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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ul 16. 2020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02. 5.4운동과 중국 공산당 탄생, 러시아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이 탄생하고 중국에 공산주의가 확산될 무렵 많은 조선 사람들은 만주와 시베리아로 

이주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5.4 운동과 중국 공산당의 탄생


1914년 일본은 연합국으로 일차 대전 참전을 선언하고 산둥반도의 칭다오와 그 주위 독일이 관리하던 지역을  점령했다. 칭다오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 해군은 일차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곳을 떠 났다. 중국에는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 국가의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일본은 러일전쟁 조금 전부터 동맹국 관계였다.  이듬해 1월 일본은 중국에게 21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치외법권 지역을 확대할 것,  빚이 많은 기업을 일본에 매각할 것, 창따오를 일본에게 양도할 것 등등이었다. 


1912년 쑨원과의 협상에 성공하여 초대 공화국 대통령이 된 위안스카이는 자신을 초대 황제로 하는 제국 건설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위안스카이가 조직한 북경에 있는 정부를 베양(북양) 정부라고 한다. 의화단 사건 때 서태후가 정부군이 반란군을 도와 외국군대와  싸우 게 했는 데도 불구하고, 그는 외국군대 편에 서서 반란군을 토벌했다.  외국 연합군에 합세하여 제나라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죽이면서 큰 공을 세운 그는 청의 이권을 가지고 있는 외국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중국 근대화에 매진했다. 호의적인 구미국가들은 근대화에 필요한 많은 돈을 빌려 주었다. 특히 군대의 근대화에 심혈을 기울였는 데 주로 일본에 의지 했다. 황제로 등극하기 위한 자금을 영국이 앞장서서 마련해 주었다. 위안스카이는 일본이 자신의 황제 등극을 지지해 줄 것을 약속받고 21가지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는 어차피 청이 일본과 전쟁을 하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15년 12월 25일  홍시 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고, 이듬해 1월 1일을 제국 1년으로 했다. 여론이 들끓었다. 자신의 군대 장성들이 반기를 들고 각 성주들이 반발하여 배양 정부에서 이탈했다. 할 수 없이 1916년 3월에 황제 자리에서 물러 났다. 그리고 동년 6월에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위안스카이는 이홍장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조선의 감국으로 1884년 갑신정변 때부터 1894년 청일 전쟁 이 시작되던 해 까지 10년 동안 조선을 지배했다. 9명의 첩을 두었는 데 그중 3명이 조선 왕족의 친척이었다. 이들 사이에 3명의 자손을 두었다고 한다. 


위안스카이 사망 후 베양정 부는 대통령 리 유안홍, 수상 두안 치루가 승계했다. 위안스카이는 각 지방의 성 총독을 각자 군대를 가지고 있는 군 장성으로 임명했다. 그가 사망하자 각 성 총독들은 중앙정부의 간섭 없이 자기 영토를 직접 관장하게 되었다. 소위 군벌 시대의 시작이었다. 따라서 베양 정부는 지방 장악력이 매우 약 했다. 그러나  1928년 장가이색이 북벌을 완수할 때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 역할은 계속할 수 있었다. 


1917년 대통령 리 유안홍과 쑨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안 치르는 일차 대전 중국 참전을 결정했다. 공병대 10여만 명을 프랑스에 파병했고 이들은 영국군의 지휘를 받았다. 중국 사람들은 독일이 전쟁에서 패하면 산둥반도의 독일 이권이 중국으로 반환될 것을 기대했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선언되고 1919년 1월 파리에서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 회의가 열렸다. 중국과 일본 모두 회의에 초청받아 참석했다. 5대 주최국은 프랑스, 영국, 미국, 이태리와 일본이었다. 이외에 관여한 30여 국이 참석했고 중국도 그중에 하나였다. 회담의 주도권은 프랑스, 영국과 미국이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의 형성을 포함한 14가지 안을 제안했다. 독일과 이해관계가 제일 많은 프랑스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에 직접적인 이권이 적은 미국은 중제 역할을 했다. 백인 우월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에 일본도 별로 각별한 대우를 받는 편은 아니었다. 이태리는 전쟁 초기에 동맹국이었다가 중간에 연합국에 참여 한 관계로 크게 발언권이 없었다. 피해가 가장 컸던 프랑스는 독일에 앙심을 품고 독일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배상금을 고집했다. 독일 사람들은 분노했다. 국수주의가 발달하고 이를 바탕으로 히틀러가 출현하여 복수의 전쟁을 시작했다. 푸대접받았던 일본과 이태리가 악의 축을 형성하여 연합국과 싸웠다. 이와 같이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의 연속이었다. 


