 형식상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고 군국기무처를 조직하여 개혁을 하게 했다. 그동안 망명 생활을 했던  개화파 인사들이 속속 들어와서 개혁에 참여했다.  일본의 목적은 조선과 청의 분리였다. 이를 갑오경장이라고 한다. 


한편 동학군은 호남지방에 각 고을마다 집강소를 설치하고 갑오경장과 대동소이한 개혁을 시행했다. 한양에서는 일본이 주도하는 개혁, 호남지방에서는 조선 백성들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혁명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고종에게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조선이 조달할 것을 요구했고 고종은 할 수 없이 이를 수락했다. 조선 백성들의 피해는 막심했다. 10년 동안 영화를 누렸던 위안스카이는 전쟁 초기에 본국으로 도망쳤다. 청은 일본의 상대가 아니었다. 일본은 한 번도 전투에서 패하지 않고 완승했다. 이홍장의 양무운동은 완전히 실패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명쾌한 승리였다. 


조선 정부군과 일본군은 우수한 화력과 잘 훈련된 군대로 몇 배가 넘는 조선 농민군을 재압했다. 동학군은 일본의 영원한 도망자가 되었고 민족종교인 천도교는 일본의 탄압으로 교세가 확장되지 못했다.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은 각각 무게 있는 제목을 가진 사건들이었으나 단 일 년 1984년에 모두 같이 일어난 서로 깊이 관련된 사건이었다. 참으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청의 10년 동안의 조선통치가 끝나는 해이기도 하다. 


시모노세키 조약, 삼국간섭, 민비의 친러 정책

중국의 발해만은 베이징으로 통한다. 한반도의 인천이 서울로 통하듯이 발해만의 텐진은 중국의 급소이다.  일본이 요동반도를 점령하고 발해만을 차지하자 이홍장은 협상을 요청했다. 사실상의 항복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홍장을 시모노 세키로 불렀다. 1895년 4월 17일, 이곳에서 맺어진 조약의 제1조는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확인한다."였다. 조선은 중국의 종속국이 아님을 천명했으나 사실은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하든 청이 관여할 수 없음을 확인한 조항이었다. 일본은 숙원이었던 청과 조선의 분리에 성공했다. 일본은 요동반도, 타이완, 펑우제도를 양도받았다. 임진왜란 때 실패한 대륙 진출이 목전에 보이는 순간이었다. 조선과 중국 대륙의 점령은 그들의 야망이었다. 그러나 이 꿈이 겨우 일주일도 못 갈 줄이야 누가 알았을 까?


도쿄 주재 러시아 대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일과 프랑스 대사를 대동하고 일본 정부를 방문하여 요동반도를 청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영국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 최 강국 러시아와의 전쟁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일본은 6일 만에 눈물을 머금꼬 요동반도를 청에게 돌려주었다. 이를 삼국 간섭이라고 한다.


영악한 민비는 일본이 러시아에게 굴복하는 것을 보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견제한다. 친러 내각을 구성하고 친일 개화파 숙청에 나섰다. 자신의 생명을 재촉하는 악수였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개화파는 민비를 살해할 음모를 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막 조선을 손아귀에 넣었다고 기뻐하는 순간에 민비라는 방해 꾼을 만난 격이 되었다. 개화파와 일본에게는 민비가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영원한 민비의 정적 대원군에게는 호재였다. 1895년 10월 8일 민비는 이들의 공모로 살해되었다. 그리고 잠시 친일 개화파가 득세했다. 


아관파천(1896.2-1897.2); 친러파의 쿠데타

민비가 없는 경복궁은 온통 친일 개화파와 일본영사관 사람들뿐이었다. 고종은 왕비를 살해한 범인들에 둘러 싸여 있었다. 이놈들이 자기를 언제 죽일 찌 모르는 형국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렸다. 궁중에서 주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이 자물쇠로 잠근 식기에 음식을 보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열어서 식사를 했다. 권력을 탐내는 신하들에게는 기회였다. 친미파 정객들이 고종을 미국 영사관으로 모시려다가 실패했다. 얼마 후 친러파가 러시아 영사 베베르와 접촉하여 고종을 러시아 영사관으로 데려가는 데 성공했다. 


