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어쩌다 보게 되었는진 기억나지 않지만 지난주부터 아사다 가족이라는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를 왜 보고 있다라고 표현하냐면 한 번에 다 보기 아까워서 자기 전에 조금씩 끊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늘 아끼다 똥된다셨지만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게 생기면 그게 뭐든 꼭 아껴 먹고, 아껴 쓰곤 했다. 다시 살 수 있는 물건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라도 빨리 닳아 없어질까 봐 혼자서 마음 졸이곤 했다. 돌이켜 보면 마음이나 생각이 없는 물건이라도 정을 나누는 그 순간의 내가 좋았던 것 같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아사다 가족은 아버지가 물려준 카메라로 아버지의 꿈이었던 소방관 콘셉트를 시작으로 어딘가 독특한 가족사진을 찍기 시작해 여러 가지 굴곡을 걸쳐 "남의 가족사진을 누가 보냐"라는 틀을 깨고 책도 출간하게 되고, 상도 받고, 이윽고 가족사진작가로 거듭나는, 그런 삼삼한 이야기다.(지금까지 본 내용) 혀를 자극시키는 조미료가 판을 치는 세상에 가끔 이런 집밥을 먹는듯한 삼삼한 영화를 보고 있자면 생각할 겨를 없이 보던 유튜브와 다르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내용을 놓치기도 하지만.
연초,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으레 '올해는 이루고 싶은 일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의견을 나누는 일을 즐긴다. 단순하게는 살을 빼고 싶다, 애인을 만들고 싶다부터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계획들 까지 최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고 듣으려고 하는 편이다. 어쩔 땐 내가 생각하지 못하던 목표를 들으면서 영감을 받기도, 예상외의 답변에 상대가 새로이 보이기도, 그런 건 부답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단호히 잘라내는 사람도 있다. 전자를 듣고 싶은 의도가 짙게 담긴 질문이라는 건 당연히 부정할 수 없지만 올해, 지난해 가장 기억에 남는 답변은 '작년처럼 최악이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였다. 듣는 순간 그 사람의 한 해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느껴져 마음이 저렸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올해 소망을 물은 지는 꽤 오래전이라 기억이 흐릿했다. 언제나 비슷한 일상 속에 어떤 소망이 있으실까 크게 궁금치 않았던 것도 있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혹시나 또 다른 부잣집 아들, 딸 들과 내가 해드릴 수 없는 일에 대해 비교를 늘어놓으실지, 필요악인 부담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지레 겁을 먹고 묻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이참에 큰맘 먹고 할머니께 '할머니는 올해 하고 싶은 일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는 눈빛도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나온 대답은 의외로 개인적이고 소박했다. '하루만 이곳저곳 안 아프고 지나갔으면 좋겠어'. 또 마음 한쪽이 저릿해 할머니의 눈을 보고 있기 힘들어 시선을 돌렸다. 이어 이제는 보고 싶은 사람이 하늘에 더 많다며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으시는 바람에 질문에 비해 오래 딴 길로 새 버려 저릿함은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어찌 되었던 할머니의 소망은 여전히 내가 들어드릴 수 없는 답변입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왜 진작 물어보지 않았을까 조금 후회가 되면서도 이제라도 묻길 잘했다고 생각이 들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도 이곳저곳 아프시다던 할머니는 이곳저곳 돌아다니시며 잔소리를 하고, 부엌 잔일을 다 본인 손으로 하셔야 성이 풀리시고, 그것도 부족해 노인정 대청소도 마치고 돌아오신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를 위해 늦은 시각에도 자다가 일어나 나오셔서 또 국을 데우시고, 밥상을 차려주신다. 영양제를 한 손 가득 드시고, 앉을 때마다 요새는 기운이 없다며 곡소리를 내시다가도 한약을 지어드시곤 조금이라도 기운이 솟는 날엔 또 훌쩍 노인대학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오시기도 한다. 이게 바로 우리 할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