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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ul 11. 2020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

01.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군주가 나라의 주인이었던 시대가 끝나고 국민이 나라의 주인 되어 가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인간의 욕심을 키워주는 제도와 욕심을 채우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는 제도였다. 전자는 자유경쟁을 통해서 인간이 부를 축적하게 했고 후자는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생산하여 모든 국민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기 때문에 부의 축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자를 자본주의, 후자를 공산주의라고 했다. 전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우파라 하고 이를 원칙으로 하는 나라를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고 했다. 후자는 좌파이고 공산주의 국가였다.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은 대륙 정복에 나선다. 300여 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점령한 후 명나라를 정벌하려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조선이 망한 지 얼마 안 되어 유럽에서는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고 공산주의가 세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서방국가들이 일차 세계대전으로 중국에 소홀한 틈을 타서 일본은 중국 정벌에 나섰다. 토요토미의 꿈이 실현되고 있었다.  거대 공산국가 소련이 탄생하자 서방국가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중국인들 사이에는 공산주의가 전염병처럼 퍼저 나갔다.   


나라를 잃은 한국사람들은 소련과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중국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운 국민당과 소련의 도움을 받은 공산당으로 갈라져서 싸우는 동안 한국 독립운동도 좌와 우로 분열되었다. 해방 후 좌와 우 싸움의 전초전이었다. 


제1장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3.1 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1914년 6월 18일, 쎄르비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디 난드 공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했다. 이를 보복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쎄르비아를 침공했다. 스라브족 나라인 쎄르비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러시아가 앞장서서 영국, 프랑스와 함께 연합국이 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맞섰다.  독일과 오트만 제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편에 서서 동맹국이 되어 연합국에 대항했다.  이렇게 시작한 전쟁은 1918년까지 계속되었는 데 이를 대전쟁(The Great War)  또는 1차 세계 대전이라고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고 참혹한 전쟁이었다. 러시아가 거대 공산국가인 쏘비에트 공화국으로 변신하는 계기였다. 소련은 북한을 건국시킨 나라이다. 일본은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반도를 빼앗기 위해서 중국은 독일로부터 산둥반도를 돌려받기 위해서 연합군 쪽으로 참전했다. 전후에 연합국은 일본 손을 들어주었는 데, 이는 중국사람들로 하여금 구미국가를 멀리하고  소련을 선호하게 했다. 


러시아 혁명

러시아가 참전을 선언하고 독일과 전투가 벌어지자 매일 노동자들의 시위가 벌어지던 피터스버그 거리는 조용해졌다. 정부와 국민은 단결하여 동맹국에 대항하는 전쟁에 임했다. 전쟁 초기에는 몇 개의 전투에서 이겼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러시아 군대는 독일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보급이 되지 않았다. 병사들이 먹을 음식과 군복 그리고 무기까지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생명을 부지하기 힘들어진 병사들은 탈영 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3만 4천 명 이상이 탈영했다. 식량부족은 주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점령한 러시아 땅에서  독일 쪽으로 피난 간 러시아 사람들이 수백만 명이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에 대한 반정부 시위가 극심해졌다. 황제는 군에게 시위대를 진압하라고 명령했으나 군대는 반대로 시위를 진압하고 있는 경찰에게 발포했다.  러시아 의회는 임시정부를 설치하고 리콜라스 2세에게 하야 할 것을 요구했다. 1917년 2월 짜르 니콜라스 2세가 하야 하여 제정 러시아는 막을 내린다. 이를 2월 혁명이라고 한다. 


제정 러시아를 승계한 러시아 임시정부는 자본주의자들과 귀족들이 주류를 이루고 이었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에게 인기 있는 당파는 사회주의자 들이었다. 러시아 의회는 중도 사회주의자이고 대중 인기가 높은 알랙산더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선출했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치범을 석방했다. 모든 사람들이 정치 활동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참전을 계속했다. 