 5.4 운동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중국은 파리 평화 회의에서 중국 내 열강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없앨 것, 일본의 21 요구를 취소할 것과 독일이 점령했던 산둥반도의 영토와 이권을 중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구미국가들이 유럽 문제를 토의하고 있는 중 일본과 중국은 중국의 독일 이권 문제로 마주 앉았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산둥반도의 독일 이권은 위안스카이가 일본에게 양도하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아이로니칼하게도 뼛속까지 친일 파였던 중국 대표 카오 룰린은 독일이 가지 있던 산둥반도 이권을 일본에게 넘기는 데 동의했다. 파리 강화 회의는 베르사 이우 조약으로 마무리 되었다. 


1919년 4월 30일 이 소식이 중국 내에 알려졌다. 1919년 5월 4일 아침 13개 대학 학생 대표가 베이징에 모여 중국이 베르사유 조약에 사인하지 말 것을 골자로 하는 데모를 계획하고 그날 오후에 테네만 광장에 연칭대학과 피킹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4000명의 대학생이 시위에 나섰다. 5.4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나라의 주권을 되찾자, 빈 역자 들을 처단하라, 21가지 요구를 철회하라, 베르사이유 조약에 사인하지 말라" 고 외쳤다. 


중국의 엘리트들은 나라가 망해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유교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가슴을 때린 것은 서양인들의 간악한 배반이었다. 그리스토 교를 앞세워 중국에서 이권을 야금야금 빼앗아 가고 악질적인 일본 편을 드는 제국주의 서방국가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민족자결주의도 모두 거짓이었다.  5.4 운동은 신문화 운동으로 발전하여 1921년 경까지 계속되었다. 반 서방 정서가 짙어 가던 시기에 레닌은 코민테른이라는 국제공산당 조직을 만들어 세계 공산화에 나선다. 유교, 크리스토 교, 그리고 서방과 등을 돌린 중국인들은 새로운 정신적인 지주를 찾아 방황했다. 공산주의가 퍼지기 좋은 토양이었다. 


중국 공산당 탄생


막시즘, 레닌, 볼셰비키 혁명, 코민테른이 부른 공산주의 바람은  5.4 운동으로  많은 중국 지식인들 간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북경 도서관장 리 다지오와 문과 과장이었던 천두슈는 이들의 선구자였다. 중국 공산당의 창당 대회는 1921년 7월 23-31에 열렸다. 대회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역에서 열렸으나 7월 30일, 프랑스 경찰이 이를 방해하자 제지 앙주 지아징에 있는 남쪽 호수에 관광선을 띠우고 배 안에서 대회를 계속했다. 겨우 12명이 참석했고 니 다지오와 천두슈도 참석할 수 없었다. 막강한 요지음의 중국 공산당에 비하면 정말 초라한 창당 대회였다. 


신해혁명이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혁명 이어 다면 중국 공산당의 출현은 이를 부정하는 또 다른 혁명의 시작이었다. 군주에서 국민으로 나라의 주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두 사상의 충돌은 동양을 비켜가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조선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민당의 재기와 쑨원의 사망

쑨원으로부터 전권을 넘겨받고 공화국 대통령이 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제국건설을 위해서 국민당을 탄압했다. 1913년, 위기를 느낀 쑨원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하고 1919년 5.4 운동으로 정국이 국민당에게 유리해 지자 동년 10월 10일에 당이 다시 조직되었다. 1921년 중국 남부에 있는 광저우(광동)에 정부를 조직하고 총통으로 취임했다. 중국은 북쪽에 베 양정부 남쪽에 광동 정부가 존재하게 되었다. 


쑨원이 중국 통일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북쪽의 군벌을 제압하려면 강력한 군대를 조직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간곡히 원조를 부탁했던 구미국가들은 묵묵 무답이었다. 1918년 쑨원은 레닌에게 불쉐비크 혁명을 축하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가 주창했던 민족, 민주, 민생을 삼민주의라고 한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회망은 레닌 밖에 없었다. 1920년 경 뜻밖에 소련은 국민당을 돕기 시작했다. 당시에 중국 공산당원은 수 백 명이었고 국민당은 5만 명에 달 했다. 레닌은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들어가서 국민당을 장악해야 중국 공산당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쑨원은 그들을 흡수하여 말살 사킬려는 심산이었다. 아무튼 그에게는 자금과 강력한 군대가 급선무였다. 1924년 1월, 공산당원들은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들어왔다. 이를 제1차 국공 합작이라고 한다. 


