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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poty Nov 26. 2023

19.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

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할머니는 오늘도 핸드폰과 씨름 중이다.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하고 유튜브에 하염없이 무한 재생되는 거짓 뉴스를 끝이 언제 나는지 보시다가 지치기도 한다. 어제 알려준 기능을 오늘 또 까먹고 오늘 또 알려드려도 내일 또 까먹을게 분명하다. 할머니가 밖에서 쓰러지실까 봐 핸드폰을 만들게 됐는데, 실제론 받지 않거나 집에 놓고 가는 일이 부지기수다. 처음엔 할머니는 모르시는 게 당연하니 최대한 친절히 답해드려야지 마음먹지만 사람이 쓰기 좋게 발달된 터치 기능조차 집 전화기 번호 자판을 누르시듯 꾹꾹 누르셔서 앱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더 보기” 가 떠 10분이 넘게 시작 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하다 보면 보면 굳은 다짐이 무색하게 생각보다 빨리 울화통이 터지곤 한다. (그 여파에 할머니는 나에게 잘 물어보지 않으신다) 아무거나 눌러보다 보면 깨우치는 아이들에 비해 핸드폰 세계에서 할머니는 모든 돌다리를 두드리고 계신 셈이다. 꽤나 오랜 반복 후에 이제는 제법 이런저런 기능을 익히신 할머니, 만보기에 만보를 채우겠다고 핸드폰을 흔들기도 하시고 (정작 걷진 않음) 토스로 포인트를 주서 모으기도 하신다.

할머니에 비하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나도 점점 “도전”이라는 타이틀이 버거워지기 시작한 요즘. 때때로 할머니는 살면서 몇 번이나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익숙해지셨을까 생각해 본다. 또 앞으로 내 앞엔 몇십 가지가 남아있을까, 나는 그때마다 어떤 자세로 어떻게 새로운 것들을 마주할까.


할머니께 유튜브라는 신세계가 펼쳐진 후 보지 못하던 음식들이 식탁 위에 종종 등장한다. 아무리 요리 마스터라도 처음 하는 음식은 어설프기 마련이다. 유튜브에 나오는 레시피에 할머니의 요리습관을 합쳐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음식들이지만 또 먹어보면 미묘하게 할머니 음식 맛이 나는 점이 신기한 포인트다. 마치 경지에 다른 예술가의 그림에선 어떤 그림이든 같은 그림체가 묻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일례로 계란 토마토, 할머니가 처음 만드신 계란 토마토는 말 그대로 계란과 토마토였다. 흥건히 흘러나온 토마토의 수분에 맘대로 익어버린 계란이 둥둥 떠다녔다. 이건 어디서 온 음식이냐고 여쭤보니 그냥 핸드폰에서 나왔단다. 그다음 식탁에 올라온 계란토마토는 수분감이 잡힌 상태였다. 또 그다음엔 올리브 향이 추가되고, 또 그다음엔 얼추 중식당에서 먹어보던 계란 토마토의 형태가 나왔다. 수면 위에선 보이지 않는 오리의 발처럼 할머니도 혼자서 다분히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하고 있던 것 이리라. 그래도 여전히 크림파스타는 브로콜리가 사골국처럼 고아져 입에 넣자마자 흐물하게 녹아버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나 보다.


주말 아침이면 가족들에게 전매특허인 콘티넨탈 브렉퍼스트를 해주는 낙으로 사시는 우리 아빠, 전매특허 요리를 늘려 가려고 나름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고 싶었던 터였지만 수십 년간 할머니의 공간인 부엌에 아빠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다 며칠 전 할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아빠가 점심에 류수영 레시피로 떡볶이를 해주시겠다고 선언했다. 전매특허인 몇 가지 요리를 제외하고 시도하지 않았던 아빠, 우리 집에선 굉장히 신선한 선언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 재료가 어디 있는지 몰라 SOS를 치는 바람에 할머니는 그 틈을 파고들어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코치코치 파고들어 30%는 예상과 다른 레시피로 아빠는 자기가 생각한 결과물이 아니라며 투덜댔지만 모두 아빠의 떡볶이를 맛있게 나눠 먹었다.  어쩌면 발 디딜 틈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깨지 못했던 고정관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 해를 마무리할 시기가 왔다. 3년 전부터 이맘때쯤엔 남자친구와 신년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공유하는 게 우리의 연례행사가 돼버렸다. 일부는 함께하는 활동, 개인의 커리어적 목표, 친구와 할 일들, 약간의 도전 등이 포함돼있다. 처음엔 예를 들면 세계여행과 같이 인생 전체에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많지만 막상 내년이라는 마감일이 생기고 나면 생각보다 적을게 많이 없어진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단순히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일을 적는 것인데도 지레 안될 거라고 겁을 먹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것 일지도, 아니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반되는 노력을 들여서 해내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서 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은 60% 이상의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적어둔다. 이것이 일단 현재 내가 낼 수 있는 용기의 최선이다. 아마도 앞으로 갈수록 70%…80%… 더 안정적인 것들을 추구하겠지.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작은 변화든 큰 변화든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무엇을 해보려는 자세, 해보고자 하는 마음가짐만으로도 우리는 잘해나가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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