브라디 미어 레닌은 니콜라스 2세의 탄압을 피해서 스위스에 망명하고 있었다. 2월 혁명이 일어나서 왕정이 끝나고 케렌스키가 정치활동을 허락하자 그는  러시아에 돌아가서 혁명을 일으킬 시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스위스와 러시아 사이는 전쟁터였다. 독일은 그가 반전주의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독일은 그에게 숨어서 돌아갈 수 있는 열차 편을 마련해 주었다.  귀국한 그는 국민에게 종전과 소작인들에게 토지분배를 약속하고 빵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사람들에게 선전했다. 대중들은 그를 열광했다. 1917년 10월 25일, 그가 지휘하는 볼쉐비크 적군은 케렌스키 정부를 무너트리고 일당 독재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수도를 페트로 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옮겼다. 이를 10월 혁명이라고 한다. 러시아는 일차 대전 참전을 중단하고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에 충성했던 장성들을 주축으로 볼셰비키 적군에 반대하는 세력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을 백군이라고 했다. 적군과 백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1918년부터 1923년 경까지 계속된 러시아 내전이었다. 러시아 농부들은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다. 그들에게 토지분배를 약속한 볼쉐비크를 지지했으나 혁명 후 볼 쉐비 크는 토지 국유화를 단행했다. 많은 농부들이 백군에 참여했다. 일부는 자신들이 녹군이라는 군대를 조직하여 적군과 싸웠다. 공업이 발달했던 서부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적군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동부는 농업이 주 산업이었고 농부들은 볼쉐비크를 원치 않았다. 코작, 극 우파, 사회주의자, 러시아 주변국 민족들이 모두 백군에 참여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은 독일과 싸우는 입장이었고 러시아가 공산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연합국은 러시아에 군대를 보내고 백군에게 무기와 군수물자를 원조했다. 그러나 백군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넓은 지역에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 흩어져 있어서 단결된 지휘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연합국군과 서로 협조도 잘 안되었다. 1920년에 구미국가들은 모두 철병했지만 무기 원조는 계속했다. 그러나 일본은 1923년 내란이 끝날 때까지 군대를 주준 시켰다. 일본은 사이베리아에 어느 나라보다 가장 많은 군대를 주둔시켰다. 한편 연해주와 사이베리아의 조선 독립군은 적군과 협조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이들은 레닌의 도움을 받아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1922년 12월 30일 백군을 제압한 레닌은 소비에트 연방을 선포했다. 두만강 건너에 거대 공산주의 국가가 한반도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파리평화회의 김규식 파견, 3.1운동, 상해 임시정부

1918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연합국의 승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할 무렵 미국 대통령 위드로우 윌슨은 1월 8일 연두교서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지며 외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골자로 했다. 유럽의 소수민족을 겨냥한 정책이었으나 조선의 여운형, 베트남의 호지민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고무되었다.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을 원했다. 사실상 패전을 인정한 것이었다. 1919년 1월 19일,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태리와 일본은 37개국 대표를 파리로 불러서 전후 처리에 관한 회의를 시작했다. 이를 파리 강화 회의라고 한다. 



촬스 크레인은 우드로우 윌슨이 대통령 후보였을 때 거액의 기부금을 제공한 미국의 사업가였다. 윌슨은  세계 평화를 위한 자신의 제안을 홍보하기 위해서 그를 대통령 특사로 임명하여 일본과 중국에 보냈다. 



