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철학과 뇌과학의 만남:감정 이해의 새로운 지평

by 정지영

정동(affectus)이란 신체의 활동력이 증가하거나 감소하고, 도움을 주거나 방해하는 신체의 변용들과, 아울러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을 의미한다." — 스피노자, 『에티카』, 제3부, 정의 3


17세기의 철학자가 오늘날의 뇌과학 연구실에 들어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뤼흐 스피노자가 뇌의 활동을 실시간 영상으로 보여주는 fMRI 스캐너를 마주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 상상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놀랍게도 현대 뇌과학이 밝혀내는 감정의 비밀이, 350년 전 스피노자가 홀로 써 내려간 철학적 지혜를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느끼는 것, 그것이 감정이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정동(affectus)'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말이 조금 어렵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바로 '외부 세계와의 만남으로 인해 내 몸의 상태가 변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잠시도 무언가와 만나지 않는 순간이 없다. 아침을 깨우는 햇살, 출근길의 소음, 동료의 칭찬 한마디, 혹은 나를 비난하는 듯한 상사의 눈빛. 이 모든 만남은 우리 몸에 미세한 흔적, 즉 ‘변용’을 남긴다. 스피노자는 이 변용으로 인해 우리 몸의 활동 능력(기운, 에너지)이 증가하거나 감소한다고 보았다.


가슴 뛰는 음악을 들으면 어깨가 들썩이고 생기가 돋고(활동력 증가), 반대로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심장이 쿵 내려앉고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다(활동력 감소). 이처럼 감정은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막연한 현상이 아니라, 우리 몸의 에너지가 실제로 변하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그 신체 변화에 대한 우리 마음의 알아차림, 즉 ‘관념’이 바로 우리가 느끼는 기쁨, 슬픔, 분노 같은 감정의 정체다.


즉, 스피노자에게 감정은 내면의 날씨와도 같다. 날씨가 기압, 습도, 풍속 같은 물리적 요소들의 조합이듯, 감정 또한 심박수, 호르몬, 근육의 긴장 같은 신체 상태의 총합인 것이다.



350년 전의 통찰, 뇌과학으로 증명되다

놀라운 것은, 스피노자가 아무런 과학 장비 없이 오직 사유만으로 도달한 이 결론을 현대 뇌과학이 최첨단 장비로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거 1: 감정은 몸에서 시작된다 (신체 표지 가설)

뇌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직감'의 실체를 연구했다. 그는 우리의 뇌가 어떤 선택을 앞두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결과가 가져올 신체 반응을 미리 시뮬레이션한다는 '신체 표지 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을 제시했다. 즉,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는 것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뇌가 예측한 부정적 결과에 대한 신체의 경고 신호(가슴 답답함, 식은땀 등)를 감지한 것이다. 이는 감정이 신체의 변화에서 시작된다는 스피노자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는 말은, 사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읽으라'는 과학적 조언인 셈이다.


근거 2: 생각의 연금술 (인지적 재평가)

스피노자는 "정서는 오직 다른 더 강한 정서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감정을 의지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는 더 강력한 '생각(관념)'으로 기존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다.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뛸 때, "나는 지금 불안해서 떨고 있어"라고 생각하면 불안은 증폭된다. 하지만 "성공적인 발표를 위해 내 몸이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거야"라고 의미를 재해석하면, 놀랍게도 불안은 기대감과 흥분으로 바뀐다.


뇌과학은 이 현상을 '인지적 재평가(Cognitive Reappraisal)'라고 부른다. fMRI 연구에 따르면, 상황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할 때, 우리 뇌의 CEO인 전전두엽이 활성화되어 감정의 경보 시스템인 편도체의 과잉 반응을 효과적으로 진정시킨다.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 뇌의 작동 방식을 실제로 바꾸는 것이다.


근거 3: 이름 붙이기의 마법 (감정 라벨링)

스스로의 감정을 명확히 아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힘이 약해진다는 스피노자의 통찰 역시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UCLA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막연한 불안이나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잠시 멈추고 자신의 감정에 "아, 내가 지금 실패할까 봐 두려워하는구나" 하고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편도체의 활동이 즉시 줄어들고, 이성적 분석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이 활성화된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켜듯,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행위는 우리를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나 관찰자의 위치로 옮겨준다.



희망의 근거를 찾다

이 놀라운 연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타인의 감정에 우리가 쉽게 전염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거울 뉴런', 스트레스가 우리 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또 회복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뇌의 가소성' 연구 등은 모두 스피노자의 철학이 얼마나 현실에 단단히 발 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이 책은 뇌과학 이론서가 아니다. 앞으로 이어질 본문에서 우리는 매번 뇌과학 연구를 인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이 장에서 확인한 '철학과 과학의 깊은 연결'을 하나의 단단한 발판으로 삼고자 한다. 스피노자의 지혜를 따라 감정의 구조를 이해하고(1부), 부정적 감정을 해체하며(2부), 관계 속에서 평온을 찾아갈 때(4부), 독자는 이 모든 과정이 단순한 마음의 위안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뇌를 건강하게 재편하는 과학적 근거를 가진 여정임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당신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감정 문제 앞에서 더 이상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고 자책하는 대신, "지금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라고 질문을 바꿀 수 있는 힘이다.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감정이라는 복잡한 시스템의 '원리'를 알려주는 길을 제시했다. 그리고 현대 뇌과학은 그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심지어 매우 효과적인 경로임을 증명하며 우리에게 '확신'과 '희망'을 준다. 철학의 빛과 과학의 빛이 하나로 합쳐지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감정 자유를 향한 탐험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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