고종은 왕비를 살해한 원수들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친일 개화파를 숙청했다. 왕비 살해에 관여했다고 의심되는 모든 정객들을 죽였다. 권혁은 친러파로 넘어갔다. 왕자와 같이 남의 나라 영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매일 서성거리며 먼산만 바라보았다. 신하들에게 모든 정사를 러시아 영사 베베르와 상의하라고 지시했다. 이제 청나라 대신 러시아가 조선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약 100일 동안은 러시아 영사관 사람들이 고종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더니 왠지 모르게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지 약 4개월 후인 1896년 6월 3일, 청나라의 이홍장과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는 비밀리에 조약을 맺었다. 청은 일본에게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돈이 필요했고 러시아는 부동항을 확보해야 했다. 러시아가 막대한 자금을 청에게 빌려주고 대가로 만주 철도 부설권과 요동반도에 있는 항구 조차권을 얻었다. 러시아는 조선에 부동항을 가지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1920년에야 밝혀졌다. 


민비 제거로 조선을 독차지할 것으로 생각했던 일본은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백성들은 국모를 시해한 일본을 극도로 미워했다. 더구나 단발령은 백성들의 격렬한 반발을 초래했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의 일부를 자르는 것은 인륜을 저버리는 범죄였다. 분노는 개화파와 일본을 향했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일본은 조선문제를 놓고 러시아와 협상을 벌렸다. 그동안에 충분한 국력을 신장시켜 때가 오면 러시아와 맞 대결할 심산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38도선에서 한반도를 분할하여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관리하자고 제안했으나 러시아가 거절했다. 러시아는 자국의 군사력이 일본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얼마 후에 러시아는 국내 사정이 불안해지고 요동반도에 부동항을 확보하여 한반도의 필요성이 절감되자,  39도선에서 가르자고 제안했으나 이번에는 일본이 거절했다. 1896년 6월 9일, 야마가타로바노프는 양국이 모두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공동 관리하기로 합의했다. 3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일본은 명과의 협상에서 하남 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일본에게 양도할 것을 주장했던 것과 대동소이한 발상이었다. 당시에도 조선은 명과 일본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는 지를 몰랐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두나라가 서로 견제하는 사이에 그래도 조금은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러일전쟁 전 까지는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에 의존하는 편이었다. 


고종의 환궁과 대한제국 선포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려 생명이 위태롭던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 미국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정적이었던 민비가 제거되자 일본은 이들을 국내로 불러들였다. 미국으로 귀화하여 미국 시민이 된 서재필이 고종의 고문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그는 신문과 연설을 통해서 고종의 환궁을 촉구했다. 백성들의 상소 또한 빗발쳤다. 러시아 대사관 내의 분위기도 썩 좋지 않았다. 딱 일 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외국공관이 많은 정동에 있는 덕수궁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년 10월 20일,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조선의 왕이 중국의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종주국-중속 국 관계가 끝나고 조선의 왕도 청나라의 황제와 같이 황제라고 호칭했다. 대한의 한은 진한, 마한, 변한에서 비롯되었다. 사대하여 굳건한 보호막으로 삼고 의지 했던 대국이 없는 대한제국은 사막에 홀로 선 나그네처럼 언제 모래에 묻힐지 모르는 형국이었다.  