여운형은 1917년,  조선에 있는 재산을 정리하고 상해로 갔다. 일제 감시망 때문에 조선에서는 독립운동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근거지를 상해로 결정했다. 그는 상해 YMCA에서 뜻있는 조선 청년들과 국제정세 등 조선독립에 관한 토론을 했다. 학교를 세워 상해 교민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등 대 교민 사업에 열심이었다. 자연히 교민들이 의지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1918년 11월, 그는 촬스 크레인이 상해를 방문하여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연설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여운형은 미국인이 경영하는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사장에게 촬스 크레인 오찬 환영회 초청장을 부탁했다. 사장 아들의 배려로 초청장을 얻어서 환영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파리평화회의에 중국 대표를 꼭 파견하라는 요지의 연설을 듣고 여운형은 크게 고무되었다. 오찬 후 크레인과 개인 면담을 하여 조선도 대표를 강화 회의 파견 할 수 있은 지를 타진 했다.  크레인은 조선 독립이 안건으로 채택되기는 힘들지만 대표를 파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여운형은 대표 파견을 결심했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장덕수와 같이 윌슨 대통령 앞으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크레인에게 전달했다. *이 편지가 얼마 전에 미국 콜범 비아 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기로 했다. 언더우드의 양자로 성장하여 미국에서 교육받은 그는 당시에 가장 영어에 능숙한 인사였다. 그러나 김규식이 대표의 자격을 갖추려면 한 정부의 대표여야 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사람들은 정부를 만들어야 했다. 마침 브라디 보스토크에 대한 국민회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어서 국민회의 신임장을 가지고 1919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가기 전에 김규식은 강화 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이 인정을 받을 려면 전 세계사람이 놀랄만한 일이 조선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운형은 이 의견에 동의하고 조선에서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는 데 이것이 3.1 운동이었다. 그리고 여운형은 좀 더 조직적인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여운형은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을 모아 신한 청년당을 조직했다. 여운형은 이들을 사이베리아, 만주, 조선, 일본 등에 보내어 대규모 시위의 필요성을 설명하게 했다. 민족자결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파리 강화 회의가 조선 독립의 좋은 기회이고 여기서 조선 독립이 인정을 받으려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독립을 원하는 지를 보여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이며 작가였던 이광수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선 유학생들을 설득했다. 1919년 2월 8일, 유학생들은 도쿄 YMCA에 모여 이광수가 작성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3.1 운동의 전주곡이었다.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일본은 조선을 군대를 동원하여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무단 정치였다. 백성들은 불만에 차있었다. 1919년 1월 고종이 사망했다. 일본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백성들의 분노는 건드리 면 터질 것 같았다. 동년 3월 1일, 민족 대표자 33인은 태화관에서 데모대는 탑골 공원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2월에 도쿄에서 낭독한 독립선언문이 아니고 33인 중 하나인 최남선이 작성 한 선언문이었다. 시위는 서울에서 북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 퍼저 나갔다. 약 2달 동안 계속된 시위에 무려 2백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4만 5천 명이 체포되었으며 7천5백 명이 사망했다. 외신은 이를 대서특필 했다. 그러나 열강들의 조선에 대한 정책을 변경시키지는 못했다. 3.1. 운동 이후, 일본은 무단 정치를 중단하고 유화적인 문화 정치를 시작했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호텔에 체크 인 하기가 바쁘게 열강 대표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팸플릿을 만들어 회담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성의 있는 답변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편지 잘 받았다는 간단한 답장이 돌아왔다.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존재는 없었다. 일본은 승전 5개국 중에 하나였다. 한국의 독립은 엄두도 못 내는 안건이었다. 김규식은 3.1 운동 소식을 한 달 후에야 알게 되었다. 


여운형과 신한 청년당 당원들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국제적인 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1919년 4월 10일 상해 교민 1000여 명과 신한 청년당이 모여 내각과 의회를 구성하고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나라를 빼앗긴 지 9년 만에 만들어진 정부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회주의자, 국수주의자, 자본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있었다.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사상이 한국사람들이라고 비켜 가지 않았다. 벌써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의 구세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남북이 갈라지고 남한이 반공국가가 되면서 여운형을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라고 하여 그를 제외한 국사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3.1 운동을 주도했고 김규식의 파리평화회의 참석과 3.1 운동을 기획했던 훌륭한 독립 지사이다. 그리고 해방 후 유일하게 국내 수권 작업을 주도했다. 분단을 막아 보려고 노력하다가 극우파의 총탄에 암살되었다. 경기도 양평군 신원리에 몽양 여운형 생가 기념관이 있다. 아이들 데리고 한번 찾아가 볼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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