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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un 27. 2020

청, 조선, 일본, 유럽의 변화와 청과 조선의 멸망

02. 소중화주의, 정조와 실학, 일본 막부와 시대와 난학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초토화되었는 데도 조선은 백성들의 복지와 부국강병은 뒷전이었다. 신분제도는 양반의 지위를 확고하게 해주는 제도였고 노비는 그들의 재산이었다. 과거제도는 그들의 특권을 보장해 주었다. 낡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 실학은 그들의 특권을 위협했다. 건국 초부터 사대 국으로 섬겼던 명나라는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해주었다. 집권층의 대국에 대한 고마움은 소중화주의를 만들어 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서는 실학이 일본에서는 난학이 발달했다. 


소중화주의


만주의 여진족을 단속했던 명나라와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쇠잔해지는 틈을 타서 여진족이 힘을 모아 나라를 만들고 급기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륙에 청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조선은 망한 명나라를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섬겼다. 명은 세상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중화주의"를 주창했던 나라이다. 명이 없어졌으니 조선이 그 전통을 지켜 한 다는 "소중화주의"가 집권층의 정책기조였다. 망한 명나라 섬기기에 앞장선 인물은 노론의 수장 송시열이었다. 사대의 대상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는데도 속으로는 명을 숭상하고 청을 오랑캐라고 무시했다. 청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조공관계는 교역이 사대 국으로 한정되는 제도였다. 사대 국에서 문물을 들여오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으면 나라가 발전할 창구가 전부 닫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그야말로 은둔의 나라로 변해가고 있었다. 쇄국은 대원군이 창안한 정책이 아니었다. 이미 명이 망한 후의 조선은 교역을 거절한 나라였다. 


정조는 실학을 정책에 반영

1776년은 영조가 승하하시고 정조가 등극한 해이다. 같은 해에 미국이 독립했다. 제임스 왓트는 증기 엔진을 실용화했고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간했다. 만약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한국 역사에서도 1776년이 구미역사에서 만큼이나 중요한 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지지했던 시파를 많이 등용했다. 그들은 주로 남인이었고 실학파가 많았다. 진보적인 서얼 출신도 서슴없이 등용했다.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과 막역한 사이였다. 그는 개혁을 할만한 기량을 가지고 있던 군주였다. 19세기의 출발이었던 1800년에 그는 갑자기 승하하셨다. 많은 실학자들이 천주교 신자 였다. 순조 1년에 천주교 척결이라는 이름으로 실학자들이 숙청 되었다. 유럽의 계몽사상과 같은 역활을 했을 지도 모르는 실학은 정조와 함께 조선근대화에 기여할 기회를 놓지고 말았다. 대신에 안동 김씨 세상이 되었고 세도정치의 시작으로 조선은 망국의 길로 들어선다. 


일본 막부시대와 난학

조선이 임진왜란에 대한 폐해를 반성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했던 반면 일본은 긴 세월 계속된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와 번영의 길을 택했다. 


1467-1590년을 센고쿠 시대라고 한다. 무려 100여 년 동안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이 일본은 수많은 지방 영주(다이묘=번주)들이 서로 싸우는 혼란스러운 세상이었다. 1590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일본 천하를 통일하고 1592년에 조선을 침략했다. 그의 최종적인 목적은 명나라를 정복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에서 조명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 남쪽에 수많은 왜성을 짓고 방어에 급급하던 일본군이 철수하여 7년 동안의 전쟁이 끝났다. 도요토미는 신하들에게 5살 난 자신의 아들에게 충성할 것을 당부하고 죽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는 이를 거부했다. 도요토미 지지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천하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는 마쿠부(막부) 시대(에도시대)의 장을 연다.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도쿄)로 옮겼다. 


도쿠가와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을 국가의 원칙으로 삼았다. 전쟁 없는 평화스러운 날이 계속되어  태평천하라는 말이 유행했다. 1600년에 시작된 막부는 조선과도 유화정책을 썼다. 조선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리고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도를 확립했다. 그러나 조선의 사는 선비이고 일본의 사는 무사인 사무라이였다. 조선의 지배계급이었던 양반(사대부)은 전인구의 약 2%였고 일본의 사무라이는 약 6%였다.