국민당(KMT)은 국가 혁명군(NRA)을 조직했다.  장교들이 소련에 가서 군사교육을 받고 소련 군사 고문단이  혁명군 훈련을 도왔다. 황파 우 군관 학교를 설립했다. 장카이 색이 교장에 임명되었다. 중공의 만년 총리엿던 주 엔라이와 중공 군 사령관이었던 린 비아 오도 이곳 출신이었다.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도 황파 우 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깝게도 쑨원은 1925년 3월에 간암으로 사망하고 장카이 색이 승계하여 북벌을 단행했다. 


러시아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안동 김씨와 영흥 민씨의 세도정치로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에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에는 만주에 쌀농사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조선 농민 만주 이주를 장려하였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아예 만주에 강제로 조선인 부락을 만들었다. 1917년 볼쉐비크 혁명 당시에 연해주와 사이베리아에 거주하는 한인이 30만이 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이르추르크, 치타 등에 한인 타운이 형성되었다. 북간도에는 약 40만이 거주했다고 한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날 즈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국민의회, 북간도에 대한 국민회라는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1919년 4월에 조직된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 국민의회, 한성의 임시정부와 상해의 조직들이 통합된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부를 지향했으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민의회를 대표하는 이동휘가 국무총리,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동휘는 조선 공산당을 창당한 인물이었다. 좌파와 우파의 대립은 불 가피 했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상해로 오지 않았다. 미국에서 모금한 독립자금도 거의 보내지 않았다. 좌파인 이동휘 위주로 임정이 운영되었다.  


김 알랙산드라와 이동휘


김 알랙산드라는 1885년 연해주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어머니가 사망했다.  5살 때  아버지가 살고 있는 만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만주 철도건설 현장에서 한국어와 중국어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 페트로비치 김은 항상 노동자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보호해주었다. 어린 딸에게도 어른이 되거든 노동자를 위해서 일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아버지마저 알랙산드라가 10살 되던 해에 사망했다. 그 후 연해주로 돌아가서 아버지 친구 스탄캐비치의 양육을 받았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일차 대전이 일어나고 많은 한인들이 러시아군으로 징집되었다. 조선의 적이었던 일본과 러시아는 같은 연합국으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싸우고 있었다. 러시아에 사는 조선사람들이 일본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할 환경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정 러시아에 협조해 야 했다. 브라디 보스토크에 사는 김병학이라는 조선 사람 청부업자는 선금을 받고 조선인 만 명을 차출하여 우랄산맥 벌목장으로 보냈다. 알랙산드라는 평소에 마음먹고 있던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 일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두 아이와 남편을 남겨두고 노동 현장으로 가서 통역 일을 하면서 그들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볼쉐비크 혁명을 위한 노동자 단체를 결성하고 밀린 임금을 받아내는 등 그의 눈부신 활동은 그를 노동자들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레닌도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1918년에 당서기와 극동 평의회 외무 위원으로 임명했다.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1917년 10월 혁명(볼쉐비크 혁명) 무렵 조선인들 사이에는 라이노 면 출신 조선인 여성 김 알랙산드라가 김병학이 팔아넘긴 노동자들을 해방시켰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블라디 보스토크에 돌아온 알랙산드리아는 재혼한 남편 오가이로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저명한 혁명가 이동휘가 자유 아므르 주(흑룡강 부근)의 감옥에 갇처 있는 데 사할린을 거처 일본으로 호송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동휘는 브라디 보스토크에서 볼쉐비크 적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1917년 7월 초에 독일제국의 밀정으로 오인되어 케렌스키 임시정부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볼셰비키 고위층이었던 알랙산드라는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해서 이동휘를 석방시켰다. 이동휘는 알랙산드라의 관할 지역인 하바롭스크 시로 근거지를 옮겨서 활동 하기 시작했다.


