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실체와 양태 : 우리는 왜 감정에 휘둘리는가?

1부. 감정의 구조를 이해하기

by 정지영

"실체란 그 자신 안에 있고 자기 자신을 통해 파악된다. 즉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양태란 실체의 변용들, 즉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생각되는 것이다." — 바뤼흐 스피노자, 『에티카』 제1부 정의 3, 5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에 하루 종일 마음이 무너져 내린 경험이 있는가? SNS의 '좋아요' 숫자에 기분이 천국과 지옥을 오간 적은 없는가? 이처럼 외부의 사소한 자극 하나에 우리의 감정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약해서' 혹은 '의지가 부족해서'라고 자책하기 전에, 스피노자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는 이 현상이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비밀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 비밀을 풀기 위한 열쇠가 바로 '실체(substance)'와 '양태(mode)'라는 개념이다. 이 철학 용어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거대한 바다와 그 위에서 끊임없이 일렁이는 파도를 떠올리면 의외로 간단하다.


스피노자에게 '실체'란 바로 '바다' 그 자체다. 바다는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 반면 '양태'는 바다 위에서 잠시 일어나는 '파도'와 같다. 파도는 바다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바람과 해류, 다른 파도와의 관계 속에서만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스피노자는 신(혹은 자연 전체)만이 유일한 실체이며,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은 바로 이 거대한 바다의 일부인 '파도'와 같은 양태라고 보았다.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위에서 인용한 실체와 변용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를 살펴보자.(철학적 이해보다 실천적 활용에 초점을 두시는 분은 이 부분은 건너 뛰셔도 좋습니다.)


먼저 정의 3은 실체에 대한 정의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의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실체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며, 다른 개념의 도움 없이 오직 그 자체만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실체의 개념은 그것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의 개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정의는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 주장인 실체 일원론(Substance Monism)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다. 실체는 다음과 같이 독립성을 가진다.

존재론적 독립성: "자기 자신 안에 있다(in se est)"는 것은 실체가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원인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에티카』 1부 정의 1의 '자기 원인(causa sui)'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자기 원인이란 "그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즉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 존재를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오직 실체만이 진정한 의미의 자기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식론적 독립성: "자기 자신을 통해 파악된다(per se concipitur)"는 것은 우리가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 다른 어떤 개념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들'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모'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실체는 그러한 의존 관계의 정점에 있으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궁극적인 개념이다.


결론적으로, 스피노자는 이 정의를 통해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만약 두 개 이상의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서로를 구별할 수 있는 속성이나 본질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한 실체가 다른 실체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도 맺을 수 없으며, 따라서 서로를 제한하거나 구별할 수도 없게 된다. 이는 결국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일하고 무한한 실체, 즉 '신 또는 자연(Deus sive Natura)'만이 존재한다는 범신론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제 정의 5의 양태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양태를, 실체가 변화하여 나타난 모습, 즉 다른 것(실체) 안에 존재하며 또한 그 다른 것(실체)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양태에 대한 정의는 실체의 정의와 대칭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양태는 독립적인 실체와 달리 의존성을 가진다.

존재론적 의존성: 양태는 실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개별적인 사물들(유한 양태)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유일한 실체인 신(자연)이 무한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들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거나 사유될 수 없다.

인식론적 의존성: 우리는 개별 사물(양태)을 그것 자체만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을 낳은 근본 원인인 실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즉 그것이 신의 속성(사유와 연장 등)이 변용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참된 인식이 가능해진다.


정의 5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세계(양태들의 세계)가 사실은 단 하나의 근원적인 실체(신 또는 자연)의 필연적인 표현임을 밝히는 중요한 정의이다. 이는 세계의 모든 사물이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거대한 필연적 질서 안에 있음을 함축한다. 스피노자는 이 실체-양태의 관계를 통해 세계의 통일성과 합리성을 설명하고, 인간이 이러한 세계의 질서를 이해함으로써 정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실체인가, 양태인가?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의 독립된 존재, 즉 다른 파도와는 상관없는 개별 파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결정한다", "내가 느낀다"고 말하며 자신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이는 착각이다. 우리는 거대한 바다의 한 표현인 파도일 뿐, 결코 바다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다른 물 분자, 바람, 달의 인력 없이는 '나'라는 파도는 결코 홀로 일어설 수 없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음식을 먹고, 공기를 마시고, 타인과 교류하며 살아간다. 이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면 '나'라는 존재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연인과 헤어진 후의 슬픔이라는 파도는, '연인'이라는 다른 파도와의 만남과 멀어짐, '기억'이라는 과거의 물결, '미래'라는 아직 오지 않은 해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슬픔이라는 파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가 만들어 낸 나의 모습, 나의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의존적 본성'이다. 감정이라는 파도는 반드시 원인이 되는 바람(외부 자극)을 가지며, 결코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특정 조건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나