청일전쟁 후의 청나라

이홍장이 반쪽짜리 개혁인 양무운동을 하던 중, 청나라에서도 급진 개화파가 있었다. 1888년에 강유 웨이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이 완전한 개혁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한 후에야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면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조선의 개화파와 같이 일본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불러서 의견을 물으니 중국을 4개로 나누어서 서양 국가와 일본이 각 지역을 담당하여 개혁하자고 제안했다. 이 사실을 서태후가 알고 크게 분노했다.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들을 책동에게 개화파를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개화파는 이사실을 알고 당시에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보수파를 검거할 것을 부탁했으나 그는 보수파에게 이사실을 고자질했다. 결국 보수파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개혁은 100일 만에 끝났다. 1898년 4월 23일에서 동년 8월 4일까지 계속되었던 청나라릐 개혁을 변법자강 운동 또는 100일 개혁이라고 한다.


의화단 사건(Boxer Rebellion)

19세기 말 청나라는 만신창이였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고 만주에 철도를 건설하고 요동반도에  부동항을 확보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가 되고 조선을 열강의 먹잇감으로 내주었다. 영국은 홍콩을 점령했고 산둥반도는 독일이 차지했다. 열강에게 여러 항구의 조차권을 허락했다.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 야 했다. 전비를 충당하고 배상금을 물기 위해서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야 했다. 가믐과 홍수로 인한 재해 또한 극심했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저 갔다. 젊은이들에게 마땅한 직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불만에 찬 젊은이들이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 세우겠다고 봉기했다. 전통적인 무예를 연마하여 맨주먹과 정신력으로 신식무기를 사용하는 서양 군대를 물리치겠다고 외쳤다. 유교의 전통을 살려서 나라를 바로 세우고 서양인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말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맨주먹을 휘둘렀고 서양사람들은 그들이 권투선수와 유사하다고 생각하여 박서의 반란이라고 했다. 그들은 교회를 파괴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중국인이든 서양인이든 가리지 않고 죽였다. 서태후는 서양인들을 중국에서 축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암암리에 정부군을 보내여 서양인들을 공격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란에 서방측이 초기에는 열세에 몰렸으나, 일본을 포함한  8개국 연합군은 반란군과 정부군을 제압했다. 양측이 인간으로 써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사건이었다. 참혹한 도륙이었다. 1899년 11월부터 1901년 9월까지 약 2년간 계속된 아비규환이었다. 망해가는 청나라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청나라는 천문학 적인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청이 지기는 했으나 중국인들의 외세에 대한 끈질긴 저항에 서양인들 또 한 중국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 그들은 중국을 아프리카와 같이 식민지로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국사람들은 자기 나라 관리에게는 복종하나 외국인 말은 듣지 않는다는 것과 중국인 관리들은 외국인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따라서 부패한 중국 정부를 살려 두고 정부 관리들을 이용하여 중국에서 이권을 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만은 중국을 정복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쑨원은 미국 하와이에서 교육받고 홍콩에서 의학교육을 받은 의사였다. 그리스도교 교인이기도 했던 그는 중국이 서양식 근대국가로 변신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홍장이 주도하는 양무운동으로는 부족하다고 믿었다. 1894년 중흥회를 조직하고 청나라를 전복하여 새로운 공화국을 새우려는 혁명운동을 시작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던 해였다. 양무운동, 변법자강 운동그리고 의화단 사건은 모두 청나라를 바로 새우려는 노력이었던 반면에 그는 청을 없애고 다른 나라로 바꾸려는 혁명운동을 시작했다. 조선의 동학란을 혁명운동이라고 하나 조선의 군주제도를 바꾸어 보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다. 더구나 전봉준이 대원군과 접촉하여 그의 복권을 반란의 종착점으로 계획했던 것 같은 데 쑨원의 생각과는 좀 거리가 있다. 1895년에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획책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듬해에 삼민 주의를 발표하고 수차례에 걸쳐 무장봉기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서재필과 쑨원(손문)은 둘 다 의사이면서 동시대에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서재필은 1864년에 손문은 1866년에 출생했다. 서재필이 조선에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던 무렵 손문은 삼민주의를 발표했다. 서재필은 2년여 동안 조선에서 의회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져 보려고 노력했으나, 위정척사파, 고종 그리고 외국공사들의 압력으로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러일전쟁(1904.2.8-1905.9.5)

