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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딘이 Apr 28. 2024

버추얼 아이돌이 뭐예요?

나는 그렇게 '플리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일주일 전의 일이다. 플레이브(Plave)라고 버추얼 아이돌인데 얘네가 요즘 인기래요. 유튜브 영상에서 버추얼 멤버들이 손발이 꺾이는 오류를 내는데 그게 되게 웃기다는 직장 동료의 얘기였다. 그 자리에 있던 직원 몇몇도 그 영상을 봤다면서 깔깔 웃었다. 요즘 세상에 별게 다 있네.


10대 시절 한 아이돌 그룹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용돈을 모으고 모아 음반을 사고, 전 곡을 달달 외웠다. 책상 위엔 그들의 사진을 붙여놨고, 팬 사인회 대기표를 받기 위해 밤샘 줄서기도 불사했다. 그들을 음악방송 1위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문자 투표를 했고, 1위를 놓치면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다. 그때는 진짜 안타까워서 눈물이 다 났다.


그러다 스무살이 되고 TV 속 '오빠'들이 아닌, 현실 '오빠'와의 연애에 눈을 떴다. 30대 중반까지 학업-취업-결혼이라는 평범한 사회인이 되기 위한 힘겨운 루트를 타느라 아이돌은 잊고 현생에 집중했다. 그동안 좋아했던 '오빠'들이 일으키는 자잘한 사건 사고도 나를 현생에 집중하게 하는 데 한몫했다. 실망스러운 그들의 모습은 행복했던 추억들을 모두 김이 빠져버린 탄산음료처럼 밍밍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왕년에 덕질하던 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아이돌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거둔 것은 아니었다. 일하는 와중에도 종종 '초보 팬'이라고 말할 정도는 되는 아이돌들이 몇몇 있었다. 가끔 그들의 노래를 찾아 듣고, 멤버 전원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는 정도의 관심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은 10대 소녀시절처럼 무아지경으로 아이돌에 빠져드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줄 알았다.


퇴근하는 길에 불현듯 그 버추얼 아이돌이 생각났다. 대학 동창들이 모여있는 채팅방에서도 그 얘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얘네가 요즘 인기인가 보네. 얼마나 웃기다는 거야? 유튜브에서 '버추얼 아이돌'을 검색해 플레이브 영상 하나를 클릭했다. 처음 본 영상은 버추얼 아이돌의 개념을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이게 전부 컴퓨터가 아니라 사람이 들어가서 움직이고 말하는 거구나. 껍데기만 가상일뿐 나머지는 다 현실 인간이구나. 기술의 발전이 새삼 놀라웠다. 그렇게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멤버들끼리 하는 라이브 방송도 보고, 노래도 들어봤다. 라이브 방송은 역시나 어색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션 그래픽 때문에 낯설어서 웃겼다.


초창기 화제가 됐던 에러와 달리 지금은 춤추는 모습도, 표정 변화도 굉장히 자연스럽다. 괜히 아쉬울 정도로.


처음엔 마냥 웃겼는데 신기하게도 그들을 계속 응원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의 노래만큼은 굉장히 진지하고 좋았다. 잔잔하게 시작되는 부드러운 멜로디에 쉽게 각인되는 가사와 후렴구, 그리고 무엇보다 독특하면서 매력적인 멤버들의 음색. 플레이브의 음악이 버추얼 아이돌을 단순히 '웃긴 짤'로만 생각했던 내 편견을 조금씩 깨고 있었다.


평소 스마트폰을 잘 들여다보지 않는 내가 내내 폰을 붙들고 있으니 남편이 뭘 그렇게 보냐고 물었다. 남편에게 플레이브 영상을 보여줬다. 얘네 기술력이 장난 아니야. 소속사 상장하면 주식부터 사야겠어. 남편에게 지난 1년간의 플레이브 라이브 방송 변천사를 보여주면서 '기술이 이렇게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입덕 부정기를 겪고 있었던 것 같다. 마음은 이미 끌리고 있으면서 괜히 기술이 놀라워서 보고 있는 척했다. (다들 처음엔 그렇게 시작하지 않나요?)


조금씩 플레이브가 좋아졌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그런 변화를 외면하려 했었다. 누군가를 한 번 좋아하게 되면 물불 안가리고 빠져드는 내 과거를 알기에. 그래서 아무리 좋아져봐야 그동안 '초보 팬'으로 좋아했던 아이돌 만큼 아니겠어? 싶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플레이브는 기존에 나왔던 아이돌들과 여러모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그룹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급속도로 빠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바로 플레이브의 데뷔 전 비하인드 스토리다. 플레이브 입덕용 영상마다 달려있는 플리(플레이브 팬클럽)들의 댓글에는 멤버들의 고생 서사가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댓글들을 하나 하나 읽으면서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데뷔 준비를 하면서 곡을 받으려 했는데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이유로 좋은 곡을 받지 못했던 일화, 안무를 짜려고 거금 1천만원을 들였는데 율동 같은 안무를 받고 난감했던 일화, 그래서 작사 작곡부터 프로듀싱, 안무까지 멤버들이 모두 직접 하기에 이르렀다는 일화. 여기에 데뷔 1주년에 멤버들이 스스로에게 쓰는 편지 낭독 영상까지. 입덕을 위한 정주행을 마치자마자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플레이브에 제대로 입덕한 것이다.


