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사람들의 존재
때는 바야흐로 2016년, 무려 올 해로부터 6년 전 나는 #북스타그램 행성에 입성했다. 책을 읽고 책 사진을 멋들어지게 찍어, 독후감을 곁들어 포스팅 후 #북스타그램 해시태그를 다는 것이 룰인. 그러면 친구 북스타그래머가 좋아요를 눌러주고, 더 좋으면 댓글도 달아주는데 그래도 더 좋다면 다른 게시물에도 좋아요와 댓글을 달아준다.
2016년이라 함은 최순실 게이트가 일어난 해다, 태양의 후예가 방영되었을 때이고 – 그러니까 송송 커플이 이혼이라는 저만치의 문턱을 감지하기도, 넘기도 전에 사랑을 싹 틔우던 때. 알겠는가, 그러니까 왜 내가 ‘라떼’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지.
라떼는 북스타그래머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책을 읽는 사람의 수는 육 년 후인 지금보다 많았을 것이니, 커뮤니티 형성이 미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이버 상에서 얼굴을 모르는 이에게 누구 님, 하는 문화 또한 지금처럼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 북스타그래머의 담장에 하트 뿅뿅 박수 짝짝을 날리고 다음날 출근을 하면 혹시 이들 중 나와 사이버 교제를 하고 있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곤 했다. 혹은, 부사수의 실수에 누구 님 이거 더블 체크 안 했어요? 하고 짜증을 팍 낼 때면 어젯밤 얼굴 모르는 이에게 세상 친절하게 남기었던 안부가 동시에 떠오르며 스스로의 가식, 부조화 같은 것들에 마음이 부끄러워지기 일쑤였다.
다만 나라는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꾸준하게 매우 진지하고, 사색하는 인간이기에 나와 비슷하게 지루한 이들과의 대화가 역설적으로 너무도 재미있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을 파헤쳐야만 했고 위대한 개츠비가 왜 위대한지 토로해야 했으며, 작가 김훈에 대한 사랑의 헌사를 써야만 했다. 나를 포함한 우리는, 마음속에 붉은 숯덩이를 품고 첫사랑을 대하듯 책과 글을 대했다. 형형색색의 책을 포장지로, 오래 묵은 내면의 아픔 같은 것들을 글로 반사하는 치유의 글쓰기를 시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얻은 좋아요와 댓글은 일종의 치유제가 되기도 했으니까. 팔로워를 늘려 비즈니스를 홍보하거나 크리에이터로 거듭나 볼 셈이었던 몇몇도 있었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힘없는 것을 힘을 들여 사랑하는 일이란 그 자체로 숭고했다. 북스타그램은 내게 상상 속 사랑방의 실체이자 실현이었다.
나와 더불어 이제는 고인물을 넘어 시조새에 등극한 북스타그래머들의 행방은 가지각색이다. 최소 천 명 즈음의 팔로워를 거닐고 있기도 하고 출간 작가가 되기도 했으며 잠깐 떠납니다, 하고는 영영 돌아오고 있지 않은 이들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게시물이 500개에 달하도록 꾸준하게 읽고 쓰고 있는 이들도 많은데, 나는 바쁜 본업을 이유 삼아 게 중 가장 불성실하고 또 변덕스러운 인물로 남아 오랫동안 계정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연애로 치면 누구도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고질적 문제를 가진 오랜 연인처럼 소란스러웠다. 오랜 연인이 권태기 끝에 아슬하게 관계를 회복하듯 늘 불안정한 상태였다.
역시는 역시, 권태의 오랜 싫증은 회복의 짧은 기쁨보다 힘이 세지 않던가. 고질적 문제는 결국 터져 관계를 파국에 이르게 하지 않던가. 나는 나의 계정에 거의 일 년 남짓 아무런 소식을 전하고 있지 않다. 문자 그대로 시조새로 남아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부끄럽게도 어떤 낯짝은 남아 있어, 서점에 갈 때면 나와 한 때 열띠게 토론했던 친구 북스타그래머를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꼭 한다. 신간을 읽을 땐 날고 기는 평론가의 평보다는 그들의 감상이 궁금하다. 중고 서점에서 책 한 더미를 업고 실을 때면 혹시, 아주 혹시 그들이 되판 책이 여기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한다. 어떤 기억은 오랫동안 바래지 않고, 그건 내가 끝끝내 붙잡고 있기를 선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내게 MBTI를 물어 올 때, 인생 소설을 궁금해하는 이들을 어떻게 붙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를 INTP보다는 소설 <롤리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알아봐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금세 연해진다.
보드러워진 마음을 들고 시조새가 된 나의 북스타그램 계정을 훑어본다. 가장 먼저 친구들의 책글을 읽다가, 불현듯 먼짓 공기 가득한 나의 계정을 검열한다. 나만 아는 사활을 다했던 분투의 흔적들이 보인다. 그래 봤자 멋 부린 낱말과 숙취처럼 남겨진 과잉의 문장들. 부끄러워질 참에, 이런 생각에 가닿는다. 알고도 넘어가 주는 것은 사랑의 형태가 아니던가. 그런 맥락에선 이 부끄러운 글을 눈에 담아 주었던 이들보다 더 큰 사랑을 베풀었던 사람은 없었다는 생각이 찔끔 든다, 피식 웃는다.
어쩌면 내게 특별한 글쓰기 능력이 있다고 믿게 해 준 사람들.
읽는 사람으로의 정체성을 확립해준 사람들,
내가 가장 내밀하게 좋아하던 일을 당당하게 사랑할 수 있게 조력해준 사람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아직도 책을 읽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물어올 때면 네 많아요,라고 대답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 제게는 심지어 독서평을 남기는 친구들까지 있어요. 낯을 세워 들고 대답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번 주말, 슬그머니 내 친애하는 이들에게 물을 타이밍이 왔다는 걸.
요즘에는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그리고 덧붙이겠다. 나는 요즘 오래전 사랑의 헌사를 바쳤던 김 훈의 신간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아직도 <롤리타>를 뜨겁게 사랑하고 개츠비는 언제나 위대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