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 시험관, 유산 '빼고' 아무거나
소파술을 한지 몇 주가 흘렀다.
몇 주 뒤 병원 약속을 잡았기에, 당분간 난임병원을 갈 일은 없다.
유산을 하기 전 두 달여간의 임신기간이 있었고, 유산을 한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그러므로 '주사'와 '약' 같은 시험관 시술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안 한 지 꽤 되었다.
어느 아침 날이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텅 빈 거실에서 홀로 멍하게 앉아있었다.
발코니 밖을 무심히 보자 작게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고 차들이 빽빽하게 제갈길을 가고 있었다.
혼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유산을 했던가.
- 내가 시험관을 했었나.
- 내가 난임이었나.
-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 난 뭐지.
이 생각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현실감각이 무뎌지고 나의 존재의 이유(?)까지 의문으로 떠올랐다.
아, 이런 시간이 꽤 오래가겠구나
슬프게도, 나에게 남겨진 시간을 받아들여야 했다.
남겨진 시간을 보내는 방법.
임신을 했고, 유산을 했고, 소파술로 아이를 보냈고, 염색체 결과로 아이의 성별과 유산의 원인을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지난 임신에 대해선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으며, 지금은 다음 임신을 위해 몸을 회복하고 기다리는 시간이다. 나는 이 시간을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휴직을 하고 있으니, 집에 혼자 남아있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슬픔과 함께 짙은 우울감이 더욱 크게 내 마음속을 덮고 있는 느낌이었다. 가라앉고 가라앉고 가라앉아서 저 멀리 심해 어딘가 까지 갈 것 같았다.
난임을 받아들이고 시험관을 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1년 반정도의 내 인생은 시험관 밖에 없는 듯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과정을 겪었는데도, 이 기간 동안 결국 내게 남겨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무력감과 상실감, 그리고 우울감이 덧대어져 왔다.
우울감이 심해지니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아침에 일어나 남편이 퇴근하는 시간까지 '수술 회복'이라는 반 진실, 반 핑계의 마음으로 소파에 누워서 TV만 보았다.
이렇게만 보내고 있자니, 될 일도 안될 것 같았다.
내 인생은 [난임, 시험관, 유산] 밖에 없나? 그거 빼고도 많은데. 남겨진 시간 동안 다른걸 좀 해보자.
- 어떻게 보내야 할까.
-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거. 아주 작은 거라도. 그냥 작은 거라도 막 해보자
- 나에게 슬픔을 주는 어떠한 것도 일단 생각하지 말자.
난임, 시험관, 유산 '빼고' 아무거나
첫 시작은 생뚱맞게 '로봇청소기'였다. 로봇청소기를 사고 안 돌린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그냥 로봇청소기 시작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그게 싫어서 안 누르다 보니 집안바닥은 엉망진창이었다. 한동안은 더러워지는 것도 모르다가 어느 날 바닥을 보니, 한번 돌려볼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띠잉, 소리를 내면서 로봇청소기가 왔다 갔다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그냥 멍하니 소파에 앉아서 로봇청소기가 움직이는 걸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개운해졌다.
로봇청소기가 청소를 다 끝내고, 깨끗해진 바닥을 보면서 괜스레 마음이 뿌듯해졌다. '돌리기 잘했다. 깔끔하다'
그러면서, 아주 사소하지만 하나하나 마음 내키는 걸 해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읽고 싶은 책을 주문하여 읽었다. 다 읽진 않았지만 또 읽으니 나름 재미있었다. '재밌네'
오랜만에 점심을 먹고 커피를 내려서 디저트랑 먹었다. 시험관, 임신 때문에 카페인을 입에 대지 않았었는데.. 오랜만에 맛보는 커피 었다. '맛있네'
집 밖을 안 나가다가, 옷을 입고 동네를 산책하기 시작하였다. 가을햇살이 따사롭고 땀도 나면서 기분이 상쾌해졌다.'상쾌하군'
주말에 남편과 정말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였다. 맛있는 밥을 먹고 예쁜 카페에 갔다. 야외 자리에 앉아서 따뜻한 라떼와 케이크를 먹으며 사람들을 구경했고 풍경을 보았다. 평온한 주말,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슬쩍 들어가서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웃기도 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조금은 행복하다는 말을 해도 될까'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을 모두 뒤덮고 있던 난임, 시험관, 유산 '빼고' 아무거나 다 해가며 긍정적인 감정을 조금씩 쌓아갔다.
꽤 괜찮은 시간의 힘
정말 사소한 하나하나를 해나가며,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가다 보니 시간이 흘렀고, 내 인생에 난임, 시험관, 유산 말고도 다른 많은 것이 있구나 새삼 느끼면서 보내고 있다.
마음도 조금씩 평온해져 간다.
슬픔과 우울감 외에도 기쁨, 상쾌함, 즐거움, 그리고 행복감이 하나하나씩 내 감정들을 채워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따금 음악을 듣거나, 혼자 산책을 할 때 울컥하며 눈물이 날 때도 있다. 그럴 땐 그냥 눈물을 흘린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조금씩 조금씩 슬픔으로 뒤덮였던 마음의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는 느낌이다.
슬픔이 다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잔잔한 슬픔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항상 있다.
그러나 그 잔잔한 슬픔과 함께 기쁨도 즐거움도 행복감도 조금씩 느껴간다.
역시 너무나도 진부하고 뻔한 이야긴데 '시간의 힘'은 꽤 괜찮은 것 같다.
그렇게 진부하지만 확실한 '시간의 힘' 덕분에 나는 몸과 마음을 회복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또 한주가 흘렀고,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금요일이 왔다.
나도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로 묻혀 같이 금요일을 반기고, 평안하고 소소하게 주말을 보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