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아닌 날에 문득 떠오른 당신에게
이직을 했다. 과도한 야근과 곤두선 신경 줄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오랜 입버릇의 결실이었다. 주 육십 시간에 달하는 노동 시간과 함께 켜켜이 쌓인 불만은 삶을 전방위적으로 위협했으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한 숨부터 나왔고, 전날 밤의 야근으로 증폭된 근육통과 그 현장의 실태를 여실히 증명하듯 맥이 풀린 눈은 새로울 것 없는 일상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다가 주름이라도 얻어걸리면 이까짓 돈 몇 푼이 뭐길래? 하는 생각이 들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직을 했다.
새로운 회사에 가면 ‘라라랜드’가 펼쳐지던가? 그리피스 천문대를 배경으로 동화같이 몽글한 구름과 보랏빛 노을이 내리쬐며 나만을 위한 스포트라이트 무대가 펼쳐지던가. 그건 아니지만, 그러니까 내가 샛노란 원피스를 입고 춤을 출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니지만 이직의 현실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내 평생의 사랑은 문학이지만, 그와 얼추 유사한 웹툰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된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하긴 한다. 매일 밤 적지 않은 시간을 웹툰을 읽으며 보낸다. ‘콘텐츠’이라는 장르 아래 내가 원했던 건 정통 발라드였다면 후크 댄스 블록에 어쩌다 착지를 하게 된 느낌이긴 하지만 통속 오락일 뿐이라고 단정 지었던 웹툰으로 힐링을 얻으며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하는 생각도 종종 든다.
더불어 나는 웹툰 작가가 평생의 꿈이었다던 당신이 떠오른다.
그는 이번 생에는 글렀고, 다음 생에는 웹툰 작가를 해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그림을 잘 그리시냐고 나는 여쭸고 그는 그림에 소질이 없으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잘 그릴 일이 없으니까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배곯는 작가보다는 배부른 중소기업 사장이 낫다는 확신을 가지면서도 그래도, 돈이 줄 수 없는 창작자의 자유와 자기 확신의 불가해한 매력을 사랑하는 개인이기도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런 건 이미 그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닿았는데.
이를 테면 이런 일화들을 당신을 그렇게 기억하게 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직전 떠났던 베트남 출장에서, 우리에게 미국 유학하며 겪었던 가장 ‘미친’ 에피소드를 물었던 일. 팀장과 나, 그리고 당시 주임이었던 동료 K는 ‘누구의 누구’ 탈을 쓴 에피소드를 하나씩 꺼내었다. 음주 운전을 하다가 경찰한테 적발된 썰, 전 남자 친구와 기숙사 룸메이트가 바람이 났던 썰.
덕분에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고 다들 호락하지 않은 인생길을 걸어왔다며 추억에 발을 한쪽 걸치고 있을 때, 그는 너네 참 순탄한 인생을 살았다며,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더라면 약에 빠져 아마도 지금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언뜻 듣기에 엉뚱한 그 발언에 우리가 깔깔 웃었던 건 그 발언엔 실로 효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로서의 위치와 권위는 둘째 치고, 무언가에 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젊은 그가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그의 무모함은 심심치 않게 발현되곤 했다. 날도 아닌 날에 갑작스레 책 몇 권을 매고 지리산에 간다던가, 생각 정리가 필요하다며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는 날 동안 그곳에서 머문다던가.
지리산 공기를 마시고 난 후에는 한층 더 강렬해진 눈빛으로 우리를 더 자주 집합시켰고, 다짜고짜 우리 팀이 최고, 라는 말을 하곤 했다. 우리 팀이 최고야, 우리 회사가 최고야.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너희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해.
그런 그를 두고 몇몇은 금세 피곤한 얼굴을 했다. 소위 어떤 ‘미친’ 일을 들고 오려고 설계하는 밑밥이냐며 레퍼토리가 진부하다고 했다. 예상은 자주 적중했고 우리는 최단 시간에 어워즈 준비를 했고 홍보 뉴스레터를 만들었다. 그래도 그는 무례한 광고주를 너희들이 힘들면 다 부질없다는 말과 함께 특유의 결단력으로 끊어 주긴 했으니 완전한 워스트는 아니었다. 소위 ‘돈줄’에게 NO를 고한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어쩌면 이런 것이야말로 행동 기반의 리더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적지 않게 들었다. 몇몇은 여전히,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은 당신이라며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런 나날들로 가득했다.
사직서를 쓰며 그와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셨을 때를 오후 두 시로, 가장 환한 낮으로 기억한다. 그는 나를 잡으려 한참 열변을 토했고, 나는 계획에 없던 눈물을 흘렸다. 당황한 그가 냅킨을 뽑아 엉성하게 뭉쳐 건네주던 장면을 기억한다. 냅킨을 건네받으며 그의 손바닥을, 정확히는 그의 막쥔 손금을 잠깐 훔쳐보았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 눈에 담아 놓았던 대박 아니면 쪽박이라고 불리는 두 줄의 일자 손금을. 모 아니면 도인 그를 가장 필연적으로 설명해주는 듯하여 볼 때마다 이상하게 무른 마음이 되던.
그는 나를 가리켜 D 대리는 세상에서 제일 마케팅을 잘한다는 말을 거듭했다. 세상에 없던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삼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그 말은 묘하게 강해서,
그가 그린 웹툰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밤. 문학이고 웹툰이고, 자고로 예술이란 어쩌면 그처럼 ‘미친’ 구석이 있는 자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낙서처럼 하며.
그가 그린 웹툰을 읽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의 이직을 뒤돌아보지 않을 것 같다고 몰래 생각해 보는 밤, 그런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