1918년 3월, 극동 인민위원 회의장 크라스노췌코프는 하바롭스크 시에서 조선 혁명가 대회를 열었다. 이동녕, 양기탁, 안공근(안중근의 동생)등 민족 주주 의자들, 이동휘, 류동렬 등 민족주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김 알랙산드라, 오하 묵, 유스 테판, 오와 실리 등 볼셰비키파들이 참석했다. 볼셰비키 노선의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민족주의 자들은 빠지고 1918년 4월 28일 한인 사회당이 창당되었다. 한국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중국 공산당보다 먼저 볼쉐비크 정신을 인정하는 좌파 정당이 생긴 셈이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이동휘가 선임되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는 볼셰비키 적군과 이에 반대하는 우파 백군이 싸우는 내전에 휩싸인다. 일본과 구미 연합군 국가들이 파병하여 백군을 도우면 서 (볼쉐비크) 적군이 수세에 볼렸다. 독립운동가들은 적군에 가담하여 백군과 싸웠다. 하바 로프스에 있던 조선 사회당과 극동 인민위원회도 아무르 주로 옮겨야 했다. 1918년 9월, 알랙산드라 김, 김립, 유동렬 등이 배를 타고 도주하던 중 백군에게 체포되었다. 일 부 한인들은 석방되었지만 알랙산드라 김을 비롯한 18명은 사형 당 했다. 레닌의 측근이었고 소련 공산당 서기였던 알랙산드라는 조선 죄파 계열의 선구자 이동휘에게는 든든한 지원자였다. 아마 그가 살아 있었다 면 좌파 독립운동가들의 분열도 그리 심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1920년 1월 22일, 바이칼호 서쪽에 있는 이르쿠츠크에서 또 하나의 공산당이 조직되었는 데 이를 이르쿠츠크 파 공산당이라고 하고 이동휘의 한인 사회당을 상해 파라고 부른다. 이 두 파는 치열한 경쟁을 벌린다. 


1919년 7월, 한인 사회당은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대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레닌과 접촉하고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그리고 400만 루블의 원조를 약속받았다. 이 중 반은 시베리아 러시아 정부가 사회주의 운동에 사용한다고 하여 떼어 주고 200만 루블을 수령했다. 


1919년 9월, 이동휘는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었다. 상하이 임정은 사실상 대한 국민의회, 한성 임시정부와 상하이 임시정부를 임 창호의 중재로 하나로 묶어 놓은 조직이었다. 이때 측근 김립과 사위 오영선도 같이 상해로 왔고 사회당 본부도 상해로 옮겼다. 이동휘는 코민테른에게서 받은 자금의 95%를 사회주의 운동에 사용하고 5%만 상해 임시정부의 보조금으로 지출했다. 그의 속셈은 임정을 시작부터 공산주의 노선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었으나 한 번도 상해에 오지 않고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임정은 이동휘가 아무 간섭 없이 운영했다.  11월 14일 이동휘는 측근 김립을 국무원 비서 겸 서무국장에 임명했다. 이승만과 우파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주장했고 이동휘는 볼쉐비크 적군과 연대하여 연해주와 간도에서 일본군과의 무력 투쟁 노선을 택 했다. 


이동휘는 알랙산드라 김이 터 놓은 인맥을 이용하여 레닌과의 접촉을 계속했다. 코민테른은 한성 주재 러시아 공사관 무관이었던 포타 포트를 상해로 파견해서 이동휘와 모스코의 소통을 도왔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임원과 한인 단체들에게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 등이 한국 독립에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설득시켰다. 그리고 이동휘에게는 항일투쟁에 대한 강령과 항일 선전 및 군사조직 계획안을 주었다. 


이동휘는 1920년 5월 24일 포타 포드에게 자신이 서명한 편지를 주면서 레닌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포타 포트가 제안한 항일투쟁 계획안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한인 빨 지산 부대와 적군의 연합작전에 합의한 것이었다. 


이동휘는 1920년 1월 러시아 주재 임시정부 대사(전권대표)로 한 형권에게 신임장을 발급하여 그는 6월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레닌은 이동휘의 신임장을 접수한 후 외무장관 치체린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한형권은 러시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 200만 루블 차관을 임시 정부에게 제공할 것, 항일 공동 전선, 이르쿠츠크에 사관학교를 설립해 줄 것을 제안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한형권이 요청한 200만 루블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이 중 40만 불을 1920년 10월에 일차 적으로 지출했다. 자금을 수령한 김립은 임시정부에 가져오지 않고  조선 사회당으로 넘겼다. 