청이 일본에 굴복하여 조선에서 손을 떼자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견제하는 사이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삼국간섭 이후 군사력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가 예산의 40%를 국방비에 투입했다. 일본 국민은 높은 세율에 불평하지 않았다. 전쟁에 이겨서 갚으라고 했다. 정부와 국민의 완벽한 단결이었다. 부족한 국방비를 국채를 팔아서 메웠다. 유럽과 러시아를 넘나드는 스파이를 파견하여 정보수집을 했다. 노동자들의 시위와 폭동으로 러시라 정부와 국민이 괴리된 것을 포착하고 반정부 지도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레닌도 이중에 한 사람이었다.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전쟁계획을 세웠다. 


영국과 러시아는 세계의 패권을 두고 서로 경쟁했다. 배를 타고 멀리 가서 식민지를 차지하여 나라가 부강해지는 세상에 일 년 내내 얼지 않는 항구가 없는 러시아는 부동항을 확보하지 않고는 영국과 경쟁할 수가 없었다. 러시아는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남쪽으로 진출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영국은 따라가면서 방해했다. 연해주까지 도달하고 남쪽의 조선을 기웃거렸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했다. 그러던 중에 러시아는 요동반도에 포트 아터라는 부동항을 가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동서를 관통하는 트랜스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고 이를 남만주 철도와 연결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피터스버그가 부동항인 포트 아터와 연결되어 태평양 진출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었다. 의화단 사건 도중 폭도들은 남만주철도역에 방화를 했다.  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10만 대군을 만주에 주둔시켰다. 


영국은 동북아에 러시아가 진출하는 것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필요했다. 일본이 안성맞춤이었다. 러시아는 일본과 영국의 공동의 적이었다. 1902년 1월 30일 일본과 영국은 동맹을 맺었다. 동양의 소국 일본이 세계 최고의 강국 영국과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일본 국민은 열광했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천군만마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하여 협상으로 끝내려는 속전속결을 목표로 했다. 반면에 러시아는 만주철도와 

트란스 시베리아 철도가 연결될 때까지 기다리려는 장기전을 원했다. 당시의 전력을 비교해 보면 러시아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일본이 국민과 정부가 총 단결되어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반면에  러시아는 국민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일본은 선전 포고하기 이틀 전에 요동반도 포트 아터(뤼순)항에 있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고 인천 앞바다를 항해 중이던 러시아 전함 두척을 침몰시켰다. 세상은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다. 선전포고 이주 후에 일본은 조선과 한일 의정서를 체결했다. 조선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일본에게 조달할 것을 약속했다. 청일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은 일본의 병참기지가 됐다. 


미국, 영국, 캐나다가 일본에게 전비를 빌려 주었지만 미국이 가장 많이 도와주었다. 유태인 은행 가였던 야콥 쉬프는 니콜라스 2세의 멸망을 원했다. 그가 러시아 유태인을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 국채를 월가에서 팔게 해 주었다. 이밖에 카네기와 제이피 모르간도 도왔다. 


포트 아터에서 밖으로 출격했다가 일본 함대의 포격과 수뢰에 치도 고니를 맞은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항구 앞바다에 수뢰를 깔아 놓고 나와서 싸우려고 하지를 않았다. 일본군은 바다에서의 공격을 포기하고 항구 뒤쪽에 위치하는 언덕을 점령한 후 육지에서 장거리 포 사격으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괴멸시키고 포트 아터를 점령했다. 


한편 북해를 출발한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영국의 방해로 스웨즈 운하를 통과할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서 포트 아터로 오는 도중 태평양 함대의 패배 소식을 듣고 브라디 보스토크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가는 곳마다 영국 식민지가 있었다. 중간에 항구에 정박하여 물과 석탄을 공급받아야 했으나 영국의 방해로 용이하지 않았다. 많은 양의 연료와 물을 싫고 항해해야 했다.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함대의 항로 등 각종 정보를 일본에게 알려 주었다. 일본 토고 제독은 함대를 대한 해엽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다. 발틱함대는 밤에 불을 끄고 항해했었으나 어느 날 환자가 발생하여 병원선에 불을 켜고 환자를 치료했다. 일본 함대는 발틱 함대의 위치를 확인하고 총공격을 감행하여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함대를 전멸시켰다. 


