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얼마 전 찬장에 구겨진 A4용지 더미를 꺼내어 정리하다가 서툰 글씨로 적힌 할머니의 레시피가 귀여워 토시하나 고치지 않고 몇 문장 옮겨 본다.
멸치국물 - 멸치머리때고 살짝 복는다.
- 다시마 15분-20분 정도 끓인다.
마늘 보관 법 - 통마늘을 팬에 노랑복다가 바질을 넣고 복다가 빠다를 녹여서 종이에 돌돌 말아서 냉장고에서 굳혀서 두고 두고 필요할때 썰어서 쓴다.
오이피클 - 오이 3각 쓸어서 또는 둥글게, 쏘스 - 물 2컵, 설탕 1컵, 식초 1컵, 소금 2큰술 - 팔팔끓인다.
피클링 스파이스 (향신료) 와 피클을 썩어서 그릇에 담아낸다.
할머니는 예전부터 늘 반찬 통 뚜껑 위에 매직으로 무슨 반찬인지 써 놓으시는 습관이 있다. 잘 지워지지도 않는 매직으로 매번 다른 걸 넣을때마다 지울 것도 아니고, 안을 보면 아는 것을 왜 적어놓는지 여러 번 말씀드려도 고추장, 쌈장, 빠다 등 본인이 생각할 때 내용물이 헷갈리는 그릇엔 꼭 적어 놓으셨다. 투박한 그 글씨체에 할머니의 마음이 묻어나는 건 왜일지, 언제든 빠르고 쉽게 글을 쓰고 맞춤법 검사까지 받을 수 있는 요즘 시대에 할머니의 느리고 부정확하지만 꾹꾹 눌러담은 글씨는 잊고있었던 사람내음을 불러일으키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할머니는 고집불통에 참 다른사람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다가도 냉장고를 열고 고추장을 찾을때면 뚜껑부터 보고있는 내 자신을 눈치챌 땐 머쓱함에 피식 웃음이 난다.
어렸을 적 부엌은 할머니가 쓰고 계시지 않을 때만 출입 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물건이나 재료가 할머니의 동선 위주로 구성되어있어 지금도 할머니가 계시지 않을 땐 할머니께 전화를 걸어 물어봐야 하는 점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방해가 되니 저리 가 있으라며 멀찍이서 할머니의 분주한 뒷모습을 구경하곤 했던게 엇그제 같은데 이제는노파심에 부엌일도 안해봐서 남편 밥 챙겨주며 살아갈 수 있겠냐며 핀잔을 놓으시는 아이러니는 도무지 그러려니 넘어갈래야 넘어갈 수가 없다. 부엌에 출입할 수 없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였다. 지금에서야 설거지도 잘하고, 청소도 깔끔하고, 때론 엄마보다 더 주부같은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일이든 남자가 해야하는 일, 여자가 해야하는 일로 나누기 보단 누구든 더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간단한 이치를 왜 할머니는 받아들이시기 어려운 걸까? 미래의 나도 손주, 손녀에게 아이러니한 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순리인 걸까? 그때가 되면 이 글을 다시 돌아보며 어린 내 자신을 상기시킬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나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족 모두 부엌에 둘러앉았지만 부엌에서 방까지 1m 거리도 되지않는 거리를 우리 삼춘은 또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또 그런 삼촌한테 나눠 주겠다며 생일 케잌 한조각을 작은 접시에 덜어 가져다 주시려는 할머니를 아빠는 엄마가 이렇게 다 가져다 주고 시시콜콜 챙겨주니 저놈이 더 감사한지 모르고 저러는 거라며 막아섰다. 할아버지, 아빠, 삼촌, 우리집 남자들은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할머니의 무한 챙김을 받아왔다. 사실 삼촌은 할머니가 계시지 않을때면 혼자 파를 송송 썰고 계란 탁 해서 라면도 끓여먹고 혼자서도 매일마시는 콜라, 과자를 사러 편의점에 다녀오기도 하고, 불꺼진 저녁이면 한마리의 들개처럼 본인만이 아는 장소에 깊숙이 쟁여놓은 간식을 주섬주섬 꺼내먹기도 한다. 아빠는 종종 할머니랑 늘 같이 사니까 받기만 하는법만 배워서 다 큰 성인인데도 요리 몇가지 할 줄 모른다며 투덜거린다. 예전 응답하라 1988에서 엄마가 없던 하루 동안 어찌저찌 남자 셋이서 잘 지낸모습에 엄마는 돌아와서 서운함을 느끼는 장면을 떠올려보며 어쩌면 그게 할머니가 살면서 구축해온 본인의 존재 이유이자 자긍심일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입장에서 본인의 손을 탈 사람이 줄어드는 일은 점점 삶의 맛을 잃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들들도 이제 어느새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가 되었던 나이가 되어가고, 손주, 손녀까지 독립을 할 나이가 된 시점에 주변에선 일좀 줄이시라고 백날 이야기 한들 굴지의 할머니 파워는 막을 수 없다. 얼마전에도 온동네에 떨어진 은행을 주서와 베란다에서 까는 바람에 온집안에 은행냄새가 가득차기도 했었더랬다. 그러고 바로 아프다고 끙끙하시는게 문제긴 하지만. 3세대가 함께 조용할 날 없는 우리집, 투닥투닥 거려도 이정도면 잘 살고있는 것 아닐까? 할머니, 할머니가 살고싶으신 인생 생일케잌에 초가 가득할때 까지 건강히만 사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