*2019년 5월 월간조선은 쏘비에트 정부가 40만 루블을 당시 코민테른 국외 전권위원이었던 박진순에게 내주 었다고 "레닌이 임시정부에 준 자금의 행방"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주장하고 있다. 김립 자금 수령 사건으로 김구가 보낸 자객에 의해서 암살된 김립은 자금과 아무 관계도 없었던 것일 까? 이 사건이 김구의 자서전에 의존한 사실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1920년 12월 8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상해에 나타났다. 쏘비에트 편향의 이동휘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이승만은 모스크바에서 받은 자금의 행방을 추궁했고 궁지에 몰린 이동휘는 1921년 1월 국무총리 직을 사임했다. 이승만은 신규식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한형권을 사임시키고 쏘비에트 전권대표로 이희경을 파견했으 나 레닌 정부는 받아 드리지 않았다. 한편 이동휘는 1921년 11월 28일 크렘린에서 레닌과 회담하는 등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했다. 


당시 임시정부 경무국장이었던 김구는 부하 오면직과 노종균 울 시켜 김립을 암살하고 임정 내의 이동휘 파 공산 주의자들을 모두 축출했다. 1921년 7월 이동휘는 코민테른의 요구에 따라 한인사회당의 명칭을 고려공산당으로 바꿨다. 한편 동년 5월 이르쿠츠크에 모인 한인들은 또 하나의 고려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전자를 상하이파 후자를 이르쿠츠파라고 한다. 두 파는 코민테른에게 서로 자신들이 조선을 대표하는 공산당이라고 주장하면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자유시 참변

극동공화국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아므르 주의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동족상잔이 일어났다. 아므루(흥룡강) 강 건너 러시아에 있는 도시이다. 한인 독립군은 간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20년에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등 우리가 국사에서 배운 독립군 장군들이 간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특히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이 참패했다. 독립군 토벌이 잘 안 되자 일본군은 간도 한인들을 마구잡이로 사살했다. 이에 견딜 수 없었던 독립군은 만주 국경 지역 흑룡강가에 있는 미산시에 모여 10개 부대를 하나로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총재는 서호였고 홍범도는 부총재, 김좌진은 참모부장을 맡았다. 김규식은 제1 여단장이었다. 약 3,500명 병력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겨울을 나고 흑룡강을 건너 자유시로 향 했다. 적군의 원조가 필요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과 싸울 계획이었다. 


당시에 러시아는 내전 중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우파 백군과 적군이 싸웠다. 일차 대전 중 연합국은 백군을 원조했다. 일본은 연합 국중에 하나였다. 일본은 시베리아에 영토를 확보할 욕심으로 연합 국중 가장 많은 군대를 시베리아에 파견했다. 상하이파 고려 공산당은 브라디 보스토크에서 한인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적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적군이 일본군에게 패퇴하고 일본군이 한인 마을을 습격하는 등 수세에 몰렸다. 자유시에는 적군의 극동사령부가 있었다. 적군 강세 지역이었다. 한인 무장부대는 적군과 같이 자유시로 퇴각했다. 


자유시에는 이르추크파 고려 공산당이 조직한 한인 무장 부대인 자유대 대가 있었다. 자유시에 대한독립군단,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부장 부대, 이르추크파 한인 무장부대(자유 부대)가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결하는 대신 지휘권을 가지고 서로 싸웠다. 적군의 목적은 한인 무장부대를 하나로 만들어 적군에 배속시켜서 백군과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 상하이파가 총지휘권을 가지냐 아니면 자유 부대가 통솔 하느 냐의 경쟁이었다. 상하이파가 거의 장악 해 갈 무렵,  자유 대대 장 오하묵은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를 설득하여 이르쿠츠크 파와 오하 묵 편을 들게 했다.  동양 비서부는 임시 고려 혁명 군정 의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칼란다리쉬빌리, 부사령


관에 오하묵을 임명했다. 그리고 대한독립군단과 상하이파 무장부대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이들이 무장해제를 거부 하자 적군과 자유 부대는 기관총, 장갑차, 대포까지 동원하여 공격했다. 이로 인해서 한인 독립군은 괴멸되었다. 약 천명 정도의 독립 군은 적군의 포로가 되어 적군의 한 부대로 러시아 내전에 투입되었다. 홍범도는 적군의 한인 부대장이 되었고 소련령이었던 카자흐스탄에서 한 극장의 경비병으로 살다가 사망했다. 


 한인 공산당의 부질없는 싸움으로 한인 무장 독립운동은 막을 내렸다. 한인끼리의 다툼은 적군의 목적만 달성하게 해 주었다. 오하묵은 지휘권을 차지하지도 못했다. 지휘자는 적군 장교였다.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운동은 중국 본토에서 우파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좌파가 없는 상해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봉착했다. 이때 김구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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