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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아는 사람

유진목의 작은 여행

by 김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따져 보면 뭔가를 한다. 하루에 두 시간 삼십 분은 알바를 하고 설거지도 하고 코스트코도 간다. 책을 읽고 유튜브도 편집하고 고양이 화장실도 매일 청소한다. 도서관에도 가고 빨래도 매일 하고 운동도 한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지?
왜 이렇게 바쁜 건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서 내가 하루 동안 하는 일을 적어 보니 진짜 뭔가를 많이 한다. 산다는 거는 참 소란하다.
이런 똥 같은 생각이 들 때는 시인이 쓴 시나 산문을 읽자. 이를테면 유진목의 슬픔을 아는 사람 같은 책. 나는 어쩌다 넝마가 되었나 하는 의문이 들 때 마침 눈앞에 나타나 읽은 책.




나는 이제 싸우는 게 힘이 든다. 너무 오랫동안 싸우면서 살았다. 내가 무엇과 싸우면서 살았는지 지금은 쓰고 싶지 않다. 다만 오래 싸워고 끝이 났다고만 쓰고 싶다. 간밤에는 홀가분한 마음이 벅차기도 하여서 혼자 울다 취침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싸우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히 잊어버린 참이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싸우면서 살았다. 싸우는 사람은 싸우느라 너무 힘이 들어서 다른 것에는 자연히 무감해지려 한다. 그래야만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까스로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은 아무것에도 반응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나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상담의를 찾아가 말했다. 좀더 무감하게 해주세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 좋겠어요. 약을 먹으면 뒤척이지 않고 곧장 잠들었으면 좋겠어요. 상담의는 내 말을 곰꼼이 듣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마취예요. 그날은 나도 상담의를 따라 웃었다. 요즘도 가픔씩그 말이 생각나서 피식 웃곤 한다. 어쨌든 긴 싸움도 끝이 났다. <슬픔을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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