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최선의 삶>과 함께
내가 가장 여리고 예민했던 중학교 시절에, 나의 할머니는 자살 기도를 했다.
나는 그날의 계절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는 할머니가 중환자실부터 일반 병동으로 옮길 때까지 자주 집을 비웠다.
성정이 강하고 굳센 엄마는 끝까지 울지 않았고, 그저 웃지 않는 상태를 오래 유지했다. 너무 큰 슬픔은 내면을 완전히 묶어 감정의 잠식의 상태를 만든다는 점을 알지 못했던 어린 나는 엄마가 야속했다. 왜 울지 않는 거야, 왜 계속 밥을 차리고 샤워를 하고 잠을 자는 거야, 왜. 할머니가 그렇게 끔찍하게 우리 곁을 떠날 수 있었는데. 나는 오롯이 혼자가 된 밤에 속죄하듯 자주 울었다.
삶의 영문을 알지 못했던 어린 내가 분명하게 알았던 것은 매 해 겨울, 할머니는 당신의 손녀에게 보자기에 곱게 담은 새끼 강아지를 선물했고 손녀가 좋아하는 뜨거운 뭇국을 자주 끓여주었다는 것. 그렇게 어린 나는 다정함을 당신으로부터 배웠고 그건 충분히 세상을 잃은 슬픔의 이유가 된다.
할머니는 쥐약을 마셨고 우리는 그 이유를 여러 갈래로 추측했다. 집안의 어린 종손을 뇌종양으로 일찍 잃은 슬픔이 지배적인 이유일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할머니는 그 때문에 죄책감을 이고 있었고 밤마다 흐느끼며 울었으니까. 아니면 오래전 입은 화상으로 살점의 일부가 잘려나감으로써 생긴 수치심 같은 평생을 아프게 했을 것이라고, 나는 몰래 셈했다.
할머니, 할머니가 좋아하는 9번 채널에서 여섯 시 내 고향 한다고. 오후 6시가 될 때 나는 특히 슬펐다. 종손을 잃고 밤마다 끊이지 않았다는 당신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품고 상상하는 방식으로 당신에게 가닿아보려 했다. 그렇게 번지던 슬픔이 겹겹이 쌓여 하루를 만들고, 이틀을 만들고 달을 건너 어느덧 나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정확히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척 웃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배웠던 것 같다. 다만 생을 삶 혹은 죽음과 같은 이분법으로 인식했던 당시의 나는 엄마에게 기어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왜 그랬냐고, 이유가 무엇이었냐고.
그냥, 순간 그렇게 하고 싶었대.
타버린 식도로 밥을 잘 넘기지 못한다는 점 이외에 할머니는 외려 활기차 보였다. 목숨을 던졌던 비장함은 온데 없고, 다시금 여섯 시 내고향의 자리로 돌아와 깔깔 웃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무구함만 있었다.
그냥 갑자기, 순간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대. 할머니의 평화로웠던 남은 여생이 증명했듯 그 대답에는 거짓이 없었다. 세상을 인과로 이해했던 어린 나에게 '순간, 그냥'의 미스터리는 오랫동안 머물렀다.
영화 <최선의 삶>에는 무해한 세 여고생, 강, 아람, 소영이 등장한다. 세 친구는 다방면에서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점과, 가출을 하고 싶다는 점은 같다. 영화는 어둡고 스산한 기운으로 우리를 세 친구와 함께 가출의 세계로 진입시킨다. 길을 벗 삼고 대가 없이 갈취한 물품과 푼돈으로 세 친구는 어렵게 여관을 얻는다. 그래도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게 위해 아람은 기어이 밤에 남자를 상대하게 되기도 한다. 도대체 왜, 따뜻하게 환대하는 집을 두고 그들은 이토록 가혹한 선택을 한 것일까. 이쯤에서 의문을 품었으나, 의문이 더 큰 의문을 낳기까지 채 십 분이 넘지 않지 않게 나는 서늘한 방에서 강과 소영의 갑작스러운 입맞춤을 마주한다. 이것은 성장 서사인가, 혹은 호기로운 가출담인가. 사랑인가, 우정인가, 호기심인가. 나는 빠르게 논리적 레이블링을 시작했지만 이내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건, 종국에 강이가 소영을 칼로 찌르는 장면 때문이었다.
강은 설명하지 않는다. 소영도, 아람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유를 가늠할 어떠한 단서도 주지 않은 채 그저 순간의 최선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진 생을 흘려보낸다. 분명한 이유 없이 그냥, 순간,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판단에선 최선이었기 때문일까.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곳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했으니까. 그렇게 순간의 최선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또 이유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직관으로 깨달았다. 생의 불가해함이란 순간의 최선들이 모여 숙명을 만드는 데에 있다는 것도. 하지만 나는 어쩐지 강의, 소영의, 아람의 삶이 아주 꼿꼿하고 기품이 넘친다고 생각했고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우정과 미래를 조각낸 '순간의 최선의 선택'들 때문이다.
할머니는 사건 이후 10년이 넘도록 평화로이 여생을 보내셨다. 성경을 읽고 강아지를 키우셨다. 그 일은 한 겨울날의 악몽처럼 잠깐 두려웠을 뿐 우리에게도 각인된 아픔으로 남지 않았다. 가끔, 나는 당신의 선택이 여전히 옳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분을 냈다가, 당신이 분명하게 더 나아지고 싶어 했다는 마음을 기억하면 고요해진다. 가장 아프게 진실했던 당신으로부터 왜인지 용기를 얻는다. 그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이제는 헤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