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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철 James Ohn Jul 02. 2020

청, 조선, 일본, 유럽의 변화와 청과 조선의 멸망

03. 1800-1870년 조선, 청, 일본


청나라와 조선이 아주 비슷한 양상으로 망해 가는 동안 일본은 유럽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박차를 가 한다. 


신유박해(1801); 조선, 실학파를 탄압하다

정조의 죽음은 노론 벽파의 기회였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배척하던 세력을 벽파라고 했는 데  대부분이 노론에 속해 있었다. 노론은 조선의 수구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영조 때까지 집권세력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옹호했던 시파를 중용했다. 이들은 소론과 남인에 속해 있었다. 진보적이고 집권세력이 아닌 야에 묻혀 있던 선비들이었다. 실학파가 많았고 천주교를 선호했다. 천주교는 종교뿐만 아니라 서양문물을 전파했다. 시파 중에는 종교는 마다 했지만 그들이 가지고 온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웠다. 그래서 천주교를 서학이라고도 했다. 백성들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고 하고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말에 매료되었다. 신분제도로 인해서 양반에게 눌려 살던 그들에게는 구세주였다. 천주교가 세간에 잘 퍼져나갔다.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는 11세에 왕이 되었다. 직접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궁중에서 제일 어른이었던 정순왕후가 섭정을 했다. 그는 영조의 계비였다. 정조의 할머니 벌 되는 사람이었으나 정조와 나이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젊었다. 그의 집안은 수구 보수 노론이었다. 권력을 잡자마자 정조 때 중용되었던 시파인 남인과 소론의 숙청을 단행했다. 이들의 대부분이 천주교인이었다. 천주교인은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유교 국가에서 이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였다. 반대파인 시파가 자연히 청소되었다. 이통에 실학자들은 귀향을 가거나 처형되었다. 유럽과 일본이 근대화되고 있던 시기에 실낱같은 조선 근대화의 희망이었던 실학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세도정치(1804-1864)

당파 정치는 그래도 양반이었다. 조선은 한 집안이 나라를 다스리는 어처구니없는 지경에 이른다. 60여 년 동안은 이 씨 왕조가 아니라 김 씨 내각이 전권을 장악했다. 풍양 조 씨도 잠깐 끼어들었지만 안동 김 씨가 압도적이었다. 


노론 김조순은 정조 때 시파였다. 대부분의 노론이 정조에 반대하는 벽파인 대도 불구하고 보기 드문 시파였다. 정조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을까? 그의 딸이 정조의 아들 순조의 세자비로 간택되었다. 정순왕후의 힘이 컸다.  정조가 승하하시고 11살 난 순조가 등극 하자 그는 대왕대비가 되어 섭정을 했다. 그는 노론 벽파인 경주 김 씨 집안 딸이었다. 순조 1년 1801년의 신유박해를 주도하여 노론 벽파를 권력의 중심에 복귀시킨 것도 그였다. 김조순의 딸은 1802년에 왕비가 되었다. 정순왕후는 순조가 15세가 되던 1804년에 친정을 허락함과 동시에 김조순에게 순조를 보좌할 것을 부탁하고 섭정을 끝냈다. 


김조순은 정순왕후 측근세력이었던 노론 벽파를 중요한 관직에서 몰아내고 자기 잡 안 안동 김 씨들을 모든 요직에 앉혔다. 향후 60년 동안은 안동 김 씨의 세상이었다. 60년 동안  3명의 왕, 순조-헌종-철종이 등장하나 이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조선은 온통 안동 김 씨를 위해서 움직였다. 관직을 팔아먹었다. 뇌물을 주고 관직에 임명되면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여 본전에다 이익을 챙겨 치부했다. 나라가 어떻게 되던 집안만 흥하면 그뿐이었다. 


백성들이 굶어 죽을 정도로 살기 어려워 지자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홍경래의 난, 민주 민란 등이 그 예이다. 부처가  나타 나서 잘살게 해 준다는 미륵사상, 계룡산에서 정 씨가 나타나서 왕이 되어 선정을 베푼다는 정감록이 유행했다. 민족 신앙인 천도교가 출현했다.  천주교를 서학이라고 하듯이 동학이라고 했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설파했다. 자연이 신분제도로 홀대받던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 나갔다. 


