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알코올을 거부한다. 이 사실을 깨달은 건 대학 신입생 첫 엠티에서였다. 그 뒤로 나는 술자리에서 맥주는 맥콜로 소주는 사이다로 '짠'을 했다. 내 인생에 알코올은 필수요소가 아니었다.
강물이와 마이산이 초등 저학년일 때 반 아이들 엄마 모임이 있었다. 몇 번의 모임 후에 저녁 식사에 이어 술자리까지 이어진 자리에서 나는 여느 때처럼 콜라(미처 맥콜을 준비하지 못했다)를 마셨다. 그때 한 엄마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무슨 재미로 살아?"
순간 나는 뾰족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애매한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찬찬히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는 재미라...
어떤 질문은 그 당시에 바로 해답을 찾지 못했다가 시간이 흐르고 나서 우연한 기회에 갑자기 떠오르기도 한다. 나를 충전시키는 것들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나는 나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기도 한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앨범 속의 사진으로 보아 꽤 잘 자라온 듯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내성적이 되었지만 사는 데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중고등학생 때 지루한 학교 생활과 밤늦도록 이어지는 야간 자율학습을 이기게 해 준 것은 친구들 그리고 그들과 같이 마신 자판기 커피였다. 그 시절 우리는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마시면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대학생이 되어 새로운 친구들과 카페 출입을 시작했다. 조용한 음악에 편안한 의자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 중고등학생 때와는 다른 어른이 된 느낌이 들었었다. 커피 맛은 잘 몰랐기에 우리는 '블루 마운틴'이나 '카푸치노'를 즐겨 마셨다.
사회인이 되어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커피믹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직장인에게 커피는 맛이나 여유가 아니라 생존이었기에 진한 커피를 필요로 했다. 그러다 결혼하고 학원 운영을 시작했다. 남편과 나는 건강을 생각해 커피믹스를 끊고 블랙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처음에는 연하게 마셨다. 그러다가 '카누'가 출시되었고, 우리의 입맛에 딱 맞았다.
그때부터 우리 집에는 쌀은 떨어져도 '카누'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최소 6개월에서 1년 분량을 창고방에 쌓아두어야 마음이 편했다.
커피는 여러 효능이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커피에는 '카페인'이 있어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에 아침에 첫 커피를 마실 때에는 입에서 식도를 지나 위장까지 커피가 내려가는 느낌을 즐겼다. 실시간으로 몸이 깨어나는 느낌도 같이.
또 처음 만나는 사람과 쉽게 같이 마실 수 있는 음료도 커피이다. 약간의 어색함도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 사라진다. 소개팅을 카페에서 시작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남편과 나도 처음에 자판기 앞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밥을 같이 먹기 시작하고 술자리에서 같이 어울리고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었다.
5년이 전의 질문의 답이 갑자기 떠올랐다. 나에게 사는 재미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에 커피가 같이 있었다. 날씨가 더울 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추울 때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여느 날보다 피곤할 때는 '커피믹스에 카누 한 봉지를 더해서', 친구를 만날 때는 '바닐라라테', 배가 부를 때는 '에스프레소'.
카페의 바리스타의 손을 거친 커피 원두를 추출한 원액에 물만 더하거나, 우유와 바닐라 향이 같이 더해지고, 내가 집에서 '카누 한 봉지' 또는 '커피믹스에 카누 한 봉지를 더해서' 만드는 커피는 모두 나의 활력소이다.
육아를 하던 시절에 바삭거리는 과자를 먹다가도 마시는 건 커피였고, 고등학생 시절에 아침밥 대신 매점에서 김밥을 먹을 때에도 자판기 커피를 같이 마셨다.
남편과 사이가 좋을 때에도 같이 커피를 마셨고, 싸웠을 때에는 혼자 마시지만 화해할 때에는 커피와 함께였다.
술을 마시는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기분 좋은 날에 마시는 술은 달고 슬플 때 마시는 술은 쓰다."
나에게는 커피가 그렇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님이 아팠던 이번 여름, 그때 마시던 커피는 썼다. 늘 마시던 같은 커피였는데에도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최근에는 강물이와 마이산과 같이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아들과 같이 마시는 커피는 남편과 마시는 커피와는 달랐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서 좋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빨리 자라서 아쉽기도 한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고 마시지만 커피는 맛있다.
열다섯 살 무렵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으니 내 삶과 커피는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분리시키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 가끔 '하루에 커피는 몇 잔이 적당한가'라는 기사를 볼 때도 있지만 나는 나 자신에 관대한 만큼 내 몸과 감정이 원하는 만큼 카페인을 베풀기로 했다.
지금보다 더 어리고 젊은 시절에는 커다랗고 특별한 일에서만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삶의 노하우가 축적되고 그래서 약간은 지혜로워진 것 같다. 삶의 작은 부분들이 소중해졌고 그래서 사소한 일들이 더 잘 느껴졌다.
자연식물식을 시작하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이 가뿐해졌고, 학원 운영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을 매번 마지노선으로 미뤄두고 늘 게으름을 피우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 일들을 해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이 기쁨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느낄 수 있다. 이 기쁨들은 모이고 차곡차곡 쌓여서 나에게 자부심을 채워 준다.
곤돌라를 타고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에도 행복하지만 아파트 안에 있는 나무에 까치가 있다면서 웃음이 섞인 아이의 말을 들을 때에도 역시나 행복하다. 커피도 역시 그렇다. 카페에 가서 마시는 커피도 집에서 매일 만들어 마시는 커피도 또한 맛있고 카페인도 같은 용량으로 채워 준다.
요즘 나를 충전시켜 주는 것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비투비의 노래'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커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