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서를 조절하고 억제하는 데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을 예속(servitus)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정서에 예속된 인간은 자기 자신의 권리 아래 있지 않고 운명의 권리 아래 있어서, 자신에게 더 좋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
— 바뤼흐 스피노자, 『에티카』 제4부 서문
하루 생활을 돌아보며 몇 번이나 감정에 휘둘렸는지 돌아보자. 아침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많은 승객들과 부대끼며 엄습하는 불편함과 답답함이 낯설지 않다. 직장 동료가 무심하게 던진 한 마디에 받은 상채기가 며칠째 아물지 않아 아프다. SNS에 있는 지인의 행복한 일상에 대한 사진과 글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니 우울한 감정이 몰려 온다. 퇴근 후 거실에 앉아 습관처럼 넷플릭스를 보고 있다가 문득 허무함에 사로잡힌다.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고 잠을 청하는 데 내일에 대한 막연함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
감정은 파도와 같다. 우리 삶은 그 파도 위에 밀려서 떠다니는 패트병과도 같다.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자문하곤 한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하지만 그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또 다른 자극이 있다. 그 자극은 새로운 감정을 유발한다. 카카오톡 메시지, 유튜브 알고리즘, 인스타 스토 등 또 다른 감정을 일으키는 자극의 홍수 속에서 하루하루가 흘러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점점 감정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간다.
17세기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가 현재인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300년이 넘게 지났다. 하지만 그가 당시에 내렸던 '감정에 예속된 인간"의 불행에 대한 진단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하다. 현대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감정적 자극에 노출된다. 그로 인해 더 빈번하게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살아가야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본다면, 350년 전과 진단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정서의 예속' 상태에 있다. 아니, 더 심각하다. 디지털 시대의 현대인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감정적 자극에 노출되며, 더 빈번하게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스마트폰 알림이 울릴 때마다 우리 감정은 요동친다. '좋아요' 숫자에 일희일비한다. 읽씹에 불안해한다. 댓글 하나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좌우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타인의 삶을 들여다본다. 비교하고, 부러워하고, 때로는 우월감을 느낀다.
사실 이 모든 감정적 반응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게 아니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디지털 자극에 조건반사적으로 감정을 토해낸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의 자동 반응 기계가 되어버렸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들이 실체 없는 환상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SNS에서 보는 타인의 삶은 편집되고 각색된 하이라이트 릴(Highlight Reel)일 뿐이다. 우리는 그 화려한 결과물 뒤에 숨은 노력, 고통, 혹은 평범한 일상이라는 전체적인 원인과 맥락을 알지 못한 채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본다. 스피노자는 이처럼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불완전하고 왜곡된 생각을 ‘부적합한 관념(inadequate idea)’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삶이라는 부적합한 관념 위에서 좌절이라는 감정의 사상누각을 쌓고 있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은 감정 조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점에는 '감정을 다스리는 법', '분노를 관리하는 기술',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을 다룬 자기계발서가 넘쳐난다. 감정 관리 앱들이 인기를 끌고, 마음챙김 명상이 유행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을 통제하려는 노력이 강할수록 더욱 감정에 예속된다.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불안은 커진다. 분노를 억누르려 할수록 분노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폭발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조언은 때로 더 큰 자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스피노자는 이미 이런 현상을 통찰했다. 그는 정서를 단순히 억제하거나 제거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정서는 오직 다른 더 강한 정서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피노자의 통찰으로 보면 현대인의 실패는 감정을 이성으로 억누르려는 헛된 시도에 있다. 마치 파도를 주먹으로 막으려는 것과 같다.
진정한 감정의 자유는 감정을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원인이 외부의 자극인지 내면의 생각인지 구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동반사적인 반응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 더 이상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는 대신, 감정의 신호를 나를 더 깊이 이해하는 나침반으로 삼고, 그 에너지를 삶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됐다는 점이다. 하루 종일 외부 자극에 반응하느라 정작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감정이 일어날 때 왜 일어났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찰하지 않는다. 즉각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직장에서 상사가 지적하면 즉시 방어적이 되거나 위축된다. 연인과의 사소한 다툼은 곧바로 관계 전체에 대한 의심으로 확대된다. 자녀의 성적표를 받으면 아이보다 부모가 더 감정적으로 동요한다. 우리는 감정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처럼 끌려다닌다. 스피노자가 말한 '자기 자신의 권리 아래 있지 않은' 상태다.