흥선대원군의 개혁

왕족이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안동 김씨세도로 왕족이면서도 푸대접받는 이 씨 가문의 권력을 되찾을 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 세자비였던 선정왕후는 자신의 아들 헌종이 죽자 대비가 되어 조대비로 불렸다. 궁중 최고의 어른이었다. 이하응은 조대비와 평소에 좋은 괸계를 유지했다. 둘 다 안동 김 씨를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철종이 갑자기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12살 난 둘째 아들을 왕으로 옹립했다. 그가 고종이었다. 대원군은 고종의 섭정으로 1864년에서 1873년까지 조선을 다스렸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끝내고 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안동 김 씨 집안의 안위를 위해서 경영되는 조선을 백성을 위한 왕권 국가로 다시 세우기 위한 노력이었다. 민폐를 끼치고 붕당의 소굴이었던 서원을 철폐했다. 남인과 북인을 등용했다. 부당한 세제를 개편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와 천도교를 탄압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외국과의 통상을 거절하였다. 근대화의 물결이 동북아로 밀려 들어오던 시절에 경국대전의 위민정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조선은 그 보다 훨씬 통 큰 지도자가 필요했었다. 세도정치의 부패를 척결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한 그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1866년에 고종의 왕비로 민비가 궁중에 들어왔다. 대원군은 외척의 세도를 막기 위해서 친인척이 없는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민비를 간택했으나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자신 못지않게 권력욕이 많은 여인이었다.  고종이 20세되던 1873년에 민비는 반 대원군 세력을 총동원하여 대원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백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권력을 되찾으려고 민비에게 도전하였다.  급기야는 민비 시해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민비의 죽음은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권력다툼의 종식이기도 했다. 이 싸움의 승자는 며느리도 시아버지도 아닌 일본이었다. 


청나라;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제국들은 망하기 전에 정점을 찍는다. 중국에는 많은 제국이 있었다. 진 시황제부터 시작한  중국의 제국은 2000년 만에  청나라로 끝난다. 청나라의 건륭제(Qianlong Emperor)는 역사상 최대의 중국을 만들었다. 티베트, 베트남, 네팔, 만주, 연해주까지 모두 차지했다. 국민 총생산량은 따라갈 나라가 없었다. 세상에서 은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은은 요지음의 달러와 같이 무역하는 데 사용하는 국제 화폐였다. 


건륭제는 1735년부터 1796년까지 무려 60여 년간 청나라를 다스렸다. 조선의 영-정조 시대(1724-1800)에 해당한다. 통치 전반기에는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후반기에는 사치에 빠져 태만해졌다. 지방관리에게 지나치게 중요한 사안을 일임하고 관리감독을 소홀이 하여 부정부패가 만발했다. 불만에 찬 백성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말년에는 뇨후류 허션(화신)이라는 신하에게 전권을 위임하다시피 했다. 그는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축재를 일삼았다. 다음 황제인 가경제 때 그가 체포되었는 데 무려 12년 국가 예산에 해당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농업 기술이 발달하여 식량이 풍부해지고 비교적 좋은 경제가 오랜 세월 계속되면서 청나라의 인구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청나라는 증가한 인구에 상당하는 관리의 숫자를 늘이지 않았다. 부족한 관리로 인해서 정부는 부정부패를 충분히 관리 감독할 수가 없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갑자기 증가한 인구를 먹여 실릴 곡식이 충분히 생산되지 않았다. 백성들이 살기 힘들어 지자 불교의 미륵사상과 민간신앙을 혼합한 백련교가 생기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민란이 발생했다. 


