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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 Dec 31. 2021

EPI 02. 오랜 친구 J

어제도, 오늘도 너를 사랑해

“말간 뺨, 섬세함 속에 잔 다르크 같은 단호함이 한줄기 서린 눈빛, 작고 야무진 입매. 다른 이의 장점은 그렇게 정확히 찾아내면서 자신은 ‘변덕스러운’ 존재로 칭하는 윤동주적 부끄러움이 향도하는 그녀의 자의식을 ‘아름답다’ 외에 어떤 정확한 어휘로 포착 할 수 있을까.” 


J는 지난주에 나에게 이 글을 선물했다. 내가 생각하는 너는 이래, 하며 자정이 넘은 시간에 파일을 전송해왔다. 나는 퇴근을 마치고 새벽 택시에 몸을 실은 채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새벽에 자리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이 되겠으나 J는 그저 그런 누군가가 아니고 내게 아주 각별한 사람이므로 나는 한껏 들뜬 마음이 되었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며 J가 보내온 파일을 클릭했다. 심장이 쿵,쾅 뛰었다.

 

J와 나는 스무 살에 뉴욕에서 만났다. 정확히는 뉴욕의 한인 교회에서 만났다. 그때의 나와 J는 강박적 완벽주의 성향과 남 앞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설익은 20대 초반의 자존심을 무기로 시절을 통과하던 중이었다. 그러느라 우리의 관계는 교회의 찬양 팀 싱어와 새가족팀 봉사 일원으로 도리를 다하는 선에 그쳤던 것 같다. 기도 해줄게, 하는 차원의 교류에 애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딱 그만큼의 무게와 견고함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에게 이토록 강한 애정을 느꼈나, 하고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20대의 절반을 건널 무렵이었다. 졸업을 앞둔 그 시점 성공이 아니면 죽음이던 그때부터. 타인의 시선을 넘어 스스로의 기준에 부합해야만 울지 않을 수 있던 어린 우리는 누구보다 뜨거웠다. 우리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고, 그 감각은 당시의 모든 관계까지 절절하게 만들었다. 불안에 바들 떨던 날들이 지속되던 어느 밤, 우리는 내가 기억할 수 없는 하루의 흐름을 따라 우연하게 흉금을 털어놓는 시간을 가졌다. 캔들을 사이에 둔 채 불안,으로 말미암은 이야기를 하며 물밀듯 새벽을 보냈다. 불안의 감정마저도 수치스러워 원인을 먼 과거로부터 길어 올리며 서로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던, 그렇게 눈물을 삼켰던 그 밤. 그 밤을 통해 나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는 불의 속성이 사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정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밤을 기점으로 J와 나의 관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단단해지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가끔 불안하지만 그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고 다만 얼마나 회사를 다니기 싫은지, 얼마나 한국 꼰대가 별로인지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감명받은 책 속의 구절을 보내주며 와 소름, 소름 하며 일상을 지키는 힘을 함께 키워나간다. 그 시절 먼 타지에서 울고 싶을 때 가장 먼저 J의 얼굴이 떠올랐다면 이제는 좋은 일이 생겼거나, 누군가를 망가뜨리고 싶은 나쁜 마음이 들 때에도 가장 먼저 J를 떠올린다. 우리는 덜 처절해도 여전히 뜨겁다.
 
차가 막혔고 삼십 분 거리가 한 시간이 된 귀갓길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몸이 좀 뻐근하기도 했고 겨울의 찬 바람을 호흡하고 싶어 집 앞을 서성였다. 그러니까 내일을 이유로 지금 이 밤을 보내야 한다는 건 왜인지 억울하게 느껴져서 그 때, 우리가 태우던 캔들과 그 밤의 잔상 같은 것들을 붙잡아보려 했다. 하지만 시간은 한 시가 넘었고 일곱 시간도 안 되어 출근을 해야 한다는 현실을 자각했을 때 아, 하는 탄식이 나오면서도 곧이어 내 삶에는 여전히 J가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지, 하는 안도감이 어떤 미련을 거두어가 주었다. 조용한 밤이었지만 적막하지는 않았다. 어렵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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