두 러시아 함대가 전멸되자 미국은 일본의 승리를 확신했다. 티오 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육군장관 윌리암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서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와 만나게 했다. 1905년 7월 29일 둘은 도쿄에서 만 났다. 일본제국은 미국이 필립핀을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조선의 사망선고 였다. 


러일전쟁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으로 끝났다. 일본은 국가예산의 다섯 배를 전비로 썼고 러시아는 노동자 폭동 진압과 전쟁을 동시에 진행할 힘이 없었다. 일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양국 대표는 뉴 햄프 샤 포츠머스에서 마주 앉았다. 약속한 대로 조선은 일본에게 넘어갔다. 조선을 놓고 청과 러시아와 각축을 벌여 승리한  일본에게는 당연한 응보였다. 일본은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만주의 이권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리고 러시아 영토였던 사할린의 남부를 양도받았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패전국인 러시아의 배상금을 면제해 주었다. 그동안 냈던 세금보다 몇 배를 돌려받으려 했던 일본 사람들은 분노했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이 황인종이기 때문에 무시당했다고 믿었다. 


대한제국의 멸망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한국이 일본의 영토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행정 절차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고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 외무성으로 넘어갔다. 내정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맡았다. 이토는 초대 조선 총독으로 취임했다. 일본은 1907년 한일합방에 반항하는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왕으로 만든 후 1910년 8월 29일에 한일합방을 이루고 조선을 강점했다. 대한제국이 망했을 뿐만 아니라 한민족은 나라 없는 신세가 되었다. 고려가 망 한 후에는 조선사람이 되었으나 조선이 망한 후에는 국적 없는 일본 식민지 시민에 불과했다. 


청의 멸망; 위안스카이 청 인수

쑨원은 구미 국가를 순방하며 청나라를 없애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혁명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청중들의 호응은 대단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선뜻 도와주지 않았다. 중국이 강해지면 중국에서의 자국의 이권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911년 10월 10일, 혁명군이 우창봉기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쑨원은 미국 콜라 도주 덴버에서 그곳 신문을 보고 알게 되었다. 당장 유럽으로 가서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청나라 정부를 도와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 12월 25일에 상하이로 돌아와서 새로운 공화국 선포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우창봉기 이후 11월 하순에는 중국 24개 성중 14개 성이 청나라 정부에서 이탈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1912년 1월 1일 쑨원은 난징에서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총통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북경에는 청나라 정부가 아직 존재했다. 


청나라 조정은 당시 청 최고의 북양 군대를 가지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혁명군 진압을 부탁했다. 20대에 조선의 감국으로 고종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던 장 본인이었다. 간악한 위안스카이는 청 조정이 허약하다는 것을 알고 전권을 주지 않으면 혁명군을 진압하지 않겠다고 협박하여 군과 행정 수반을 겸한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한편 쑨원에게는 북양 군대에 대항할만한 군사력이 없었다. 더구나 약삭 바른 구미국가들은 모두 위안 스키를 지지했다.  똑똑한 쑨원이 중국에 강한 나라를 새우는 것보다는 부패한 위안스카이가 그들에게는 더 좋은 상대였을 것이다. 쑨원은 할 수 없이 새 공화국 총통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도했다. 위안스카이는 1912년 2월 12일 청의 마지막 황제 선풍제 푸이로부터 청을 접수했다. 진시황에서 시작된 2200년 중국 제국의 역사는 막을내리고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조선사람들이 나라를 잃어버린 반면에 중국사람들은 새 공화국 국민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일본의 침략, 공산당과 국민당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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