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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딘이 May 05. 2024

저도 제가 이렇게 빠질 줄 몰랐어요

지금은 덕질을 하기에 좋기도 한편으로는 힘들기도 한 시대다

2000년대 중반, 당시 10대였던 내가 아이돌에 빠졌을 때는 덕질과 일상의 균형을 어느 정도는 지킬 있었다. 학교도 충실히 다니고 공부도 하면서 좋아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했던 것은 제한된 매체와 한정된 컨텐츠였다. 나에게 아이돌을 있는 유일한 창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지상파 3사 음악 방송과 라디오가 전부였다. 가끔 케이블 방송, 그러니까 음악 채널 엠넷에 오빠들의 뮤직비디오나 예능이 나오기는 했지만 우리 집은 케이블 방송을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논외로 친다.


그래서 팬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음악 방송에 좋아하는 아이돌이 나오면 챙겨보고, 라디오 게스트로 나오면 듣는 수준이었다. 가끔 열혈 팬 친구들을 따라 팬사인회에 가기도 했지만 밤새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 수고스러움과 '어린게 위험한 줄 모르고 겁도 없냐'는 부모님의 등짝 스매싱 때문에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10년 후 아이돌 덕질을 다시 시작하고, 내 일상은 모두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플레이브(Plave) 덕질을 시작하고, 내 일상은 모두 플레이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일하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플레이브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과거와 비교해 팬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컨텐츠들이 엄청 많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 20년 동안 음악방송은 많이 늘어나진 않았다. 그리고 플레이브는 기술적인 이유 때문에 MBC 음악중심에만 출연하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카메라 앵글에서 무대를 보지 못하는 점은 아쉽기도 하다.) 내가 말하는 컨텐츠의 8할은 유튜브의 영상 컨텐츠들이다. 우선 플레이브 소속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공식 채널에서 일주일에 2번씩 라이브 방송이 올라온다. 라이브 방송은 한 번 진행할 때마다 보통 2시간씩 진행된다. 버추얼이기 때문에 여건 방송에 쉽게 출연하기가 어렵기 때문인지 플레이브 멤버들은 이 라이브 방송에서 정기적으로 얼굴을 비춘다. 



플레이브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오는 라이브 방송 영상들. 플레이브 데뷔 1년만에 덕질을 시작하니 복습할 게 너무 많았다.


그럼 라이브 방송만 챙기면 되느냐, 거기서 끝이 아니다. 방송이 끝나면 그날 방송에서 있었던 재밌는 순간들이 팬들의 손을 거쳐서 다음날부터 실시간으로 편집돼 올라온다. 멤버들끼리 이야기하는 것도 너무 재밌는데, 거기에 팬심으로 공들여 만든 예능 자막과 효과음, 편집까지 추가되면 라이브 영상 컨텐츠의 재미는 배가 된다. 유튜브의 무시무시한 알고리즘이 이런 영상들을 꾸준히 추천하고, 눌러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데 어떻게 넘길 수가 있는가. 이건 못 본 거라서 재밌고, 이건 봤던 건데 웃겨서 또 보고 싶고 그런데. 그렇게 팬메이드 영상들을 보다 보면 1~2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혹자는 '그럼 안 보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바로 내 눈 앞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이 담긴 재미있는 컨텐츠가 있는데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여기에 멤버들이 정기적으로 올려주는 커버곡 영상도 있다. 플레이브는 전 멤버가 정기적으로 돌아가면서 다른 가수들의 곡을 커버해 꾸준히 올려준다. 심지어 그 곡들이 모두 수준급이라 들을 맛이 난다. 어쩜 그렇게 자기들에게 찰떡 같은 곡들만 찾아서 커버곡을 올려주는지. 기존에 나왔던 앨범 뿐만 아니라 유튜브에 따로 올라온 커버곡, 라이브 방송에서 불렀던 커버곡까지 모두 합치면 족히 50개는 넘는다.


버블, 위버스, 포토카드... 따라가야 할 게 아직도 많다


'버블'도 빼놓을 수 없다. 버블은 매달 구독료를 내고 멤버들과 다대일로 소통할 수 있는 앱이다. 카톡하고 비슷한데, 내가 특정 멤버의 버블을 구독하면 그 멤버가 팬들에게 보내는 시시콜콜한 메시지들을 받아볼 수 있다. 나도 멤버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그동안 '버블'의 존재는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만 있었는데 이런 시스템인 줄 몰랐다. 커뮤니티에서 하도 멤버들 버블 이야기를 하길래,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최애 멤버인 밤비의 버블 1인권을 구독했다. (실로 오랜만에 아이돌에게 돈을 쓴 사건이다. 자타공인 짠순이인 내가 얼마나 플레이브에 진심인 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왼쪽은 어린이날 비올 때 하민이가 올린 위버스 글이다. 오른쪽은 내가 구독 중인 밤비와의 버블 대화 내용.