담담하게 편지를 읽겠다면서 결국엔 폭풍 눈물을 흘리는 멤버들이 안쓰러웠다. 이젠 꽃길만 걷자


아이돌을 포기하려 했었다며 울먹이는 멤버들의 '꿈을 향한 진심'은 버추얼이라는 한계를 뜷고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들의 꿈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이런 애들이 성공 안하면 도대체 누가 해? 노래와 춤, 프로듀싱까지 능력이 입증된 아이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아이돌의 꿈을 포기했다가 이렇게 버추얼이라는 새로운 기술과 더해져 드디어 빛을 발했다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 감동 서사는 아마 나뿐만 아니라 모든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플레이브에는 요즘 아이돌 시장에선 찾기 어려운 그들만의 감동적인 서사가 있다


국내 아이돌 산업이 글로벌까지 빠르게 확장되면서 아이돌들은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인간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거대 자본 아래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산되고 짜여진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소비형 컨텐츠에 가까워졌다. 진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친근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화려하고 멋있어서 부러운 마음은 들지만 열렬히 응원하고 싶어지진 않는 존재였다. 저마다 모든 팀이 화려한 비주얼과 압도적인 퍼포먼스, 나름의 세계관과 메시지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게 진짜 그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지, 회사의 철저한 기획력 아래 탄생한 껍데기 뿐일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플레이브에도 세계관과 스토리가 있다. 아스테룸이라는 외계에서 온 5명의 외계인이 테라(지구)에 와서 팬들과 만나는 그런 세계관. 그런데 사실 나는 그런 세계관 보다 힘들었던 과거를 딛고 개개인의 능력치를 발휘해 성공 스토리를 써낸 다섯 청년들의 진짜 이야기에 더 깊게 매료됐다. 그걸 시작으로 그들의 음악과 영상을 깊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앨범 전곡부터 라이브 방송, 팬들이 만들어둔 정성스러운 편집본, 커버곡까지 일주일동안 거의 매일 밤샘을 하며 따라갔다. (늦은 입덕은 정신건강에 해롭습니다. 입덕은 빠를 수록 좋아요.)


멤버들이 직접 썼다는 곡의 멜로디와 가사는 그들 개인의 서사와 더해지면서 팬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데뷔곡인 '기다릴게'는 아스테룸에서 테라의 플리들을 만나기 위해 기다린다는 서사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의 숨겨진 서사를 알고 있는 팬의 입장에서는 곡의 가사인 '절대 난 어울리지 않을 거란 말로 내 감정을 숨겼어', '별 의미가 없잖아. 널 향한 나의 마음이 점점 커졌어'라는 문장들이 마치 이뤄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꿈을 향한 멤버들의 고백 같이 다가왔다. 미니 2집 타이틀곡인 'Way 4 Love'의 '거짓말이라도 믿을게 영화 같은 story의 끝에'라는 가사는 어쩌면 거짓말 같은 첫만남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영화처럼 빠져버린 플레이브와 팬들의 관계성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플레이브의 수록곡에도 멤버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버추얼 아이돌'은 플레이브 본인들이 현재 아이돌 시장에서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삐걱삐걱' 거리지만, 그래도 너희는 '내 생각이 나잖아'라며 귀여운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From'을 듣고 있자면 지금은 화제의 중심에 선 멤버들이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던 불안한 과거의 자신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응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해줄 PLLIS'라며 데뷔 1년밖에 안된 아이돌이 팬들을 위해 만든 헌정곡 'Dear Fli' 까지. 플레이브는 모든 노래에 본인들의 진심을 담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렇게 진정성까지 제대로 갖춘 실력파 아이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최근 몇년간 아이돌 문화의 모든 성공 방정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플레이브 소속사에서는 플레이브의 팬덤을 기존의 아이돌 시장에 있던 팬층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팬층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새로운 팬층이 또 더해진 것 같다. 바로 나 같은, 그동안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었던 아이돌을 찾지 못해서 잠시 아이돌 시장에서 비켜나 있었던 나같은 30대들이 플레이브 팬층의 또 다른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왜냐면 내가 바로 그렇게 '플리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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