이런 감정적 소외는 현대 사회의 특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적응해야 한다. 멀티태스킹이 일상이 되고, 깊이 있는 성찰의 시간은 사치가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고 이해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스피노자 시대에는 없었던 현대적 정념들도 있다. FOMO(Fear of Missing Out,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모든 곳에 있고 싶어 한다.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끊임없는 불안을 만든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확인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고,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면 소외될 것 같다. 이런 두려움은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박탈한다. 우리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만 한다.
'번아웃'이라는 현대적 증상도 있다. 성취와 생산성에 대한 강박적 추구가 우리를 감정적으로 고갈시킨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기쁨이 아닌 만성적 불만족을 낳는다. 스피노자 관점에서 보면 외부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는 시도에서 오는 필연적 결과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또 다른 감정적 도전에 직면한다. 온라인 페르소나와 실제 자아 사이의 괴리, 무한 스크롤로 인한 집중력 저하, 알고리즘에 의해 조작된 욕망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자극에 노출되어 자연스러운 감정 조절 능력을 기르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다.
많은 현대인들이 감정적 문해력(emotional literacy)이 부족하다. 화가 나면 '짜증 난다', 슬프면 '우울하다', 기쁘면 '좋다'는 단순한 표현으로만 감정을 설명한다. 하지만 분노에도 억울함, 실망, 배신감, 두려움 등 다양한 층위가 있다. 슬픔에도 그리움, 아쉬움, 절망, 멜랑꼴리 등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정확한 감정 어휘를 알지 못하면 자신의 내적 상태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적절히 대응할 수도 없다. 이는 감정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다.
오늘날 교육시스템도 감정 교육에 소홀하다. 수학, 과학, 언어는 가르치지만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다루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 결과 높은 학력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는 미성숙한 어른들이 양산된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는 개인 감정이 집단 감정으로 빠르게 확산된다. 한 사람의 분노나 불안이 네트워크를 통해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온라인 여론몰이, 혐오 감정의 확산, 집단 히스테리 현상 등이 그 예다.
이런 집단 감정에 휘말리면 개인의 이성적 판단력은 마비된다. 평소 온건한 사람도 군중 심리에 휩쓸려 극단적 행동을 하게 된다. 스피노자가 경고한 '정념의 모방'이 디지털 시대에 더욱 강력해진 것이다.
절망할 필요는 없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정서적 예속을 진단했을 뿐 아니라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제시했다. 핵심은 '이해'에 있다. 감정의 원인과 본질을 명확히 이해할 때 감정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는 폭군이 아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동반자가 된다.
현대 뇌과학은 스피노자의 통찰을 뒷받침한다. 감정을 인식하고 명명하는 것만으로도 편도체의 과잉 활성이 감소한다. 전전두엽의 조절 기능이 활성화된다. 이를 '라벨링 효과'라고 부른다. 감정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것. 이것이 감정적 자유로 가는 첫걸음이다.
또한 현대 심리학과 철학의 만남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인지행동치료, 수용전념치료, 마음챙김 기반 치료 등은 모두 스피노자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감정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로 여기는 관점, 현재 순간을 명확히 인식하는 능력, 생각과 감정을 분리해서 보는 메타인지 등이 그것이다.
우리 시대의 감정적 혼란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350년 전 한 철학자가 남긴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 감정에 휘둘리는 삶에서 감정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 이 책이 제안하는 여정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단순한 감정 억제법이 아니다. 그것은 삶 전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고, 필연성을 받아들이며, 이성과 감정의 조화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 여정은 쉽지 않다. 오랜 습관을 바꾸고, 깊이 뿌리박힌 신념을 재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자유다. 외부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내적 평정, 감정과 조화롭게 춤추는 삶, 타인과 진정으로 연결되는 관계의 기쁨이 있다.
스피노자는 이런 상태를 '지복(beatitudo)'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지속적인 만족감, 깊은 평정심,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이다. 이는 특별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신비한 경지가 아니다. 감정의 본질을 이해하고 적절한 방법을 익힌다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다.
이 책은 그 구체적인 길을 안내한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실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 기법들을 소개한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불안과 우울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건강한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감정의 경계’를 세워야 할까? 어떻게 하면 분노와 같은 격한 감정을 파괴가 아닌 창조의 에너지로 바꿀 수 있을까? 이 책은 바로 그 질문들에 대한 스피노자의 명쾌한 답을 담고 있다.
감정의 노예에서 감정의 주인으로. 이것이 스피노자가 제시한 인간 해방의 길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 지금 이 순간, 첫걸음을 내딛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