막부는 일본 특유의 통치제도였다. 일본에는 천황이 있었으나 아무런 권력이 없었다. 전 국토는 미국의 주처럼 61개의 번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번의 권력자를 다이묘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주지사 격이다. 그러나 일본의 다이묘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에도에는 중앙정부 격인 막부가 있었고 이곳의 수장을 쇼군이라고 했다. 전국 다이묘들의 수장이었다. 지방분권이어서 얼핏 보면 다이묘들이 반역하기 쉬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이들은 서로 경쟁해야 했기 때문에 쇼군에게 반기를 들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부는 200여 년 동안 일본을 다스렸다.


난학의 탄생

중국, 조선, 일본 모두 근대화되기 전까지 쇄국이 원칙이었다. 17세기 초부터 상당수의 유럽 선박들이 조선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청나라 허락 없이는 교역을 할 수 없다고 하여 돌려보냈다. 박연(얀 아너스 벨테브레이)과 하멜은 나포되어 조선에 머물렀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문물을 열심히 배우려 들지 않았다. 


16세기 말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교역을 요구하자 완전히 거절하지 않고 나가사키 앞바다에 데지마라고 하는 인공섬을 만들어서 그들을 거주하게 하고 교역을 했다. 서양문물을 배울 수 있는 창구였다. 그들은 캐돌릭 교를 앞세워 타국에 들어온 다음  군대를 동원하여 침략했다. 캐톨릭교는 일본 국교인 신토 와 불교를 위협했다. 


1598년 영국인 윌리암 아담스가 일본에 도착했다. 그는 네덜란드 회사인 노트르담 상인 회사 소속이었다. 노트르담 상인회사는 후에 동인도 회사가 된다.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대서양을 건너 남미 최 남단에 있는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고 태평양을 항해하여 19개월 만에 일본에 들어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 5월과 6월에 그를 3번이나 만나보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배우려 든다. 아담스에게 수군과 협조하여 서양식 배를 만들게 했다. 일본 연안을 항해할 수 있는 배, 멕시코로 갈 수 있는 배, 동남아를 항해할 수 있는 선단을 만들었다. 그는 도투가와를 아무 때나 알현할 수 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그의 개인 고문이 되었다. 일본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일본이 네덜란드와 영국과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막부는 가톨릭교도인 포르투갈 사람들이 일본을 점령하려고 한다고 의심하여 포르투갈 사람들을 일본에서 추방했다. 데지마 섬은 신교도인 네덜란드 사람들 차지였다. 쇼군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세상의 소식과 새로운 문물을 가지고 일 년에 한 번씩 자신을 배알 하게 했다. 그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보고를  경청했고 새로운 지식을 정책에 반영했다. 


1700년경 네덜란드(화란)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에 에 인체 해부학 책을 소개했다. 이 책에는 사람 몸의 각 부위가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느 날 이 책을 보면서 실제로 시체해부를 하기로 했다. 에도 출신 의사 스키타 겐파쿠는 이 소식을 듣고 해부하는 것을 관람 했다. 그는 내부 장기들이 책의 그림과 너무나 동일한 것을 보고 경탄했다. 그리고 중국 한의학에서 배운 자신의 의학지식에 많은 오류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화란 어를 배워서 4년에 걸쳐서 타펠 아나토미아라는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해체 신서를 1771년에 출간했다. 이것이 일본 난학의 효시이다. "난"은 화란에서 유래했다.  화란 사람들을 통해서 들어온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발전한 학문을 난학이라고 한다. 난학은 일찍이 일본사람들에게 중화가 허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쇄국이 통상의 원칙이었으나 일본은 항해술이 발달하여 화란과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동남아를 통해서 서양문물을 접촉할 수 있었다. 은이 요지음의 달러처럼 모든 교역에 사용되었는 데 일본은 은이 많이 생산되어서 외국과의 교역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유럽의 계몽사상, 조선의 실학, 일본의 난학은 근대문명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은 실학을 정책에 반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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