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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경 Oct 20. 2023

BTOB

40대 직장맘의 자가충전

고등학교 1학년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나는 Yanni의 Live At The Acropolis앨범을 듣고 있었다. 그때 나는 'enthusiasm: 열정, 열광'이라는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20년도 지난 일이지만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손등에 쏟아지는 물과 설리번 선생님이 손바닥에 써 주는 글자가 Water라는 걸 깨닫는 바로 그 순간에 헬렌켈러가 느꼈던 깨달음과 전율을 이해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20년도 더 지난 그 일이 떠오른 건 그 순간의 전율을 다시 느꼈기 때문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어떤 노래를 들었는데 소름이 돋으면서 고1 야간 자율학습 시간으로 돌아간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여러 명의 보컬이 화음을 넣어가며 같이 노래를 부르며 동시에 래퍼가 랩을 더하는 노래였다. 여러 번을 반복해 들어도 처음 그 전율은 여전했다.


그렇게 나는 비투비라는 그룹의 팬이 되었다. 명창 아이돌이란 명성에 걸맞게 라이브 실력이 출중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식 음원보다 콘서트 음원을 더 좋아하는데 비투비는 내 선호도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준다. 심지어 MR을 제거한 음원인데도 MR이 없다는 걸 노래가 끝날 때까지 깨닫지 못할 때도 있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에는 나보다 어린 가수는 드물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 아이돌은 오빠나 언니였다. 10대 소녀시절도 아니도 40대 중년시절에 나이는 10살 이상 어린 아이돌의 팬이 된 나 자신이 나에게 낯설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더 낯선 내가 나타났다. 그들의 라이브 노래를 실제로 듣고 싶어진 것이다. 움직이기 싫어하고 사람 많은 곳 싫어하는 나인데, 팬심은 사람을 많이 바꿔놓는다.


"엄마, 블랙핑크가 서울에서 콘서트 할 거래. 월드투어 마지막 무대야. 꼭 가야 해."


강물이는 1년 넘게 블랙핑크의 팬이다. 덕분에 나도 그녀들의 노래를 여러 곡 알고 있다. 몇 달 전의 나였다면 강물이의 열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가지 못하게 설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다르다. 한편으로는 교통편이나 안전 문제로 걱정이 되긴 하지만 보내주고 싶었다. 부모의 대리만족인지도 모른다.


강물이는 블링크(블랙핑크 팬)가 되었고 콘서트표 예매 모의 연습을 마쳤다. 콘서트 표를 예매하는 건 생각보다 복잡했다. 팬클럽 회원은 선예매를 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강물이는 팬클럽 회원이 되었고 그 밖의 궁금증은 팬카페 게시판에 질문을 하며 답을 찾았다.


예매 당일 강물이는 컴퓨터 앞에 앉아 한 손엔 마우스 다른 손에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고 나는 그 옆에서 내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컴퓨터 화면 속의 카운트다운 숫자를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8:00 정각이 되고 바로 각자의 속도로 터치했는데 대기 숫자가 30000명 이상이었다.


강물이의 컴퓨터가 제일 빨랐다. 우리는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강물이는 티켓예매를 성공했다.


콘서트는 일요일(9월 17일)이었다. 콘서트 장(서울 고척돔)에 가까워지자 블링크로 추정되는 옷차림이 하나 둘 나타났다. 외국 팬들과 우리나라 팬들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베트남인으로 추정되는 두 소녀는 블랙핑크가 무대에 입고 나왔던 옷을 제작해서 입고 그녀들과 똑같이 화장을 했고, 태국인으로 추정되는 소년들은 블랙핑크 굿즈를 여러 개 들고 있었다. 타국까지 콘서트를 보러 오는 그들의 팬심과 실행력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콘서트장에 도착하자 사람이 어마어마했다. 평소에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던 강물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콘서트 굿즈를 받으러 줄을 섰다. 사람 수에 비례해 줄도 길었는데 강렬한 햇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누구 하나 짜증 내는 사람이 없었고 질서 정연했다. 콘서트는 저녁 6시에 시작하는데도 아침 일찍부터 나와있던 사람들 모두 지친 기색 없이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콘서트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쯤으로 추정되는 아이들 무리도 있었고 혼자서 온 소녀도 있었다. 블랙핑크 콘서트에는 암묵적인 드레스 코드가 있는데 검은색과 핑크색이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검정 면 티셔츠, 핑크색 트레이닝바지, 운동화 차림이 여학생이 지나가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순간 나는 그녀의 젊음도 부러웠지만 그 만족감이 더 부러웠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던 순간이 얼마나 있었나. 별로 없었다. 하고 싶다가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스스로 찾으며 포기한 순간이 더 많았다.


"엄마, 제니가 나랑 눈 마주치면서 인사해 줬어. 동영상으로 찍어놨어."


흥분한 강물이는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쉰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왔다. 나는 머릿속의 상념을 날리며 강물이를 맞았고 그의 콘서트 후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군산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완전히 방전된 강물이는 전혀 뜻밖의 말로 나를 감동시켰다.


"엄마, 내가 비투비 25주년 콘서트 꼭 보내줄게."


내가 비투비 콘서트에 가고 싶은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이 콘서트를 즐겨보니 엄마에게도 경험시켜 주고 싶어 졌을까? 강물이는 저 말을 남기고 잠에 빠져버렸고 나는 혼자서 생각이 깊어졌다.


생각해 보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뒤늦게 찾고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포기할 이유를 찾을 때 나이, 시간, 비용이 가장 큰 요인인데 나이의 벽은 넘을 수 있게 되었다. 어디선가 읽었다. 나이도 스펙이라고. 차곡차곡 쌓인 스펙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꼭 사용하고 싶다.


그나저나 데뷔 11년 차인 비투비는 25년이 될 때까지 활동을 계속해야 하고 나도 그때까지 콘서트에서 방방 뛸 수 있는 체력을 길러야 한다. 지금 나를 충전시키는 건 비투비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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