청나라는 광주에 공행을 두어서 아주 제한적인 무역만 허락했다. 정부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준 상인을 공행이라고 했고 아주 소수였다. 그리고 광주에서 만 무역이 허용되었다. 외국인이 물건을 팔 때나 중국에서 물건을 살 때에도 공행을 통해야 했다. 제1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영국은 넓은 소비시장이 필요했다. 당시에 중국보다 더 좋은 시장이 없었을 것이다. 1792년 영국은 조지 맥카트니경을 특사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명분은 건륭제의 82세 생일 축하였다. 그러나 목적은 청과 폭넓은 무역과 대사를 상주시켜 청나라의 사정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1792년 9월에 출발한 그는 1793년 8월에야 황제의 여름 별장에서 건륭제를 배알 할 수 있었다. 통상을 요구했으나 건륭제는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것이 없고 못 만드는 것이 없으니 너희 야만국과는 통상할 필요가 없다"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McCartney Mission)

자만에 눈이 어두운 건륭제의 역사적인 오판이었다. 그때 통상을 하고 영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면 향후 전개될 백 년 동안의 능멸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건륭제가 죽기 4년 전에 가경제에게 황제 자리를 인계했으나 살아있는 동안은 권력을 넘겨주지 않았다. 1800년에 건륭제가 89세로 죽고 가경제가 확고부동한 황제가 되었다. 조선의 순조가 즉위한 해이다. 조선이 순조-헌종-철종으로 이어지는 것과 대동소이하게 청나라도 가경제-도광제-함풍제로 60여 년이 지난다. 두나라 모두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하고 원성이 잦아 민란이 빈발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반란이 태평천국의 난이다. 반란을 주도했던 인물은 홍수전이었다. 그는 과거시험에 여러 번 실패하고 절망 상태에 빠져 있는 데 어느 날 서양 선교사가 성경책을 건네주며 읽어 보라고 했다. 성경에 푹 빠졌고 급기야는 영감을 받아 자신이 상제의 둘째 아들임을 자칭하게 되었다. 상제는 하느님을 뜻한다. 상제의 첫째 아들은 예수이다. 만인은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지주로부터 토지를 빼앗아서 소작인들에게 분배하겠다고 약속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남쪽에 태평천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1850년에서 1864년까지 14년 동안 계속되었다. 청나라 정부군은 반란 진압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청은 1840년에 시작한 아편전쟁과 동시에 이 난을 평정하는 전쟁을 해야 했다. 무려 약 4천만 명이라는 인명이 희생된 대란이었다. 이홍장은 이난 평정에 큰 공을 세우고 북경 정부의 권력자로 출현하게 된다. 그는 조선의 대원군,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19세기 말 청일전쟁 때까지 동북아 정계를 주름잡던 3인 중의 하나였다. 


영국은 청나라로부터 도자기, 비단, 차등 수많은 물품을 수입했다. 영국의 은이 청나라로 가기만 하고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특히 신대륙에서 설탕이 들어온 이후로는 차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었다. 무역격차가 심각해졌다. 대량으로 중국에 팔 물건이 필요했다. 방직기의 발달로 대량 생산된 광목을 팔려고 했으나 청나라는 널리 퍼져있는 가내공업으로 수요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영국이 이집트를 식민지화하여 많은 목화를 재배했다. 인도의 목화밭이 필요 없게 되었다. 대신 양귀비를 재배하고 아편을 생산하여 중국에 팔았다. 처음에는 얼마 안 되었던 수출 양이 1830년대부터 급속도로 증가했다. 중독성 마약의 특징이다. 요지음 미국에서 마약 만드는 제약회사가 치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쓰지 않으면 못 견디는 중독성을 노린 것이었다. 이제는 청나라의 은이 영국으로 빠져나갔다. 청나라에서는 마약중독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정부 관리와 군인들까지도 중독이 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아편 수입을 금지하고 수입된 아편을 모두 불태웠다. 1840년, 영국 정부는 "수출 재산"보호라는 명목으로 청나라를 침략했다. 아편 수출이라고 하지 않았다. 간교한 영국 사람들이었다. 