양태로서의 인간, 즉 파도로서의 우리는 철저히 관계적 존재다. 혼자서는 완전할 수 없으며 다른 파도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면 외로움, 사랑, 타인의 평가에 대한 민감함이 어디서 오는지 명확해진다.


[실습 1: 나의 관계 지도 그리기] 지금 '나'라는 파도는 어떤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잠시 멈추어 간단한 실습을 해보자. 백지를 꺼내 중앙에 '나'를 적고, 지금 나의 감정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들(사람, 환경, 기대, 기억 등)을 연결선으로 이어 그려보라. 당신이라는 파도가 얼마나 많은 다른 힘들과 연결되어 있는지 한눈에 보일 것이다. 이 지도를 통해 당신은 스스로가 고립된 존재가 아님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감정이 우리를 움직이는 이유

감정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우리 존재 방식의 변화 그 자체다. 기쁨이라는 파도가 밀려올 때의 나와 슬픔이라는 파도가 덮칠 때의 나는, 비록 같은 몸과 기억을 가졌을지라도 전혀 다른 존재(양태)다. 감정이 바뀌면 세상을 보는 방식, 생각하는 패턴, 행동하는 양상이 모두 바뀐다.


감정은 우리 존재의 상태 변화를 알리는 가장 강력한 신호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무시할 수 없다. 감정의 신호를 읽는 것은 곧 지금 나의 존재 상태를 읽는 것과 같다.


[실습 2: 나의 양태 일기 쓰기] 하루 동안 자신의 상태 변화를 간단히 기록해보자. 언제, 어떤 만남(상황)으로 인해 내 안의 파도가 높아졌는지(기쁨, 활력), 혹은 잦아들었는지(슬픔, 무기력) 관찰한다. ‘오늘 팀장님의 칭찬에 기운이 솟았다’, ‘저녁 약속 취소 소식에 힘이 빠졌다’처럼 간단하게 적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자신의 상태가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양태’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자유를 향한 첫걸음

자신이 바다가 아닌 파도라는 사실, 즉 실체가 아닌 양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굴복이 아니라 해방의 시작이다. 독립적이고 완전한 존재라는 환상을 버릴 때, 역설적으로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파도의 본성을 이해하면, 파도의 모양을 바꿀 방법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파도는 다른 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관계를 바꾸면 '나'라는 파도의 모습도 바꿀 수 있다. 나를 침울하게 만드는 관계(파도)를 멀리하고, 나에게 활력을 주는 관계(파도)를 가까이하는 것은 존재론적 변화를 위한 능동적인 시도다.


이는 감정 조절이 아니라 '감정 재구성'이다. 감정을 억지로 누르는 대신, 감정이 일어나는 조건을 바꿈으로써 자연스럽게 다른 감정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실습 3: 작은 관계 변화 실험하기] 이번 주, 당신의 일상에 작은 변화를 시도해보라. 평소 가지 않던 길로 산책하거나, 매일 마시던 커피 대신 차를 마셔보거나, 연락이 뜸했던 친구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보는 것이다. 이 작은 관계의 변화가 당신의 상태(양태)를 어떻게 다르게 만드는지 호기심을 갖고 관찰해보라.



새로운 자기 이해의 시작

'실체와 양태'의 구분은 자기 이해의 혁명이다. 고립된 개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 만물과 연결된 관계적 존재라는 새로운 자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전환은 감정에 대한 태도도 바꾼다. 감정을 통제해야 할 '내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상태의 신호'로 보게 된다. 감정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변화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정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양태로서의 자기 이해는 우리에게 겸손함과 동시에 희망을 준다. 겸손함은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인정하는 데서 온다. 희망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기에, 더 나은 상태로의 변화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온다.


이제 존재의 기본 구조를 이해했으니, 다음 장에서는 이 구조 안에서 감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마음과 몸이 어떻게 하나의 춤을 추는지 더 자세히 탐구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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