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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Dec 07. 2024

노동을 재미있는 놀이처럼


"자유로운 놀이로서의 노동은 관리될 수 없다. 오직 소외된 노동만이 합리적인 루틴으로 조직되고 관리될 수 있다."(“Labor as free play cannot be managed. Only alienated labor can be organized and managed in rational routines.”)(허버트 마르쿠제, <에로스와 문명> 중에서)


 허버트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우리의 일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노동 체계가 어떻게 인간을 소외시키는지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노동이 억압이 아닌 즐거움과 창의성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통찰을 바탕으로, 노동이 단순한 생계수단을 넘어 삶을 풍요롭게 하는 활동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사회적 규범과 책임을 따르기 위해 즉각적인 욕구를 억제하는 현상을 '현실원칙'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컨대 당장 월급을 탕진하고 싶은 충동이 들더라도, 미래를 위해 저축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과 개인적 목표 때문에 자제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마르쿠제는 이 개념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면서, 자본주의가 '성과원칙'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강력한 억압을 가한다고 봅니다. 이는 단순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차원을 넘어, 끊임없이 더 많은, 더 빠른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집니다.


 성과원칙 아래에서 노동은 개인의 성취감이나 행복과는 무관하게 오직 생산성과 이윤을 위한 도구로 전락합니다. 공장 노동자들은 자신이 만드는 제품의 쓰임새도 모른 채 기계적으로 같은 동작만 반복하고, 콜센터 상담원들은 하루 종일 비슷한 대화를 되풀이하며 진정한 보람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일은 창의적이고 즐거운 활동이 아닌, 단조롭고 무의미한 것으로 변질됩니다. 마르쿠제는 바로 이처럼 노동이 우리의 삶과 단절되어 단순한 생존 수단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비판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흔히 하나의 상품처럼 취급되며, 그 본질적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배달 노동자의 예를 들어보죠. 그들은 음식을 배달하지만, 그 음식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주문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물건을 옮기는 기계적인 역할에 그치고 마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노동은 단순한 물류 이동으로 격하되어, 일하는 사람이 자부심이나 의미를 찾기 힘들어집니다. 결국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남게 되고, 일 자체의 기쁨이나 의미는 사라져버립니다.


 마르쿠제는 노동이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놀이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그리는 노동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닌, 창의성을 마음껏 표현하고 그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활동입니다. 가령 가구를 만드는 목수를 생각해보세요. 그는 단순히 테이블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성과 기술이 담긴 작품이 누군가의 삶에 보탬이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그의 노동에 깊은 의미와 자부심을 불어넣습니다.


 마르쿠제는 현대 사회가 '성장'과 '성과'라는 미명 하에 불평등과 착취를 정당화한다고 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고 하지만, 실상 그 혜택은 소수 특권층에게만 돌아갑니다. 그는 끝없는 소비를 위한 노동 대신, 진정한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데 노동을 활용하자고 제안합니다. 자동화 기술의 발전으로 단순 업무가 기계로 대체되는 지금, 이 기술이 제대로 활용된다면 사람들은 반복적인 일에서 벗어나 더 창의적이고 교육적인 활동에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자동화가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을 뿐, 더 나은 삶의 발판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르쿠제의 통찰은 오늘날의 노동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워라밸을 추구하고 있죠. 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열 명 중 여섯은 과도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개인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이런 불만은 '조용한 사직'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프리랜서나 창의적인 개인 프로젝트를 선택하면서, 단순한 생계형 노동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기본소득(UBI)과 같은 정책적 제안은 생존을 위한 노동을 넘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자는 취지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마르쿠제가 꿈꾼 것처럼 노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대적 흐름을 보여줍니다.


 마르쿠제는 우리에게 일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의 변화를 촉구합니다. 노동은 단순한 돈벌이나 성과 달성이 아닌, 인간의 창의성과 기쁨이 꽃피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효율과 생산성에 매몰되어 있지만, 마르쿠제는 노동이 억압의 도구가 아닌 인간의 잠재력을 활짝 펼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유로운 놀이로서의 노동을 받아들일 때, 각자 일터로 향하며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얻을 행복과 보람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로운 놀이로서의 노동'에 무슨 성과에 대한 강요가 있으며, 관리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상상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되는 날이 꼭 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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