당나라 이후로 중국은 인근 종족과의 싸움이나 내란 이외에는 큰 전쟁을 하지 않았다. 특히 청나라는 괄목할 만한 외적의 칩입이 없었다. 실전을 해본 적이 없는 병사들은 나태해지고 부패했다. 대포는 써 본 적이 없어서 거미줄이 처졌다. 상당수의 군인들이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1840년 6월 21일, 영국 해군은 인도에서 출발하여 마카오 항을 거처 딩헤 항을 포격했다. 제1차 아편전쟁의 시작이었다.  대포로 무장하기는 했지만 청나라의 정크 보트는 동력이 없는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군함이었다. 증기선이었던 영국의 군함은 훨씬 빨리 움직였다. 대포의 성능이나 소총 또한 청나라보다 훨씬 우수했다. 상대가 되지 않는 전쟁이었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제1차 아편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청는 영국에게 홍콩과 주위의 작은 섬들을 영국이  영구히 점령하는 것을 허락했다. 상하이를 포함한 중국 동해안 5개의 항구를 영국에게 개항했다. 청은 영국이 청을 침략하는 데 쓴 전비를 지불했다. 이듬해에 청에 거주하는 영국 사람들이 청의 법에 따르지 않아도 되는 치외법권을 얻었다. 곧이어서 프랑스와 미국도 영국과 같은 통상 조건과 치외 법권을 얻었다.  이때까지도 청나라 조정이나 청나라 사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했다. 청나라의 교만과 자만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없는 봉사로 만들었다. 그저 오랑캐들 그러다 말겠지 하는 정도였다.


1853년에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은 난징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를 선포했다. 1856년 겨울에 프랑스와 영국이 연합하여 아편무역을 완전히 합법화하고 중국 내륙에서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고자 다시 청과 전쟁을 시작했다. 2차 아편전쟁이었다. 예상대로 청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1858년 6월, 텐진에서 청과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가 협상을 벌렸다. 네 나라는 청에게 5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북경에 공사관 설치를 허락할 것, 10개의 항구를 더 개방할 것, 외국배의 양자강 항해를 허용할 것, 외국인의 청나라 내륙 여행을 허락할 것, 영국과 프랑스에게 전쟁 배상금을 지급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북경으로 쳐들어 갔다. 함풍제(Xianfeng Emperor)는 북경을 빠져나가 레게 성으로 도주하고 그의 동생 공 왕자가 뒤에 남아 협상을 추진하게 했다. 영불 연합군은 자금성에 불을 질러 파괴할 것을 논의했으나 결국 여름 별장을 파괴하기로 했다. 무려 12년에 걸쳐서 프랑스의 벨사이유 궁전을 본떠서 지어진 아름다운 청의 여름 별장이 불타서 파괴되었고 그 안에 소장되어 있던 갑진 에술품들이 도둑맞았다.  

1860년 10월 18일 북경 협약으로 2차 아편전쟁이 끝났다. 이 협약은 러시아의 중재로 성사되었다. 청은 텐진에서 영, 불, 미 러시아가 요구했던 조건을 전부 들어줘야 했다. 구미국가들은 중국에서 합법적으로 아편을 팔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 교인들은 중국에서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포교가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중국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러시아는 중재의 대가로 연해주를 양도받았다. 이곳에 브라디 보스토크를 건설했다. 조선은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접경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남쪽에 있는 한반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부동항을 가질 수 있고 태평양 진출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80여 년 후에 한반도가 두 거대 공산주의 국가와 접경하게 되는 계기였다. 


자신만만했던 청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개혁이 필요했다. 이홍장은 양무운동을 시작했다. 유교적 문화와 관제를 그대로 두고 서양에서 군사, 과학 등 새로운 기술을 배워서 서양 국가들의 침략을 막자는 반쪽짜리 개혁이었다. 개혁이 시작할 무렵 서태후가 등장한다. 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부정부패는 개혁에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양무운동은 청일전쟁 때 일본의 명치유신과 대결하여 그 본색을 들어 내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민비가 조선의 멸망을 재촉했던 여인이었다면 서태후는 청의 멸망에 크게 기여한 여인이었다.


