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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Oct 18. 2023

불안으로 이루어진 사람

정서(情緖)에 대한 편지, 유희

   약속했던 편지가 늦어졌습니다. 몸의 건강이 정신의 건강까지 해치는 바람에 며칠간 아무 글도 적지 못했습니다. 이경 씨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재발한 피부병으로 인해 꽤 괴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가려움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에 피부를 소독하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생긴 이 병은 피부에 동그란 모양을 한 습진으로 ‘화폐상 습진’이라고 불립니다. 엄청난 가려움과 진물을 동반한 이 병은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지요. 밤새 제발 좀 긁어달라는 피부의 신호를 이를 꽉 물고 참으며 나는 왜 아플까 생각하고는 합니다.      


   "이 ‘병’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어린 시절 살았던 마을은 장마철이 되면 물에 자주 잠기곤 했습니다. 그치지 않는 비에 강물이 넘치고 빗물이 계속 차올랐습니다. 어디가 강이고 길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여서 가족 모두가 작은 나룻배에 올라타던 기억도 나고, 밤새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에 대피하라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밤을 새운 적도 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는 불어난 강물이 거대한 짐승처럼 몰려와 죽을힘을 다해 자전거를 타고 도망친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기도 했고요. 어린 시절 보았던 이 많은 물이 가끔 꿈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물은 저의 불안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지요. 물을 닮은 불안은 자꾸 제 안에서 불어납니다. 불안은 저를 자꾸 긁게 만들고 저는 계속 악화됩니다.    

     

   저는 폭력이 난무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의 집에서 자랐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고 생활에 지친 어머니가 자식들을 소홀히 대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지요. 술 취한 아버지 좀 소설에 쓰지 말라던 대학 시절 스승님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만큼 많은 가정이 술 취한 아버지와 매 맞는 어머니로 구성되어 있었지요. 어쨌든 저는 이 뻔하고 진부한 환경 속에서 살아보려고 애쓰던 아이였습니다. 스스로 잘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말입니다. 다들 버겁게 자신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한 날은 술에 취해 잔뜩 화가 난 아버지가 창고에서 커다란 도끼를 들고 와 어머니를 향해 휘둘렀습니다. 어머니도 조금 술에 취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방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도끼를 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더 화가 나 어머니를 당장에 내리찍겠다는 동작을 했습니다. 

   도끼를 든 아버지와 무기력한 어머니. 그 사이에서 저는 피로 낭자해질 어머니의 몸과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연상되어 옆에 있던 책상 의자를 들어 올렸습니다. 아버지의 도끼날을 의자로 막아낸 것입니다. 몇 번의 도끼질로 의자는 산산조각이 났고, 아버지는 씩씩거리며 마당으로 나가 키우던 개를 마구 짓밟았습니다. 시골집에서 대충 막 기르던 개 답지 않게 유난히 검고 윤기 나는 털을 가지고 있던 개는 영문도 모른 채 발길질을 당했습니다. 개는 아주 고통스럽게 울었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생생해 저는 줄곧 불안합니다. 불안하게 살아있습니다.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 적이 많습니다. 아버지만 없으면 폭력도 없고, 지친 엄마도 없고, 불안한 밤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지만, 왜인지 저는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불안을 견딘 밤은 많았지만 물처럼 불어나는 불안을 말릴 방법은 모른 채 자랐습니다. 저의 몸은 불안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가려움을 참고 참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벅벅 긁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아버지가 엄마를 도끼로 내리치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처럼 말이지요. 그럼 마치 제가 그 기억 속 장면 안에 들어가 피부를 긁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생생합니다. 긁을수록 더 긁고 싶어지고 긁을수록 그동안 참아왔던 가려움이 한꺼번에 느껴집니다. 눈물 나게 시원한 감정을 느끼며 저는 그 장면 안에서 의자로 아버지를 밀치는 상상을 합니다.     

  ‘아버지 우리를 살려주세요. 그리고 이제 제 기억에서 사라지세요’.

   약을 먹지 않고 이 불안을 다스리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종일 몸을 움직이거나 어린 제 아이를 꼭 껴안고, 남편에게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일은 제 불안을 줄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불쑥 찾아오는 기억에 맞설 힘은 없습니다. 제 기억은 온전히 저만의 것이기도 하지만 제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아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 편지를 시작할 때 저는 피부병이 가장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편지를 마무리하는 지금은 강한 스테로이드 약을 먹고 병이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피부에 좋다는 영양제까지 챙겨 먹으니 며칠 전보다는 편안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가려움이 잦아드니 어린 시절의 기억도 드문드문 찾아옵니다.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다가 몸이 조금씩 회복이 되니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에 더 수긍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순서가 어찌 됐든 몸도 마음도 약해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쓰며 저를 이루고 있는 불안에 대해 그리고 이 불안을 제 안에서 바짝 말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연민이 가득한 편지로 읽혀도 어쩔 수 없지만 저와 오랜 시간 연대해 온 이경 씨에게 이 감정을 말할 수 있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경 씨와 앞으로 더 많은 편지를 주고받기로 했지요. 우리의 편지가 마침표를 찍게 되는 날, 불안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저를 소개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저는 불안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지만 이 불안을 몸 안에서 밀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의 편지를 쓰며 확인해나가고 싶습니다. 묻지 않아도 기꺼이 눈을 부릅뜨고 제 편지를 읽어 줄 이경 씨에게 미리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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