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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 Jan 02. 2022

EPI 04. 그 골목 상가의 한약방

2014년 여름으로부터 온 기한 없는 선물

네가 먹은 한약 값으로 집 한 채는 샀겠다, 엄마는 종종 말한다. 유년 시절부터 기관지 천식과 알레르기를 비롯한 각종 질병으로 한약을 달고 살았다. 생사를 오가던 순간도 여러 번이었고 분기마다 응급실의 문턱에서 죽음, 을 조용히 읊조렸던 기억은 지배적이다. 그러니 이제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한약방에서 2014년 여름, 보약 한 재를 지었던 건 그저 그랬던 루틴의 일부였고.


또렷한 형체로 한약사를 기억한다. 몸집이 크고 살집이 있고 특히 배가 나왔고, 거무스름한 안색으로 의사라면 마땅히 입어야 할 흰 가운이 부재한 차림새. 사십 중반 즈음으로 보이나 뒷방 노인 마냥 딸랑- 하는 종소리로 손님을 맞는, 그래서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싶었는데 목소리만은 청청한.


맥을 딱 보니 날이 서있어. 힘 좀 빼고 살아요,라고 한약사는 말했다. 고 3처럼 골이 복잡한 사람들을 위한 한약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어떤 약재와 배합으로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그 한약을 처방받았다.


색 바랜 낙엽처럼 변색되어 좀 허름한 상가에 있었다, 그 한약방은. 그리고 당시의 나는 빈맥 증상에 숨이 자주 찼다. 원인은 그냥 삶이 좀 버거워서, 정확히 말하자면 남들보다 깊게 느껴서였고 그래서 촌스럽게도 마음이 많이 다쳐있었고 불안이 목울대까지 압도해있었다.


한약사는 이 약은 스스로 연구해서 개발한 거라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한다고 했다. 약재의 비율이 제일 중요한데 황금 비율을 찾았다고도. 거슬릴 법도 한 잘난 체를 나는 밉게 받지 않았고 그건 실로 약의 효과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처럼 맥이 고르게 뛰기 시작했고 숨이 정확하게 쉬어지지 않던 증상을 덜었다. 두 재를 더 짓고자 재방문 한 차였다.


계절의 길목마다 쌓아 올린 한약사와의 친분은 대단할 것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게 배웠는데, 이를 테면 한약사는 세상의 모든 병을 한의학으로 고칠 수 있다고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마비를 겪은 먼 친척의 이야기나, 파킨슨병을 오래 앓고 있는 누구의 누구 이야기를 비밀스런 안주 삼아 담소를 나눌 때면 그는 그 청청한 목소리로 돈을 받지 않을 테니 한 번만 데리고 와달라고, 내게 말했다. 약을 지어주겠다고 그래서 낫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한 재고 두 재고 연구를 해볼 것이라는 한약사는 마치 파킨슨병 환자가 눈앞에 있듯 약재를 읊었다.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한약의 위대함에 대한 찬사로 들렸고 나는 그것에 관해선 대체로 동의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복잡해졌다.


보안 센서도 없고, 구식 대기실 의자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하물며 자기 브랜딩이 이토록 중요한 시대에 흰 가운 하나 차려입지 않고 뭘? 일단 박하니 비파엽이니 하는 곁다리 약초들 좀 끼워 팔고 철마다 이벤트부터 열으셔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저는 중국산 약재는 절-대 안 씁니다 절대!라고 목청만 높여서는 어떤 발길도 끌 수 없다고.


이듬해 한약방은 폐업을 했고 엄마는 한약사가 맞은편 양약국에서 한약국 구획을 만들어 환과 쌍화탕을 팔고 있다고 했다. 나는 같은 보약을 한 재 더 짓고자 그곳으로 발걸음 했고, 그는 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일 년이 지났는데도 쉽게 나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엔 어딘가 좀 애잔한 구석이 있어서 마음이 맹랑했다가, 이내 아 그 한약 픽업이죠? 하는 익숙한 젠체에 슬그머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약재 수급이 필요해 한 달 전에는 연락을 달라는 말을 약과 함께 받았다.


오만이었을지도, 연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의 크고 투명한 약탕기가 시야에 없음을 확인하곤 그것이 무슨 감정이 되었든 세상을 조금 원망했다.


꿈, 실력, 자부심 그런 거는 아저씨만 있는 거 아니니까 갖출 것들을 갖추었어야 한다고, 되뇌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질문에 덫처럼 갇혀 오랫동안 반문했다.

그래서 한약사는 무엇을 더 갖추어야만 했을까.


약국마저 폐업을 하고 이제는 무의미해진 질문을 여전히 붙들고서, 나는 당신에게 더 늦지 않게 어떤 헌사를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당신을 초롱불 같은 영감으로 삼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당신처럼 꿈 이야기를 하면 눈이 반짝이고 그것을 세상의 가장 숭고한 위치에 두기로 결심한 사람이.


문학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굳건히 하며 나는 당신을 떠올린다. 봄의 바람처럼 가벼운 사람 마음이 무엇이라고, 그것을 울릴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의 일부는 당신이 남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연필로 눌러 담은, 전략 없는 필사 문장들을 영원처럼 떠돌 수 있는 힘 또한.


때로는 투박하지만 위선이나 기만 없이, 순정만을 담아 이 길을 걷기로 한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빚이 있다 나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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