쿠로후네(흑선) 사건과 메이지(명치) 유신


1853년, 아편을 빌미로 중국 대륙이 유럽 국가들의 침략을 받고 있는 동안 미 해군 제독 매튜 페리(Mathew Perry)는 군함을 끌고 와서 도쿄 앞바다에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했다. 당시에는 고래잡이가 성행했다. 고래기름을 기계의 윤활유와 밤을 밝히는 등불에 사용했다. 산업혁명으로 공장이 밤에도 돌아가야 했고, 등불이 없으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고래잡이 배는 한번 떠나면 무려 2년 동안 작업을 했다.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다. 선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석탄과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이무렵 미국은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캘포니아를 영토로 확보함으로써 태평양 진출이 용이 해졌다. 미국 정부는 태평양에서 일본이 기착지로서 가장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페리 제독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통상을 터 보려고 한 것이었다. 


검은 색칠을 한 배들이 함대를 이루어 증기를 내뿜으며 에도(도쿄) 근해에 나타나 대포를 쏘며 표호 했다. 일본 백성들은 혼비백산했고  막부 관리들은 겁에 질려서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이미 네덜란드 사람들을 통해서 아편전쟁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듣고 조만간에 자기들에게도 서양사람들의 침략이 있을까 걱정하고 있던 판이었다. 청나라의 국력이 서양세력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종래의 방식으로는 서양사람들의 침략을 막아 낼 수가 없다는 것을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조선은 북경에 다녀온 사람들이 길거리의 청나라 사람들로부터 들은 소식이 정보의 전부였다. 별거 아니고 곧 그들은 중국을 떠날 것이라고 했다.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막부 정부는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고 나라의 빗장을 열었다. 일본은 청나라와 조선을 제치고 서양 배우기의 선두에 나선 것이다. 대륙의 청나라가 망해 갈 무렵 일본과 미국은 약속이나 한 듯 강력한 태평양 세력을 만들기 시작했다. 향 후 조선은 대륙 세력과 태평양 세력 사이에 끼어서 두 세력의 향배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막부 제도는 근본적으로 지방분권제도였다. 200여 년 동안 나라가 지속되면서 쇼군의 권력이 약화되고 번주인 다이묘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외적에게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 집권제가 필요했다. 미국에 개항한 후 여러 유럽 국가들과도 통상 조약을 맺었다. 외국인 들은 일본에서 싼 금을 은을  주고 사들였다. 은은 요지음의 달러와 같은 통용 화폐였다. 일본 내에 은이 많아지자 물가가 폭등했다. 백성들 간에 반 박부 분위가 형성되었다. 지방 맹주(번주-다이묘)들은 천황을 복권시켜 강력한 중안 집권 국가를 만들어서 외적을 물리치자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존황양이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의 본거지는 일본 서남부였다. 혼슈 남단에 잇는 조슈번(야마구치현)규슈의 사쓰마번(가고시마현)의 다이묘(맹주)들은 원래 도요토미 히대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 들이었다. 이 지방 사무라이들이 주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했다. 도요토미가 사망한 후 이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끝까지 싸웠다. 따라서 막부 200년 동안 푸대접을 받았다. 흑선 사건으로 이들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일본 수상 아베도 이 지방 출신이다. 일본 우파에는 이지방 출신이 많다. 아마 이들은 조선이 일본의 영토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두 파로 갈라 진다. 조슈번 파는 천황을 복권시키고  개항을 하지 말자고 했고 사쓰마 파는 천황과 막부를 절충하여야 막부를 개혁하고 개항을 찬성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이 두 파를 싸우지 않고 협상으로 합의를 이끌어 낸다. 막부를 없애고 대신 천황을 최고 권력자로 하며 개항을 하기로 했는 데 이를 삿초 동맹이라고 한다. 


1867년 11월 9일 쇼군은 전권을 천황에게 반납하니 이를 대정 봉환이라고 한다. 1868년 메이지 천황은 "전 세계에서 모든 지식을 흡수하여 제국의 기초를 확고히 해야 한다"라고 메이지 유신의 기치를 올린다. 일본제국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경국대전의 원칙을 따지고 있던 조선, 반쪽자리 개혁을 하고 있던 청에게는 굉장한 위협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의 중심인물이었다. 청의 이홍장의 맞수였고 대원군과 동시대에 활동했다. 그는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생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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