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기술에 놀랐고, 그러다 음악에 입덕했다
플레이브(Plave)라고 버추얼 아이돌인데 얘네가 요즘 인기래요. 유튜브 영상에서 버추얼 멤버들이 손발이 꺾이는 오류를 내는데 그게 되게 웃기다는 직장 동료의 얘기였다. 그 자리에 있던 직원 몇몇도 그 영상을 봤다면서 함께 깔깔 웃었다. 요즘 세상에 별게 다 있네.
당시 나는 IT 회사에서 일하며 AI와 AR, VR의 차이 정도만 업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버추얼(Virtual)'이라는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몰랐다. 사실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당시 지식으로 짐작하건대, 버추얼 아이돌이란 AI로 만들어져 사람과 비슷해 보이려고 애쓰지만 결국엔 뻔하고 지루한 대답만 내놓는 컴퓨터 캐릭터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떈, 영화 'Her'처럼 인공지능이 사람의 마음까지 사로잡는 세상이 온건가 싶어 어쩐지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며칠 뒤 퇴근길에 문득 그 버추얼 아이돌이 떠올랐다. 얼마 전 대학 동창들과의 채팅방에서도 이 얘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얘네가 정말 요즘 인기긴 한가 보네. 얼마나 웃기다는 거지? 업무 스트레스로 지친 상태였기에, 강렬한 도파민이 필요했다. 유튜브에 '버추얼 아이돌'을 검색해 플레이브의 영상을 하나 클릭했다.
처음 본 영상은 플레이브 멤버들의 오류 모음 영상이었다. 지인들이 가장 많이 추천해준 영상이었고, 나 또한 그냥 생각없이 웃고 싶어 클릭한 영상이었다. 영상 초반에는 에러 때문에 당황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나오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에러가 난 상태를 대놓고 즐기고, 이걸 개그로까지 승화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영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버추얼의 개념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기술이고, AI가 사람인양 말하는 걸로만 생각했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거였다. 외형은 컴퓨터 기술이 들어갔지만, 그 안에는 실제 사람이 들어가 움직이고 있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 골룸이나 '혹성탈출'의 시저를 연기한 앤디 서키스처럼 말이다. 사람이 몸에 센서를 붙인 상태에서 움직이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캐릭터들이 사람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해 영상화되는 기술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기술의 디테일들이었다. 단순히 동작만 따라하는 게 아니라 눈동자나 입매의 움직임 같은 표정 변화부터 손짓 같은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섬세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어릴 적 1세대 버추얼 아이돌이었던 가수 아담을 떠올려보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아담도 실제 사람의 목소리를 따서 만들어진 가수라고는 하지만, 움직임이나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서 이질감이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레이브는 실제 사람과 거의 흡사한 느낌을 주었다. 외형은 순정만화 속 왕자님들처럼 비현실적이지만, 그들의 움직임이나 머리카락의 흩날림, 그림자, 표정은 사람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껍데기만 가상일 뿐, 나머지는 현실 세계의 인간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이걸 계기로 플레이브 영상에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멤버들끼리 하는 라이브 방송도 보고, 노래도 듣게 됐다. 라이브 방송에서 팬들과 소통하며 이야기하는 멤버들의 모습을 쭉 지켜보는 동안 버추얼이라는 처음의 낯선 위화감은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멤버들끼리 합이 잘 맞아서인지, 각자의 입담이 좋아서인지 2시간 넘게 진행되는 라이브 방송들도 꽤 볼만했다. 여기에 팬들이 라이브 방송의 재밌는 부분을 요약해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둔 것도 보며 퇴근길에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그쳤다면, 그러니까 가끔 웃으며 볼 수 있는 콘텐츠 정도였다면 나는 플레이브의 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결정적으로 플레이브의 팬이 된 계기는 그들의 음악이었다. 버추얼 아이돌이라 애니메이션 주제가 같은 노래를 부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플레이브의 음악은 굉장히 진지하고 좋았다. 특히 데뷔곡 '기다릴게'의 도입부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이란. 잔잔하게 시작되는 부드러운 멜로디에 쉽게 각인되는 가사와 후렴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특하고 매력적인 멤버들의 음색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룹의 음악이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내 편견을 서서히 깨뜨리기 시작했다.
플레이브의 음악은 요즘 아이돌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챌린지'를 염두에 둔 자극적인 후킹 음악과는 결이 달랐다. 단번에 중독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곡 전체의 밸런스가 좋고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곡인 것 같았다. 그래서 여러번 들어도 쉽게 질리지 않고 계속 흥얼거리며 따라부를 수 있었다.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옆에 있던 남편이 '또 그 노래야?'라고 고개를 절레절레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전혀 질리지 않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노래는 플레이브 멤버들이 직접 만든 곡이었다. 이 곡 뿐만 아니라, 플레이브는 모든 곡을 멤버들이 직접 작사·작곡하고 프로듀싱까지 맡고 있었다. 곡에 맞는 안무도 직접 제작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라이브 방송에서 오류로 웃음을 주던 멤버들이, 알고 보니 이렇게 프로페셔널했다니. 세상에 이런 높은 퀄리티의 자작곡을 만드는 아이돌이 다 있구나.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점차 호감으로 변해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