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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Jun 29. 2023

부끄러움의 뿌리

정서(情緖)에 대한 편지, 이경

    검색을 하다가 한 시간을 넘게 서핑에 빠졌습니다. 딴짓이라는 것이 그렇듯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대표의 인터뷰 기사, 서울 북쪽 어딘가에 있다는 맛집의 리뷰, 상 가득 올려진 음식을 먹지 못해 심통이 난 것처럼 보이는 강아지 사진 등등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것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디자이너도 아니고 서울 동쪽 구석에 처박혀 있으며 강아지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고양이는 좋아하지만 키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색색의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와 분홍색 발바닥, 복슬복슬한 털은 경이로울 지경입니다.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미양-하고 우는 순간을 볼 때면 마음이 사르르 풀어지지요. 하지만 고양이가 먹고 자고 싸는 것 그리고 아프거나 죽는 순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두렵고 참담하게 느껴집니다.  


    아, 지금도 다른 길로 새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제가 찾으려고 했던 것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이 단어가 사전에는 뭐라고 정의되어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부끄러워하는 느낌이나 마음’이라고만 설명되어 있더군요. 마음이라는 말만 해도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이라고 설명됩니다. 느낌이라는 말은 ‘몸의 감각이나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기운이나 감정’이라고 하고요. 부끄러움은 왜 부끄러움으로만 설명되는 걸까요?      


    유희 씨, 제가 언젠가 동물적인 것들이 싫다고 말씀드린 적 있던가요. 본능적인 것, 수사 없이 날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요. 우습게도 마음이 그렇습니다. 제멋대로 생겨나서 사람의 속으로 달려듭니다. 주인 없이 함부로 쏘다니는 들개와도 같습니다. 저는 애착과 음욕이라는 이름의 이 동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동물이 제 속에 산다는 사실보다 제 몸이 이 사실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껴왔습니다.


    저는 이제껏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말을 실감하고 살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컸던, 어떻게 해도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커다란 덩치를 부끄러워하고 원하는 만큼 살을 덜어내는 일에 번번이 실패하며 부끄러움만 계속 키워왔지요. 자라오며 결함을 극복(한다고 생각)하거나 포장하는 일에 계속 시간을 쏟아왔음에도 말입니다.


    원하는 몸을 만드는 원칙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음식의 양과 종류를 조절하고 몸이 노곤하도록 운동을 꾸준히 이어가면 되는 일입니다. 제가 더 많은 돈, 더 명예로운 직책, 더 좋은 학벌을 얻는 일보다 훨씬 쉽고 명료하지요. 욕심나는 만큼은 아니어도 약간은 성공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는 축적됐고 몸은 여전히 비대합니다.


    제가 열 다섯 즈음까지 엄마와 옷을 사러 가면 엄마는 ‘쟤가 덩치가 커서”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쟤가 덩치가 커서 맞는 옷이 있을지, 쟤가 덩치가 커서 이런 옷도 잘 어울릴지, 쟤가 덩치가 커서 더 비싼 것을 골라야 하는 건 아닌지 등등의 뉘앙스가 있었지요. 한 번은 겨울용 외투를 사러 들른 가게에서 옷 하나를 고르는데 삼십 분 가까이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크림색에 더플코트처럼 끈으로 단추를 여며 입는, 어깨 라인이 딱 떨어지는 짧은 코트였어요. 저는 그 옷을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사이즈도 맞고 원단 품질이나 마감 처리가 좋으니 사자고 말했고 매장 점원은 엄마의 말에 열심히 맞장구를 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골반을 겨우 덮는 짧은 기장과 벙벙한 품은 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데 옷 가격이 예상보다 비싼 것도 싫었고요. 옷을 벗고 이제 나가자 말하면 그만일 것인데, 그때의 저는 지금보다 훨씬 소심했던 탓에 우물쭈물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게다가 엄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이 일이 특별히 나쁜 기억으로 뿌리를 내렸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그저 스쳐간 것 중 하나입니다. 제게 남은 것은 세밀한 기억의 무게가 아니라 기억들이 흘러가며 만든 결입니다. 작은 물방울들이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떨어져 움푹 파인 돌처럼요.     


    저는 마음이 몸에서 출발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종종 제게 도착하는 마음이 없는 것에는 이런 탓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요. 물론 꼭 그렇지 않은 것도 압니다. 하지만 사는 일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뒤틀린 인과 속에서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아시지요.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거나 그러고 싶은 사람이 생겨도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오래도록 실패해 온 주제에 좋은 사람을 원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사람이 이 사실을 알면 저를 더 깊은 부끄러움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지요. 제 몸을 이유로요. 역시 비틀린 생각입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는 이유로 부끄러움은 아주 오래 제 삶에 존재했습니다. 그토록 다른 날씨, 다른 사람들, 다른 장소, 다른 분위기, 다른 웃음, 다른 울음으로, 도저히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오직 부끄러움이라는 성질만 나누어가진 형태로 말입니다.

      

    쓰고 보니 부끄러움이 이토록 깊다는 사실에 또 고개를 돌리고 싶어 집니다. 짧게나마 솔직하여 오래 얼굴을 붉힐 일입니다. 그만 쓰겠습니다. 이것은 버려지지 않는 것을 버리려 도망하는 걸음입니다. 길은 익숙하므로 곧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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