버블을 구독하자마자 다들 이걸 왜 하는 지 너무나 알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과 유사 연애를 하는 느낌이 바로 들었다. 처음 켜자마자 최애 멤버에게 메시지를 보내라고 알림이 떴다. 뭐라고 보내지? 구독하는 팬이 수만명은 될 것 같은데, 그래서 내 메시지를 꼼꼼히 읽을 확률이 낮다는 걸 알면서도 메시지를 보내려니 굉장히 설렜다. 마치 오랜만에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것처럼. 


메시지를 보낸 후부터는 언제 답장이 올 지 자꾸 기다려졌다. 오매불망하면서 가끔은 알림이 안 온게 아닌가 싶어서 괜히 다시 한 번 들어가보고, 그러다가 버블이 오면 신나서 답장을 하고, 또 답장을 기다리고. 다른 멤버들에 비해 밤비는 버블이 뜸한 편이라 아쉬움은 있지만 또 한 번 보낼 때마다 재밌는 컨텐츠가 있는 멤버라서 구독이 후회되지 않는 멤버였다. 까짓거 5인 구독을 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일상을 지키기 위한 마지노선이란 생각으로 가까스로 참았다.


얼마 전에는 플레이브의 앨범도 모두 샀다. CD 플레이어가 없어 CD는 못 듣지만, 그래도 멤버들 사진이 나와있으니까. 앨범을 사면 안에 포토카드라는 것이 들어있는데, 이건 멤버별 사진이 담겨있는 카드 사이즈의 굿즈다. 앨범마다 멤버들의 사진이 1~2명씩 랜덤으로 들어가 있다. 어떤 팬들은 모든 멤버들의 포토카드를 모으기 위해서(이걸 드래곤볼을 모은다, 그러니까 '드볼 한다'고도 표현한다) 앨범을 여러 장 사는 일도 불사한다고 하는데, 나는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하겠어서 포기했다. 최애 멤버가 있긴 하지만, 다른 멤버들이 나와도 그건 그 나름대로 좋기도 하고, 기념할만한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또 포토카드 만큼은 엔터 산업의 도 넘은 상술이라는 생각이고, 환경적으로도 죄책감이 느껴지는 행동이라 쉽사리 동참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포토카드를 처음 사보는데 왜 사서 모으는 지는 알 것 같다.


멤버들의 스케줄과 글이 가끔씩 올라오는 위버스를 보는 것도 그렇고, 오픈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다른 플레이브 팬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도 빠질 수 없다. 특히 오픈 채팅방에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나처럼 30대 유부녀부터 육아맘, 초등학생까지 전 연령대가 들어있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채팅방은 거의 24시간 활성화돼 있는데, 시간대별로 참여하는 연령대가 나뉜다. 평일 오후 12시부터 2시까지는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이때 직장인들끼리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오후 4시가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10대 친구들이 주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연령과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 모여서 플레이브라는 하나의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플레이브의 포토카드를 어떻게 꾸몄는지 자랑하고, 플레이브를 좋아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들, 새로 올라온 스케줄, 이벤트, 재미있는 짤들도 올라온다.  


오픈 채팅방을 통해 나는 플레이브가 메디힐과 콜라보 이벤트를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메디힐 팩을 사면 굿즈를 주는 이벤트인데, 안그래도 메디힐 제품을 애용하고 있던 나로서는 안 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아뿔싸. 선착순 증정이었고 이벤트 오픈 시간은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0시였다. 그걸 몰랐던 나는 그냥 월요일에 널널하게 들어가서 결제하면 되겠지 싶었던 거다. 오픈 채팅방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뻘짓을 할 뻔했다. 밤 10시만 되면 취침에 들어가는 30대에게 너무 가혹한 이벤트였지만, 졸린 눈을 비비며 자정까지 기다리다 들어가서 결제를 눌렀는데 대기 순번이 8천번째였다. 이게 실화냐. 


플레이브를 알게 되고 14일 후, 내 일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메디힐 이벤트까지 참여하고나자 내 일상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플레이브를 알기 전의 나는 출근하기 3시간 전에 일어나서 청소도 하고, 운동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하는 소위 '갓생'의 삶을 살려고 노력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일상이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물론 예전에 항상 일어나던 습관이 있어서 일찍 눈은 뜨지만 출근 준비 시간 직전에 직전까지 플레이브 영상을 보는 시간으로 쓴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책을 읽거나 영어 단어를 외우는 대신에 플레이브의 영상을 본다. 물론 그렇게 시간을 쏟은 덕분에 이제 커뮤니티에서 팬들이 하는 이야기나 멤버들의 관계성과 캐릭터, 밈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얻은 게 더 많았던 14일이라고 기억하고 싶다. 하지만 원래 있던 일상도 잘 살아내야 플레이브를 오랫동안 꾸준히 좋아할 수 있는 법.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어야 또 플레이브 굿즈도 사고, 이벤트도 참여하고, 콘서트도 갈 수 있으니까. 앞으로는 스스로 조절하는 팬의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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