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등을 쓰다듬던 기억들로
일 년이 넘도록 밥을 주고 있는 길 고양이가 있다. 이름은 치즈, 나이는 알 수 없고 품종은 이름이 암시하듯 황색 태비 무늬를 가지고 있으므로 코숏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치즈는 일반적인 코숏 종과는 다르게 연한 살구색을 띠고 있어서 독보적인 아름다움으로 존재감을 달리하고 있는데, 지극히 애정의 관점이므로 믿거나 말거나다.
어쨌든 날이 막 서늘해지던 가을의 초입에, 발 가는 데로 터덜, 터덜 동네로 걸어 들어오던 그날의 퇴근길에도 치즈는 그 자리에 있었다. 벌어진 송곳니로 야옹, 하는 소리를 만들며. 밥을 달라는 신호였고 나는 약속처럼 밥을 대령하였지만, 그리고 밥 먹는 치즈의 살구빛 등을 흐뭇하게 쓰다듬었지만 그날은 아직 나무가 단풍을 맺지 못한, 바람이 서툴게 차가워지던 날이었다. 그러니까 내 생애 두 번째 공모전에 글을 부쳤다가 낙방을 한 날이었다.
선반 위에 책 좀 정리해, 하고 집으로 올라온 내게 엄마는 말했다. 공간만 차지하는 책 좀 그만 사. 강산이 바뀌는 세월 동안 반복되던 말이지만 그날엔 반항 없이 알겠어, 하고 대답했다.
실로 책은 공간을 아주 많이 차지했다. 나는 회사에서 진급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업무 자격증을 따야 하는데, 그러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인데 내 시간의 공간엔 책과 글로만 가득했다. 하루에 열두 시간에 달하는 업무 시간 외에는 운동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야 할 텐데 틈만 나면 읽고 쓴다. 언젠가는 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인생의 희망이 되었으니 마음의 공간에도 책과 글은 부피의 전부를 차지한다.
노랗게 변색된 책에서 작은 벌레가 나왔던 어느 날과, 지난해 이사를 하며 책장을 옮기던 센터 인부의 지친 표정이 번갈아 불현듯 떠올랐다. 어쩌면 책과 글을 향유함이란 스스로의 삶을 벌레가 좀먹도록 방기해 두는, 또 타인에게 부담을 사고 최종적으로는 아무에게도 환대받지 못하는 삶으로 만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고작 두 번째 낙방이었는데, 내게는 이 오만함이 간절함에 비례하는 이상한 법칙으로 작용되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김금희의 소설 속 한 구절처럼 이루지 못한 꿈만큼 귀찮은 일은 없는 것이었다. 나는 딱 한차례의 큰 숨을 쉬고 침대를 박차고 나와 알라딘에 팔아버릴 책을 한 곳에 모았다. 공간을 줄일 셈이었다. 나는 원래 실패를 두려워하고 회복 탄력성까지 좋지 못해서 이렇게 밖에 대처할 수가 없어, 하는 생각을 하며 간절했던 만큼 유치해졌다.
향유의 감각이 아닌 숙지의 감각으로 책과 글을 마주하자는 조용한 다짐으로 초가을을 지났다. 사랑의 대상이 종국에는 아픔의 주체가 될 것이라는 화자 없는 격언을 곱씹으며 가을의 바람을 천천히 보내주었다.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 밥을 버는 일은 비할 수 없이 유효하니까, 또 거대하니까, 그러니까..
하지만 내가 잊고 있었던 건 치즈가 한 계절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까슬해지는 피부와 늘어나는 식욕으로 겨울의 도래를 눈치챘지만 치즈는 더 이상 자리에 없었던 것이었다. 종적을 감춘 적은 처음이었다. 가을에 배가 불뚝해있었는데 수컷이니 임신일 리는 없고 복막염에 걸린 것이 아닐까, 하고 엄마는 말했다. 치사율 백 프로라는 그 병으로 아무도 모르게 어딘가에서 죽은 것은 아닐까.
겨울은 추운 계절이므로 잠시 방황을 하는 것은 괜찮으나 치즈가 완전히 죽어버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매일 밤 밥을 갈구했던, 그러나 한 번의 애교도 피우지 않던 치즈. 먹고 나면 휑-하고 멀리 도망가는 것이 괘씸하여 츄르까지는 건네지 않았던 것이 보잘것없는 후회로 남았다. 잠정적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길었다. 작은 인기척에도 치즈야? 하고는 차 밑을 예민하게 훑어보는 일을 반복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나는 돌아오지 않을 길 고양이를 애도하며 의외로 직감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내가 그리워하는 건 같은 자리에서 밥을 기다리던 네 모습, 살가운 제스처 한 번 없던 네 무뚝뚝함, 같은 특정 순간과 부분이 아닌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너를 불변하게 즐거워했던 전체의 감각이라는 것이다. 나는 치즈의, 치즈와의 모든 순간을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책과 글은 내게 두 번의 낙담을 안겨주었지만 삶의 무수한 구간 속에서 뭉근하게 곁을 내어 주었다. 이 모든 순간이 내가 잃고 싶지 않은 어떤 여정의 전체 중 일부라는 생각이 들자 사랑은 오히려 깊어진다. 그렇게 낙담은 좌절이 되지 않고 미완의 아름다움으로 얼마든지 남을 수 있게 된다. 성공과 실패의 가름이 없는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간다.
책이 차지하는 공간을 조금도 줄이지 않았다. 어제는 두 권을 더 샀고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일단 이불 밑으로 숨겨 놓았다.
글의 자리로 돌아온다,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